"The Oscar goes to…'Parasite'"(오스카의 주인공은…'기생충')
코로나19의 여파로 온 국민이 우울에 빠져 있던 지난 10일(한국시간). 미국 LA에서 낭보가 들려왔다. 이날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주인공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었다. 시상식 초반 각본상을 받은 '기생충'은 작품상까지 휩쓸며 4관왕에 올랐다. '로컬'한 아카데미를 석권한 '기생충'. 영화의 실제 '로컬'도 주목받고 있다. 서울관광재단은 지난 12월 '기생충 촬영지 탐방코스'를 선보였다. 영화처럼 폭우가 쏟아지진 않았지만 스산한 비가 내렸던 지난 12일 이 코스를 직접 찾아 현장을 느끼고 사람들을 만나봤다. 코스가 소개한 순서대로, 교통편대로 이 길을 밟았다.
◆영화의 서막, 아현동 '돼지슈퍼'
영화 속 박서준은 자신의 과외자리를 최우식에게 소개한다. 그 장면 촬영지, 아현동 '돼지슈퍼'다. 충정로역 6번 출구에서 10여 분을 걸어 그곳에 도착했다.
초현실적이었다. 평범한 동네 슈퍼에서 뿜어져 나오는 느낌에 다시금 영화 속으로 빨려들었다. 슈퍼에서 사진 찍던 일본인 에미코 씨도 연신 감탄사를 외쳤다. 그는 "이곳이 여행 와서 첫 번째로 온 곳"이라고 말했다. 한국말이 서툰 에미코 씨는 기자에게 한국 음료를 추천받아 '봉봉'과 '갈아 만든 배'를 사며 "영화는 무서웠지만 굉장히 흥미로웠다. 그래서 인터넷을 보고 이곳에 찾아오게 됐다"고 수줍게 말했다.
돼지슈퍼는 이 지역 터줏대감이다. 근처 버스 정류장 이름도 돼지슈퍼. 운영자 이정식 씨와 김경순 씨 내외는 매경닷컴과의 인터뷰에서 "여기서 장사한 지 45년 됐다"고 밝혔다. 이씨는 "영화 촬영을 한다고 해서 못 할 것 뭐 있나 싶어 흔쾌히 알겠다 했다"면서 "그냥 찰칵 찍어 가는 걸로만 생각했는데 가게 앞을 평평하게 보수하고 준비할 게 많더라"라고 회상했다.
`돼지슈퍼`를 운영하는 김경순 씨(좌)와 이정식 씨(우) 내외. 이들은 아카데미 시상식을 지켜보며 환호했다고 전했다. [사진 = 김형준 인턴기자]
이씨는 봉 감독의 지휘에 혀를 내둘렀다. 이씨는 "영화를 감독이 다 하더라"라며 "지휘봉 들고 편히 있는 게 감독인 줄 알았는데 땀 흘리며 처음부터 끝까지 지시를 하더라"라고 말했다. '봉테일' 감독의 성공은 여기서 예견됐을지 모를 일. 내외는 영화를 무척 재밌게 봤다면서 "우리집이 나와 기분이 좋았다. 상도 타서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른다"고 입꼬리를 올렸다.내외는 가게를 찾는 이들이 많아졌지만 장사는 여전히 힘들다고 입을 모았다. 김씨는 "장사는 안되고 사진만 찍고 간다"고 말했다. 이씨도 "(매출에) 영화의 영향은 없다"며 "돼지슈퍼라면 알아줄 정도로 잘됐지만 마트가 들어서면서 힘들어졌다"고 털어놨다. 다만 내외는 남은 세월을 보내기 위해 슈퍼를 지킨다며 미소 지었다. 이곳에 방문할 땐 음료수 한 잔 사서 여정을 위해 목을 축여보자.
◆'상승과 하강'의 계단들
`돼지슈퍼` 인근에 있는 계단. 영화 속에서 박소담은 복숭아를 들고 이곳을 지나갔다. [사진 = 김형준 인턴기자]
전문가들에 따르면 기생충에는 상승, 하강의 이미지들이 자주 그려진다. 이 장치로 기능한 장소가 바로 계단들. 돼지슈퍼 코너를 돌면 보이는 계단도 그 주인공이다. 영화 속 박소담은 복숭아를 들고 이 계단을 통해 부잣집으로 향한다.특별할 것 없는 아현동의 계단. 계단 가장자리로 놓인 여러 개의 화분들이 정겹다. 주택가에 위치한 만큼 주변 주민들도 자주 오르내리는 계단이었다. 주위에 버려진 쓰레기들이 아쉬워 몇 개 주워 다음 코스로 이동했다.
또 다른 '기생충 계단'인 자하문터널 계단을 찾기 위해 20여분 지하철을 타고 경복궁역으로 향했다. 여기부터는 걸을 준비를 하는 게 좋다. 코스는 경복궁역에서 도보 10분이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곱절은 생각해야 한다. 다만 조용한 서촌의 분위기를 느끼다 보면 금세 자하문터널에 도착한다. 영화 인물들은 계단을 내려와 터널로 진입하지만 코스대로 경복궁역에서 출발하면 터널을 통과해야 비로소 계단을 볼 수 있다.
송강호 가족이 도망쳐 오던 자하문터널 계단. 기자가 직접 올라본 계단은 생각보다 가팔랐다. [사진 = 김형준 인턴기자]
부잣집 가족들을 피해 도망친 송강호 가족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계단은 꽤 가팔랐다. 역부터 꽤 걸어온 탓일까. 계단을 다 오르니 숨이 찼다. 이곳에서도 사진을 찍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시네필'(영화 애호가)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김경수 씨는 "한국 영화의 기념비적인 일을 놓치기 싫어 명장면이 촬영된 이곳을 찾았다"고 말했다. 이어 "버스를 타고 지나다니던 길인데 오스카를 받은 영화 현장이라니 감회가 새롭다"고 덧붙였다.경복궁역으로 돌아갈 땐 계단을 올라 반대편으로 건너 터널을 지나가 보자. 이곳은 인도 보호벽이 있어 터널을 조용히 통과할 수 있다.
◆"피자기계 과부하" 영화팬 성지된 '스카이피자'
송강호 가족이 박스 접기 아르바이트를 했던 노량진 `스카이피자`. 이날도 영화를 보고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사진 = 김형준 인턴기자]
'피자 박스 빨리 접는 영상'은 기생충을 본 관객이라면 모두 기억할 것. '피자시대'로 등장한 이 피자집은 동작구 '스카이피자'다. 경복궁역에서 지하철로 30여분. 노량진에 도착해 도보 15분이면 이곳을 찾을 수 있다. 소박한 가게엔 '기생충 출연' 배너가 달렸고 촬영 때 쓰인 '피자시대' 박스가 진열돼 있다.출출한 속을 채우려 스카이피자의 맛을 보려 했지만 기계에 과부화가 와 피자는 안 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운영자 엄항기 씨는 멋쩍게 웃으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3개의 테이블이 놓인 가게. 아쉬운 대로 다른 대표 메뉴인 매콤한 닭강정을 시켜놓고 엄씨와 대화를 나눴다.
`스카이피자`를 운영하는 엄항기 씨와 그 뒤로 진열된 `피자시대` 박스. 엄씨는 힘든 와중에도 연신 미소를 짓는 모습이었다. [사진 = 김형준 인턴기자]
엄씨는 17년째 이 자리에서 피자를 굽고 있다. 복잡할 것을 우려한 남편이 촬영을 반대했지만 엄씨는 "나는 시골 사람이라 궁금해서 해보자고 했다"고 촬영 배경을 설명했다. 그는 "봉 감독과 스텝이 와서 2시간여 치밀히 장소를 보고 갔다"며 "제작사에서 '사장님 당첨됐어요!'라고 전화가 오더라. 작은 피자집 8군데 중 이곳이 선정된 것"이라고 후일담을 전했다.제작사 초대권을 받아 영화를 봤다는 엄씨는 "우리집이 얼마 나오진 않지만 초반에 나와 사람들 기억에 많이 남는 것 같다"며 "외국인들도 꽤 많이 오고 있다"고 밝혔다. 인터뷰를 진행할 때도 한 외국인이 치킨을 먹으며 방명록을 작성하고 있었다. 엄씨는 매출도 평소보다 올랐고 이날은 기계에 과부화가 왔다며 웃었다.
빵집을 운영하기도 한 엄씨 내외. 엄씨는 "반죽 등 기술을 터득하고 단계를 밟아 피자집을 차렸다"며 "기생충 이후 이렇게 사람들이 인정해주니 그간의 응어리가 풀어지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다만 "재료가 떨어지면 피자는 더 팔지 않고 있다. 모사꾼처럼 하면 안 된다. 대충해서 나가면 안 되지 않나"라는 원칙을 전했다.
반나절 간의 '기생충 투어'를 스카이피자 닭강정으로 마무리한 기자는 메인테마 '믿음의 벨트'를 들으며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바이러스로 우울한 와중 '오스카 수상'이라는 단비 같은 기쁜 소식에 환호한 팬들, 이번 주말엔 모처럼 기생충의 발자취를 따라 촬영 코스를 돌아보는 것도 좋겠다.
[디지털뉴스국 김형준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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