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 아라리오갤러리 계단에서 무리와 떨어진 쥐 한마리가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고 있다. 브론즈(청동) 작품이다.
23일 10번째 개인전에서 만난 씨킴(김창일) 아라리오 회장(68)은 "저 쥐가 바로 나"라고 말했다. 어렸을 때 소풍 가서도 아이들과 안 놀고 나무나 새와 이야기해서 바보 취급을 받았다. 사람들한테 뭔가를 말하면 면박을 당하기 일쑤여서 자연스레 혼자 놀았다.
그는 "28세까지 계속 그래서 더 이상 세상을 못 살겠더라. 창피하지만 병원(정신과)에도 몇 번 갔다. 그러나 혼자 머리 속에서 펼친 상상의 나래를 사업과 작품으로 풀어 성공했다. 어찌보면 열등감이 내 인생의 원동력이다"고 털어놨다.
1978년 모친이 적자에 허덕이는 천안종합버스터미널 운영을 맡겼을 때 임대 매점들을 직영으로 돌린 후 코카콜라·삼립빵 등 인기 상품을 팔아 흑자 전환시켰다. 1989년에는 대지 6만6000㎡(2만평) 규모를 매입한 후 터미널 외에 신세계백화점 충청점과 멀티플렉스극장, 갤러리 등을 열어 천안의 명소로 만들었다.
세계적 미술품 컬렉터로도 이름을 알렸던 그는 1999년 갑자기 독학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갤러리 직원에게 캔버스를 구해달라고 해서 작업을 시작했다. 내 머릿 속 우주에 너무 많은게 들어있어서 화폭에 풀어냈다. 그동안 병인줄 알았는데 에너지 원천이었다."
김창일 회장
그림으로 마음을 치유한 그는 2003년부터 2년 주기로 개인전을 열고 있다. 'Voice of Harmony(조화의 소리)'라는 제목을 내세운 이번 개인전에는 커피로 작업한 회화, 목공용 본드와 물감을 섞어 바른 작업, 도끼로 찍어낸 자국이 가득한 알루미늄 패널 등 추상 작품 등을 펼쳤다. 누워 있는 남자 그림에 실제 링거(수액병)를 연결한 작품도 눈에 띈다."원래 한가지 작업을 오래 못한다. 새롭게 하고 싶은게 많아서다. 2년 되면 모든 작업을 올스톱(중단)시킨다. 링거를 단 그림은 다음 작업에 대한 예고편이다. 지금까지 감정을 도발하는 추상에 집중했다면, 앞으로는 감정이 있는 사람 모습과 풍경 등 구상 작업을 하고 싶다."
이번 전시작은 마시다 남은 커피, 백화점에서 버린 마네킹, 오래된 인형, 제주 바다에서 주운 스티로폼 부표, 헌 붓이나 다 쓴 물감 등을 활용했다. 일상 소재들을 조화시켜 작품을 만든다는 의미에서 예술가를 '오케스트라 지휘자'에 비유했다.
"어느날부터 선(線)이 악보 오선지처럼 보이더라. 선으로 형태를 만들고 색깔을 배합하니까 음악이 들리기 시작했다. 작업하다가 발작해서 노래 '골목길'이나 '그것만이 내 세상' 등을 부른다. 예술 뿐만 아니라 사업도 모든 요소가 하모니를 이뤄야 한다."
김창일 회장
지휘자 같은 예술가가 되기 위해선 체력이 필수다. 노동력이 필요한 액션 페인팅을 주로 하기에 이날 새벽에도 월봉산 정상까지 올랐다. 이렇게 혼신을 다한 그의 작품을 구입하려는 사람도 있지만 팔지 않는게 원칙이다."내 작업 과정은 아직도 실험이며 완성이 아니다. 다행히 사업이 잘 돼 재정 부담은 없다. 처음에는 사업가이자 컬렉터인 내가 그림까지 그린다고 손가락질을 받았지만 요즘에는 나같은 사람이 많더라. 내면의 세계가 중요하다고 느끼는 시대가 온 것 같다."
그는 상하이 웨스트번드 갤러리, 공간 사옥을 활용한 아라리오 뮤지엄인스페이스, 제주시 탑동 영화관과 동문로 모텔 등을 개조한 미술관 등 8개 갤러리·미술관을 운영하고 있다. 문어발식 확장에 "작품을 갤러리·미술관 가격으로 싸게 사려는 것 아니냐"는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죽으면 다 밝혀질 것이다. 문화재단을 만들어 평생 모은 미술품 4000여점을 기부할 계획이다. 원래 앞서 가는 사람은 욕먹기 마련이다. 예전에 비난했던 천안 시민들도 요즘 나를 만나면 고맙다고 운다."
내년 3월에는 중국 항저우에 복합문화센터 '뮤지엄 박스' 건립을 시작하고, 제주도에 미술관과 연계한 리사이클링숍 '디앤디파트먼트'를 오픈한다. 지난해 터미널·백화점·극장 등으로 매출 3200억원을 올린 그의 공격 경영은 계속된다. 전시는 10월 13일까지.
[천안 =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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