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에는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돼 있습니다
30일 서울 삼청동 한 카페. 1년 6개월여 만에 재회한 정지우 감독(49)과 마주 앉아서는 대뜸 이같은 물음부터 던졌다. "무엇에 관한 '침묵'인 건가요?"
그는 즉답을 피했다. 예기치 못한 질문이라는 듯 골똘히 생각에 잠기더니 이같이 답하는 것이다. "그게, 여러 의미가 있을 텐데요···. 비루한 누군가가 한 사건을 계기로 참회하게 된달까요. 그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상태. 인간이 자기가 살아온 방식과 다른 일을 했다면 크게 생색 낼 수 있을 텐데, 그럼에도 발설할 수 없는 상태 같은."
이 무슨 얘기냐 하면, 정 감독의 첫 법정물 '침묵'(2일 개봉)의 제목과 관련한 것이다. 주인공 태산(최민식)이 직면하는 상황이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진실을 숨겨야 하는 상황. 여기엔 사연이 있다. 가진 게 '돈' 뿐인 자수성가형 재벌 태산은 외동딸 미라(이수경) 때문에 커다란 사건에 휘말린다. 자신의 약혼녀이자 유명 가수 유나(이하늬)가 누군가에 의해 죽음에 이르는 것. 아빠를 경멸하던 딸은 자신이 살인 용의자로 지목되자 "기억이 안 난다"며 흐느낄 뿐이다.
사랑하는 딸이 사랑하는 연인을 죽인 참담한 상황이지만 태산에겐 통곡할 겨를이 없다. 미라를 살인범으로 확신하는 검사 성식(박해준) 등에 맞서 어떻게든 딸을 무혐의로 만들어야 한다. 이 또한 부성애라면 부성애일 터. 물론 그 수단은 '돈'이다. 그는 자신이 비루해지는 한이 있더라도 딸 대신 살인범으로 내몰리기를 자처한다. 딸은 아빠의 진심을 알게 될까.
"태산의 부성애가 그리 쉽게 바라볼 문제는 아니죠. 부녀관계가 쉽게 풀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 관계가 과장되지 않은 방향으로 미세하게 달라지는 점에 주목했어요. 태산을 아빠로 부르지 않던 딸이 종국에 '아빠' 하고 부르게 되는 게 최대한 자연스럽도록요. 상당히 어려운 부분인데 최 선배가 굉장히 잘해주셨어요."
실제로 '침묵'은 배우 최민식에 상당 부분 기대고 있는 영화다. 그의 존재 자체가 발산해내는 강한 기운이 프레임 전반을 장악한다. 그만큼 연기가 압권이다. 계획대로 자신이 살인범으로 몰렸을 때 드러내는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증언선서 장면이 대표적이다. "저를 포함해 현장의 모두가 그저 경외의 눈으로 바라봤던 신이죠."
정 감독은 "자수성가 재벌이라면 자기 논리 안에 세상이 돌아간다는 확신을 갖는 꽉 막힌 사람 일 수 있다"며 "그래서 스스로를 바꾸기가 더 힘들 것"이라고 했다. "그런 사람이 어린 딸을 무혐의로 만들겠다며 자신의 모든 걸 내려놓으려 해요. 여지껏 '돈' 만이 진심이라 여기던 사람이 말이죠. 그래서 시작과 끝의 편차가 더욱 강한 거고요."
최민식의 연기가 압도적이지만 다른 주·조연들이 묻혀가는 건 아니다. 외려 빛난다. 미라를 변호하는 변호사 희정(박신혜)과 미라를 살인 용의자로 확신하는 검사 성식,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인 CCTV 기사 동명(류준열) 등 각자의 자리에서 제 몫을 해낸다. "대선배의 배려와 격려 덕분"이라 했다. "최 선배는 언제나 곁을 내주려 하셨어요. 후배들이 자신에게 가려지길 바라지 않으니까요."
'침묵'의 순제작비는 63억원. 지난해 선보인 '4등'의 열 배다. 220만명 이상 봐야 손익분기점을 넘긴다. 정 감독은 "관객이 제목처럼 침묵하면 안 되는데"라며 웃음 지었다. "우리는 주로 눈에 보이는 것만 사실로 믿죠. 하지만 그게 진실이 아닌 경우가 많아요. 이면에 더 많은 사연이 있을테니까. 이 메시지가 잘 전해지길 바라요."
[김시균 기자 / 사진 = 한주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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