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이정근이 받은 건 '뒷돈'? '빌린 돈'? 엇갈린 판결 [법원 앞 카페]
입력 2024-02-25 09:00 
이정근 전 더불어민주당 사무부총장 (사진=연합뉴스)
재판이 끝난 뒤 법원 앞 카페에 앉아 쓰는 법원 출입기자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때로는 소소하면서도 때로는 중요하지만 잊혀진 그런 법정 안팎이야기를 다뤄보려 합니다.



송영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비롯한 전·현직 국회의원들이 연루돼 재판으로 넘겨진 ‘민주당 돈봉투 사건, 돈봉투 수사의 단초를 제공한 건 ‘이정근 녹취록의 당사자 이정근 전 민주당 사무부총장이죠.

이 전 부총장은 사업가 박우식 씨로부터 청탁을 알선해주는 대가로 뒷돈을 받은 혐의로 징역 4년 2개월이 확정돼 수감 중입니다.

그런데 최근 이 전 부총장이 징역형을 선고받은 재판과 모순되는 다른 재판 결과가 하나 나왔습니다. 박 씨가 이 전 부총장을 상대로 ‘빌려준 돈을 갚으라며 소송을 냈는데 1심 법원이 일부를 갚아주라고 선고했기 때문입니다. 한 재판에서는 ‘뒷돈을 준 것이니 유죄가 되고, 다른 재판에서는 ‘빌린 돈이니 갚으라는 판단이 나온 거죠.

이 전 부총장 입장에서는 당황할 만한 상황입니다. 앞선 형사재판에서 이 전 부총장은 9억 원 가량 뒷돈을 받은 사실이 인정됐기 때문에 추징금으로 9억 원을 내라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추징금은 추징금대로 내고 빌린 돈도 갚아야 하는 상황인 겁니다.


똑같은 날짜·액수인데…판결은 엇갈려

먼저 ‘빌린 돈이니 박 씨에게 갚으라고 한 판결을 한 번 보겠습니다. 지난달 26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0부(이세라 부장판사)는 이 전 부총장이 박 씨에게 1억 3,400만 원을 갚아주라고 선고했습니다.

박 씨는 당초 이 전 부총장에게 돌려받아야 하는 돈이 7억 원이라고 주장했는데 이 중 법원은 6억 6,500만 원을 빌려준 돈으로 인정했습니다. 다만, 이 전 부총장이 이 중 5억 3,100만 원을 이미 갚은 상태라는 주장을 받아들여 차액인 1억 3,400만 원을 갚으라고 한 거죠.

박 씨가 이 전 부총장에게 빌려준 돈이라고 인정된 내역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난달 선고에서 빌린 돈으로 인정 된 내역

2020. 2. 12. - 5,000만 원
2020. 3. 13. ~ 3. 31. - 1억 1,500만 원
2020. 4. 7. - 4,500만 원
2020. 4. 14. ~ 5. 4. - 1억 3,500만 원
2020. 6. 30. ~ 7. 14. - 2억 2,000만 원
2021. 12. 14. - 1억 원 (바로 돌려줌)

그런데 대법원에서 유죄로 인정된 이 전 부총장의 혐의를 보면 같은 날짜와 같은 액수가 그대로 등장합니다.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같은 돈을 받았는데 이건 빌린 돈이 아니라 분명히 ‘뒷돈이라고 다른 판단을 내린 거죠.

지난해 대법원에서 뒷돈으로 인정된 내역

2020. 2. 12. - 선거자금 5,000만 원
2020. 3. 13. ~ 3. 31. - 선거자금 1억 1,500만 원
2020. 4. 7. - 선거자금 등 4,500만 원
2020. 4. 14. ~ 5. 4. - 선거자금 등 1억 3,500만 원
2020. 6. 30. ~ 7. 14. -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 알선 대가 2억 2,000만 원


형사와 민사의 차이가 만든 모순

서울중앙지방법원 (사진=연합뉴스)

대법원에서 이 전 부총장 혐의가 확정된 건 지난해고 빌린 돈이라고 본 1심 판결은 그보다 늦은 지난 달입니다. 그런데 왜 이번 재판부는 대법원과 다른 판단을 내렸을까요?

일단 빌린 돈이라고 인정한 1심 법원도 대법원의 판단이 더 신빙성이 있다는 듯한 언급을 했습니다.

박 씨와 이 전 부총장 사이에 차용증이 작성되지 않았는바 9억 원 이상 큰 금액 돈을 대여하면서 이런 처분문서를 작성하지 않은 것은 이례적이다.

이 전 부총장 확정판결에서 금전수수 명목은 대여가 아닌 공무원 직무에 속한 사항의 청탁 내지 알선 또는 선거자금으로 인정된 것으로 이 사건에서 형사사건 확정판결의 인정과 달리 위 같이 수수된 돈이 대여금이라고 볼 만한 객관적 자료가 없다.

- 지난달 민사 1심 선고


그렇지만, 1심 법원은 이렇게 밝혔습니다.

"이 전 부총장이 인정하는 합계 6억 6,500만 원을 대여한 사실은 당사자 사이에 다툼이 없다."

쉽게 말해 ‘빌린 돈이 아니라 뒷돈이라는 증거와 판결이 있지만 당사자가 모두 빌린 돈이라고 하니 빌린 돈이라고 인정한다 라는 다소 일반 상식과는 맞지 않아 보이는 판단인 겁니다.

이런 판단이 나온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민사 재판과 형사 재판의 차이 때문입니다. 법원 관계자는 당사자 사이에 다툼이 없는 사실은 그대로 판단의 기초가 되고, 다툼이 없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한 채 증거를 가지고 사실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대법원 판례가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형사 재판은 증거로 혐의를 판단하지만 민사는 ‘당사자 간의 다툼이 있는 것만 판단해야 한다는 원칙 때문이라는 거죠. 때문에 박 씨가 '빌려준 돈이 맞다', 또 이 전 부총장이 '빌린 돈이 맞다'고 함께 인정한 부분은 증거와 다른 부분이 있더라도 더 따지지 말고 그대로 인정한 겁니다. 그 결과 형사 재판에서는 뒷돈 혐의가 인정돼 징역형과 추징금을, 민사 재판에서는 돈을 빌린 걸로 인정돼 갚아야 한다는 모순적인 결론이 나오게 됐습니다.

이정근이 모순 자초한 이유

여기서 의아한 부분이 생깁니다. 그럼 이 전 부총장은 왜 굳이 빌린 돈이 맞다고 인정을 해서 추징금도 내고 빌린 돈도 갚아야 하는 상황을 초래한 걸까요? 빌린 돈이 아니라 뒷돈을 받은 걸로 처벌됐고 추징금도 냈으니 박 씨에게 갚을 필요는 없다고 주장하면 추가로 돈을 갚아야 하는 상황은 생기지 않을 텐데 말이죠.

이유는 재판 시점 때문입니다. 박 씨가 이 전 부총장에게 돈을 돌려달라고 한 민사 재판은 2022년 5월에, 이 전 부총장의 뒷돈 혐의 형사 재판은 2022년 10월에 시작됐고, 지난해와 지난달 각각 결론이 나기까지 거의 동시에 재판이 진행됐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 전 부총장은 두 재판에서 모두 '내가 받은 건 뒷돈이 아니라 빌린 돈'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를 두고 증거로 판단하는 형사재판에서는 빌린 돈이 아니라 ‘뒷돈이라고 인정해 유죄를 선고한 반면,

피고인은 보험계약 대출금 상환, 조카 전세보증금 용도로 차용한 금액이라고 주장하나 피고인이 5개월에 걸쳐 1,000만 원에서 5,000만 원에 이르는 돈을 14회에 걸쳐 받으면서도 변제 시기, 이자 등은 어떻게 정했는지, 차용증 같은 입증 서류가 작성되었다는 사정이 보이지 않는다.

박 씨는 수사 개시 전에는 빌려준 돈이라고 주장한 정황이 다수 있지만 당초 청탁 목적으로 금품을 줬다가 목적을 이루지 못하자 금품을 돌려받기 위한 목적으로 빌려준 돈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걸로 보인다.

- 지난해 10월 형사 2심 선고

앞서 본 것처럼 양측의 의사를 더 중요시하는 민사 재판에서는 두 사람이 모두 빌린 돈이라고 주장하니 ‘빌린 돈으로 인정하는 차이가 벌어지게 된 겁니다.

이제 ‘뒷돈 받았다 주장해야 하는 아이러니

이 전 부총장에게 남은 선택지는 이제 하나입니다. 뒷돈으로 인정한 형사 재판은 이미 대법원에서 확정된 만큼 뒤집을 방법이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남은 건 민사 재판 2심에서 '뒷돈을 받은 게 맞고 빌린 돈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혐의를 부인하기 위해 빌린 돈이라고 주장했지만 이젠 반대로 돈을 추가로 갚아야 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뒷돈'을 받았다고 인정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횡이 됐죠. 항소장을 낸 이 전 부총장 측은 형사 판결이 이렇게 확정됐으니까 형사 판결대로 판결해달라”는 입장이라고 밝혔습니다.

[우종환 기자 woo.jonghwan@m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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