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환경미화원·소방대원 자비로 초대한 '젊은 그대' 김수철…"최고다" 터져나왔다 [김기자의 문화이야기]
입력 2023-10-12 19:39  | 수정 2023-10-13 15:26
데뷔 45주년 기념 공연 '김수철과 동서양 100인조 오케스트라' [사진=세종문화회관]
동·서양 100인조 오케스트라 공연…김수철의 지휘 데뷔 무대
사비 10억 들여 꿈의 무대…거장 김덕수와 '기타산조', 오랜 호흡 뽐내
가수 백지영·성시경·양희은·이적·화사, 우정 출연
관객들 "정말 대단한 '작은 거인'…동·서양 합친 오케스트라도 감동적"

무려 데뷔 45주년을 맞은 가수 김수철이 검은 연미복을 입고 나타나, 1988년 서울 올림픽과 국민 애니메이션 '날아라 슈퍼보드', 영화 '서편제', 2002년 한일 월드컵의 주제곡까지 우리나라의 중요한 순간들을 굵직하게 기록한 자신의 자작곡들을 들려주었습니다.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동양과 서양을 아우르는 오케스트라와 함께 한 어제(11일) 오후 3시 천원의 행복 무대는 김수철의 지휘자 데뷔 무대였습니다. 국악에 진심인 김수철은 동·서양이 어우러지는 '꿈의 무대'를 위해 사비로 제작비 10억여 원을 쏟았습니다.

우리 현대 음악사에 큰 족적을 남긴 김수철이 작곡한 주요 곡들을 무대에 올려 처음으로 모두 지휘·연주·노래한 현장의 분위기를 기록합니다.

"우리 국악, 재미없거나 감동적이지 않아…은혜 갚기 위해 무료공연"

첫 곡은 김수철이 '88 서울올림픽 주제곡으로 작곡한 '도약'. 세계 최초 동서양 100인조 오케스트라가 그 위용을 드러냈습니다. 신디사이저와 태평소와 가야금, 철가야금, 아쟁 소리가 섞였지만 이질적인 분위기 없이 각 악기의 활기찬 생동감이 전해졌습니다.


첫 곡을 마친 김수철은 "15년 전부터 하고 싶었지만, 대기업에서 후원해주지 않았고 혼자 이리 뛰고 저리 뛰다 결국 자비로 했다"며 "우리 국악이 재미없거나 감동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고 공연을 계기로 우리 문화에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고 말했습니다.

'천원의 행복 무대'인 낮 공연은 전석을 소방관, 경찰, 환경미화원, 우편집배원 등의 무료 초대 관객으로 채우게 되어 김수철의 바람을 이룬 순간이기도 합니다.
데뷔 45주년 기념 공연 '김수철과 동서양 100인조 오케스트라' [사진=MBN]

무료 공연 기획 취지에 대해 김수철은 "제 음악을 들으셔서 제가 돈도 벌고 밥도 먹고 국악 공부도 했기 때문에 은혜를 갚는 의미로 무료공연을 하고 싶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둘째로, 힘든 곳에서 열심히 일하는 분들을 초대해서 위로하고 싶었고 응원하고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었다"고 말해 관객들로부터 갈채를 받았습니다.

간명한 손동작으로 지휘…연미복 입어 연신 땀 닦아

두 번째로 들려준 곡은 지난 1995년 팔만대장경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후에 전 세계에 팔만대장경을 알리는 국가적 캠페인의 작곡가로 선택된 김수철이 만든 '팔만대장경 1악장'의 서곡 '다가오는 구름'.

4분의 4박자에 충실한 손모양으로 지휘하는 김수철의 얼굴이 화면에 나타났고, 고요하게 울려퍼진 신디사이저 소리에 음울한 듯 장엄한 관현악 소리가 베이스로 깔리고 반복적인 드럼 소리, 그리고 불협화음 같은 타악기 소리가 더해져 집중감을 높였습니다.

음반을 듣는 것처럼 드럼 소리가 생생하게 재현되는 가운데, 변주를 주듯이 조금 더 고음인 서양의 현악 선율이 더해지자 환상적인 분위기가 연출되었습니다. 여기에다 우리의 단청북과 큰 북을 치는 타자 18~20명이 큰 몸짓을 보여주자 몽고군의 침략이 다가오는 듯한 긴박감이 느껴졌습니다.
데뷔 45주년 기념 공연 '김수철과 동서양 100인조 오케스트라' [사진=세종문화회관]

김수철은 연신 얼굴과 뒷목의 땀을 닦아냈습니다. 하지만 아리랑만큼 잘 알려진, 김수철이 작곡한 영화 '서편제'의 OST곡 '소리길'의 지휘는 자연스럽게 시작되었습니다.

신비한 음이 신디사이저로 깔리고 다정하게 옛 이야기를 전해주는 듯 김수철의 오른편에 앉은 연주자가 곡의 주 멜로디를 소금으로 연주했습니다. 서양의 현악은 잔잔하게 소금 연주를 받쳐주는 반주 역할을 했기 때문인지 잘 어우러지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소리길' 연주를 하는 동안 무대 화면에는 영화 '서편제'의 주인공들이 구비구비 언덕길을 이야기하면서 내려오는 듯한 영상이 상영돼 관객들이 추억 속의 명장면을 떠올릴 수 있게 했습니다.

이어진 곡은 영화 '서편제'의 메인 테마곡 '쳔년학'. 김수철의 손짓에 맞춰 관현악이 장엄하고 아름다운 분위기의 곡을 연주했고, 김수철의 오른편에서 이번에는 대금 연주자가 구슬프게 우는 듯이 떠는 소리를 길게 내, 청자의 집중도를 높이고 전율이 생기게끔 했습니다. 실제로 객석 곳곳의 관객들은 양손을 모아 쥐면서 집중해 듣는 모습이었습니다.

김수철은 현악 전체를 향해 지휘할 때 양손으로 현악을 가리키거나 양팔을 쭉 내뻗는 동작을 하면서 간명하게 표현했습니다.

다음은 출연료 없이 가요계의 거장 김수철을 위해 우정출연을 결심한 가수들의 공연 순서. 김수철은 그제서야 자신이 입은 연미복을 가리키며 "이 복장이 처음인데 더워 죽겠다"며 너스레를 떨었고, 연신 땀을 훔치는 모습을 지켜본 관객들은 크게 웃었습니다.

"진짜 거인은 김수철 선생님"…존경심 드러낸 가요계 후배들

데뷔 45주년 기념 공연 '김수철과 동서양 100인조 오케스트라' [사진=세종문화회관]

첫 우정 출연 가수 성시경은 "가요계의 소중한 분께서 오랜만에 나오신다고 하셔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겠다고 했다"며 "무대를 보실 때 제가 거인 같아 보이겠지만 진짜 거인은 김수철 선생님"이라 말했습니다. 성시경이 부른 김수철의 명곡 '내일'은 절절하고 감미로웠고 가사 '흘러 흘러' 부분에서는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관객 호응을 이끌어냈습니다.

두 번째 우정 출연 가수 화사는 늘씬하게 선이 떨어지는 드레스를 입고 등장한 뒤 "김수철 선배께서 공연하신다고 해서 맨발로 뛰어왔다"고 말했고 사무치는 김수철의 곡 '정녕 그대를'을 화사 특유의 허스키한 음색으로 소화했습니다. 기교 없이 담담하게 부른 노래였지만 화사만의 스토리를 떠올리게끔 했습니다.

세 번째 가수 이적은 인사말 할 시간 없이 바로 연단에 올라간 김수철의 호흡에 맞춰 명곡 '나도야 간다'를 열창했습니다. 박수를 유도하는 이적의 손짓에 맞춰 관중은 박수를 쳤고, 장난기 가득한 음색의 이적은 가사 '나도야 간다'의 '야'와 '다'에서 특유의 바이브레이션이 나오는 시원한 가창력을 뽐냈습니다. 힘차게 "뚜두뚜두" 소리를 내며 스캣으로 흥을 더욱 돋우었고 김수철은 행복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국악의 현대화 위해 5장르 개척"…김덕수와 '헤드뱅잉'

공연 중반부에 김수철은 국악을 현대화하는 방법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습니다. 김수철은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저는 국악의 클래식화, 국악의 현대음악화, 국악의 뉴에이지화, 국악의 대중음악화, 그리고 기타산조라는 5장르를 개척했다"고 말했습니다.

이윽고 들려준 곡이 1989년 작곡한 곡 '야상'. 기본박인 드럼 소리에 물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 멋들어진 기타 소리가 점진적으로 쌓여갔고, 제일 윗편에 자리 잡은 타악기 인원 6~7명의 매우 빠른 리듬 소리가 원곡보다 더욱 큰 소리로 추가됐습니다. 여기에 비올라, 첼로, 더블베이스 등 현악기 소리가 추가되고 드럼이 속도를 더해가자 김수철은 연단에서 뛰어오르며 넘치는 흥을 표현했습니다.

전설적인 김수철의 곡, '기타산조'의 기타 연주는 사물놀이의 창시자인 장인 김덕수와 함께 콜라보됐습니다. 아쟁산조와 가야금산조, 대금산조가 아닌 기타에 우리의 산조 가락을 섞은 김수철의 창의적인 기타 연주를 김덕수와 함께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청중의 박수가 쏟아졌고, 김덕수는 연두빛 한복을 입은 채 자신의 장구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데뷔 45주년 기념 공연 '김수철과 동서양 100인조 오케스트라' [사진=세종문화회관]

김수철의 기타와 연결된 앰프에서 '위잉'하는 소리가 시끄럽게 났고 소리가 줄어들지 않자 김수철이 "미안합니다"라고 사과하는 해프닝이 있었지만, 김수철 특유의 친숙한 말투를 들은 관중은 불쾌감 없이 즐겁게 웃었습니다.

두 거장의 콜라보 무대는 압권이었습니다. 기타로 미묘하게 떨리는 우리 국악기와 같은 소리를 재현한 김수철을 본 김덕수는 신명나게 힘찬 장구 소리를 냈고,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지면서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헤드뱅잉하듯이 한 방향으로 머리를 흔들기도, 이후 주고 받듯이 한 사람이 머리를 뒤로 하면 다른 사람은 머리를 앞으로 빼는 등의 동작을 하며 무아지경의 경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격한 연주 탓에 숨을 몰아쉰 김수철은 "김덕수 형과 우리 둘이는 밥만 준다면 2시간은 계속 연주한다"라고 말하며 씩 웃었습니다.

흡입력 있는 노래 부른 우정출연 가수들…"가수 양희은, 40년 넘은 인연"

다음은 다시 우정 출연 가수 순서. 가수 백지영이 "의미있는 공연에 오셔서 환영한다"고 관중을 향해 말했고 김수철의 곡 '왜 모르시나'를 들려주었습니다. 앞선 가수 성시경·이적과 마찬가지로, 가사 한 음절 안에서도 마치 악기처럼 노래의 성량을 크거나 작게 섬세하게 조절한 백지영은 흡입력 있게 노래를 열창해 관중의 열띤 반응을 이끌어 냈습니다.

마지막 우정 출연 가수는 양희은이었습니다. 김수철은 "대학교를 다닐 때 알았고 40년 넘게 아직도 좋은 인연으로 아직도 친누나처럼 모시는 분"이라며 회사 후원 없이 이 공연을 준비할 때도 심적으로, 그리고 여러 면에서 양희은이 도움을 줬다고 밝혔습니다.

관중의 박수 소리에 맞춰 김수철의 명곡인 '정신차려'를 부르기 시작한 가수 양희은은 노래 중간 중간 객석을 가리켜 흥겨운 분위기를 이어갔습니다.

엉덩이 춤 춘 지휘자…연단 위에서 펄쩍 펄쩍 뛰어오르기도

마지막 지휘곡은 2002년 한일월드컵 개막식 곡 작곡의 영예를 안은 김수철이 작곡한 주제곡 '소통'. 김수철은 "축구는 이념과 정치, 국익을 떠나 공 하나로 다같이 하나가 되는 스포츠가 아니냐"며 "동서양의 모든 정서를 담으려고 했다"고 작곡 의도를 설명했습니다.

마이크가 꺼져 있는 상태에서 김수철은 연단에 서서 "아!"하고 외치는 이색적인 지휘를 시작했습니다. 이에 맞춰 자리를 채운 타악기 인원이 "하!"하고 기합했고 반복적으로 힘차게 도약하는 듯한 북소리를 들려 주었습니다. 곡의 분위기를 전환한 것은 펑키한 기타 소리와 태평소의 소리, 여기에 현장에서 연주하는 꽹과리 소리가 더해지고, 인도와 남미 타악기까지 더해져 세계적인 축제 분위기를 자아냈습니다.

화려한 드럼 소리와 함께 음악이 후반부로 치닫자 김수철은 팔을 좌우로 뻗기도 하고, 검지에 포인트를 준 채 손을 위로 휘젓거나 엉덩이 춤까지 추었습니다. 지휘자로서 지휘의 엄격함을 지키려고 하기보다는 관중이 그대로 그 흥겨움을 느끼게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지휘자 김수철은 곡의 신이 나는 구간에서는 연단에서 두 발 모두를 동시에 들어올려 펄쩍 펄쩍 자리에서 뛰기도 했습니다.

'날아라 슈퍼보드'와 '젊은 그대' 들은 관객, 큰 소리로 웃고 춤 춰

김수철은 직접 노래할 자신의 히트곡 3가지도 준비했습니다.

열띤 지휘로 숨이 찬 상태에서 곡 '날아라 슈퍼보드'를 노래한 김수철은 긴 가사인 '치키치키차카차카초코초코초'가 반복되는 구절을 힘겨워 하며 소화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무대를 달리는 듯 뛰어 객석에 앉은 관중이 큰 소리로 웃게 만들었습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조차 지휘자인 김수철의 모습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김수철이 들려준 마지막 히트곡은 '못 다 핀 꽃 한 송이'와 '젊은 그대'. 일부 중장년 여성 관중은 "오빠"를 외치기 시작했고, 마지막 곡 '젊은 그대'에서는 자리에서 일어나도 된다는 말에 객석 곳곳의 관객들이 마음껏 일어나 어깨동무를 했고 "최고다"를 외쳤습니다.
데뷔 45주년 기념 공연 '김수철과 동서양 100인조 오케스트라' [사진=세종문화회관]

김수철은 "요즘 많이 힘들다고 하지만 힘들수록 서로 생각하고 위하고 함께 사는 세상이 절실하다"며 "오늘 공연을 계기로 해서 우리 문화에 관심도 가져야겠지만 옆에 계신 어려운 분들을 생각하면서 사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습니다.

관람객 "오랫동안 새로운 길 걸었던 김수철, 감동적"

관람객들은 '김수철의 재발견'이라며 이러한 공연을 계속 해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습니다.
데뷔 45주년 기념 공연 '김수철과 동서양 100인조 오케스트라' [사진=MBN]

경찰관 가족을 따라 온 관람객 전재윤은 "초등학교 때 알던 가수인데 동양과 서양을 합쳐 오케스트라 협연도 하셨고 동요와 월드컵 개막식 음악도 다 하셨는데 오래 한 길, 새로운 길을 걸으셨다는 점에서 감동적이었다"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소방관인 관람객은 "기존의 틀을 깨는 공연인데 이렇게 음악이 되는구나 싶어서 새로웠다"며 "김수철의 노래를 듣고 컸는데 한동안 얼굴을 못 보다가 보니까 너무 좋았고, 정말로 대단한 '작은 거인' 같다"고 말했습니다.

음악 애호가라고 자신을 소개한 다른 관람객은 "곡 '못 다 핀 꽃 한 송이'를 부를 때 마치 모든 정열을 쏟아낸 꽃 한송이 같았다"고 감격했습니다.

[ 김문영 기자 kim.moonyoung@mbn.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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