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이원석 검찰총장 제주 찾은 이유는…"소년범 아닌 학생" [서초동에서]
입력 2023-03-27 14:08  | 수정 2023-03-27 15:50
이원석 검찰총장이 24일 오전 제주시 외도동 올레길을 찾아 '손심엉 올레' 관계자들과 인사하고 있다. /출처= 연합뉴스
이 총장, 제주지검장 재직 시절 '손 심엉 올레' MOU 체결
소년범과 자원봉사자, 손 잡고 제주 올레길 걸어
제주 방문해 4.3 희생자 추모…사랑의 쌀 기증도
이 총장 "이건 개양귀비…마약과는 달라"


푸른 파도가 해안가로 밀려오며 자갈밭에 부딪치자 이내 거품으로 흩어져 자갈 사이사이를 훑고 빠져나갑니다.

이원석(54·사법연수원 27기) 검찰총장이 올레길 옆 바다 쪽으로 소년의 손을 끌었습니다.

"모래 대신 자갈이 있는 알작지 해변이에요. 한 번 들어봐요."

파도가 해변을 때리고 빠져나가면서 '자각자각' 소리가 들리자 함께 있던 소년들이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 총장은 길가에 핀 꽃을 보고 학생들에게 꽃을 하나하나 설명해주기도 했습니다.

"이건 유채꽃이고 이건 개양귀비에요. 마약이 되는 양귀비와는 달라요."

소년범과 자원봉사자 손 잡고 제주 올레길 걸어

'손 심엉 올레'에 참가한 학생들과 자원봉사자들 / 출처=대검찰청
제주지방검찰청(지검장 이근수)은 사단법인 제주올레·제주소년원·청소년범죄예방위원회 제주지역협의회·소년보호위원 제주소년원협의회와 함께 지난 24일 제 13회 '손 심엉 올레!'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손 심엉 올레는 '손 잡고'의 제주 방언 '손 심엉'과 올레길을 합쳐 만들어졌습니다.

이 총장이 제주지검장 재직 시절인 지난해 5월 제주올레 등과 업무협약(MOU)을 추진해 시작된 손 심엉 올레는 말 그대로 소년범과 자원봉사자들이 함께 손 잡고 제주 올레길을 걷는 선도 프로그램입니다.

손 심엉 올레는 3개월 간 2000㎞를 걸으면 석방하는 프랑스 교정 프로그램 '쇠이유(Seuil)'에서 착안하여 만들어졌으며 자연에서 직접 몸을 움직이며 성취감과 자존감을 높이고, 손을 잡는 온기를 통해 상처와 분노를 치유하는 게 프로그램의 목표입니다.


이날 제주에 도착한 이 총장은 제주 올레길 17코스 일부 구간 13㎞를 한길정보통신학교(제주소년원) 학생 5명과 손을 잡고 걸었습니다.

다음 달에 학교를 나가는 한 학생은 취재진에게 "안에 있다가 바깥에 나와 바닷바람 맞으니 자유로운 기분이 들어요"라고 말하며 손 심엉 올레에 나온 소감을 말했습니다.

"학교에 와서 많은 걸 배웠어요. 무엇보다 제가 누리는 것들이 당연한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학교에 와서 하게 돼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됐어요. 다음 달에 나갈 예정인데 밖에 나가서 친구들이랑 어울리면 다시 사고칠 수도 있잖아요. 어머니랑 상의해서 학교 나가자마자 바로 군대 가기로 했어요. 어머니 많이 못 보고 바로 군대가는 건 아쉽지만 군대에서 더 차분히 가라 앉히고 프로 운동 선수를 목표로 연습할 계획이에요"

이 총장, 소년범 대한 관심과 애정 바탕으로 '손 심엉 올레' 추진

손 심엉 올레가 만들어진 배경에는 소년범에 대한 이 총장의 관심과 애정이 있었습니다.

이 총장은 제주지방검찰청 검사장으로 취임하기 전인 지난 2020년 수원고검에서 '보호관찰심사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습니다.

위원장은 유관기관과 함께 가출소, 처우 변경, 임시 퇴원 조치 등 소년범 선도에 대한 업무를 관장합니다.

이 시기 이 총장은 이들을 '소년범'이 아닌 '학생'으로 부르기 시작하며 범죄자가 아닌 개개인의 인격체로 소년범들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학생들과 마주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당시 이 총장은 학생 개개인의 사연에 귀를 기울이며 "소설 같은 어려운 삶을 보낸 학생들을 보고 이야기를 들으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했다"고 회상한 바가 있습니다.

이 총장은 학생들과 교류하면서 '만일 좋은 환경에서 자라났다면 어땠을까'라는 물음이 마음 속에 자라나자 '우리 사회가 아이들을 잘 돌봐주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소신을 가졌다고 합니다.

검찰총장으로서 두 번째로 4.3 희생자 추모

공동체가 미래 세대를 품고 지켜야 한다는 이 총장의 사고관은 서구 철학에서는 공동체주의, 동양 철학에서는 공자의 인(仁)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내가 몸담고 있는 조직을 넘어 더 넓은 범위의 공동체를 아끼고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가짐입니다.

이런 이 총장의 마음가짐은 이날 이 총장의 제주 방문 행보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제주 4.3 피해자들을 추모하는 이원석 검찰총장 / 출처=대검찰청
이 총장은 '손 심엉 올레!'에 앞서 제주 4·3 평화공원을 참배하며 김오수 전 검찰총장에 이어 검찰총장으로서는 두 번째로 4.3 희생자들을 추모했습니다.

검찰은 범죄자를 색출하고 범죄를 입증하는 기관입니다.

그런데 그런 검찰 기구의 장이 유죄를 받았던 제주4.3 피해자들을 무죄로 밝혀 이들의 명예회복에 힘쓰고 있습니다.

이 총장은 제주지검장으로 재직하던 시기 4.3유족과 유족협의회 관계자들과 직접 소통했고 검찰 직권으로 피해자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도록 ‘제주 4·3사건 직권재심 권고 합동수행단을 출범시키는 데도 큰 기여를 했습니다.

합동수행단 출범 이후 총 2,500여 명의 피해자들 중 861명에 대해 재심청구가 이뤄졌고, 이 중 510명에게는 무죄판결이 확정됐습니다.

사랑의 쌀 기증…배우 고두심 행사 동참

이원석 검찰총장이 김만덕 기념관에서 배우 고두심 씨와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 출처=대검찰청
이어진 김만덕 기념관 방문 일정에서 이 총장은 사랑의쌀 400㎏을 기증했습니다.

제주 출신 배우 고두심 씨가 기념관으로 급히 찾아와 이 총장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고 씨는 "이 총장이 제주지검장 시절 5번에 걸쳐 기념관을 방문해 50만~100만 원씩 기부를 한 사실을 듣고 꼭 한 번 뵈려고 했다. 제주도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촬영 일정을 마치자마자 나머지 일정 취소하고 깜짝 방문했다"라며 이 총장을 만난 소감을 풀었습니다.

김만덕(1739~1812)은 정조 시기의 인물로 제주도에서 크게 상업활동을 하여 부를 축적한 상인인 동시에 아사할 뻔한 제주도민을 구제한 의인입니다.

1793년 제주도에서 대기근이 일어나 조정에서 구휼선을 보냈지만 풍랑에 침몰하여 제주도민이 모두 아사할 위기에 놓였습니다.

그러자 김만덕은 전재산을 털어 쌀 450석을 사 제주도민들에게 베풀었는데 당시 기록에 따르면 김만덕의 의행으로 제주도민 1,100여 명이 목숨을 건졌다고 합니다.

이 총장은 김만덕이 당시 여성이라는 시대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개척해 거둔 과실을 공동체를 위해 아낌없이 나눈 점을 존경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상협 기자 lee.sanghyub@m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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