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창조성 넘치던 현대도시 파리의 좋은 시절…8인의 거장 '맛보기'
입력 2022-10-07 16:38  | 수정 2022-10-07 16:46
폴 고갱, '센강 변의 크레인'(1875), 캔버스에 유채, 77.2×119.8cm,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넓은 하늘과 강 사이에 서있는 건설공사 크레인. 평범해 보이는 이 풍경화는 폴 고갱(1848~1903)의 '센강 변의 크레인'(1875)이다. 이국적인 타히티 여인 그림으로 유명한 고갱이 증권중개인으로 일하던 1874년 '제1회 인상주의 미술전'을 보고 감명받아 그린 초기작이다. 그는 1883년 금융위기로 주식시장이 위축되자 전업화가로 돌아섰다. 중세식 도시 파리가 한창 현대화되던 이때 창의성이 넘치는 젊은 화가들이 몰려들어 파리를 주로 그렸고 국제 미술의 성지가 됐다. 고갱 그림을 본 카미유 피사로(1830~1902)는 폴 세잔을 소개하며 그를 이끌었다. 피사로는 60대에도 신인상주의에 합류해 점묘기법으로 '퐁투아즈 곡물시장'(1893)을 그렸다.
카미유 피사로, '퐁투아즈 곡물 시장'(1893), 캔버스에 유채, 46.5×39cm,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 교과서에서나 보던 서양 근대 미술 거장들의 작품이 등장했다. 지난해 고 이건희 삼성 회장(1942~2020) 유족이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1488점 중에서 해외미술 97점을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모네와 피카소, 파리의 아름다운 순간들'에서 공개했다. 고갱과 피사로, 클로드 모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살바도르 달리, 호안 미로, 마르크 샤갈 등의 회화 7점과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할 파블로 피카소의 에디션 도자 90점이 출품됐다.
마르크 샤갈, '결혼 꽃다발'(1977-78), 캔버스에 유채, 91.5×72.8cm,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 Marc Chagall - ADAGP Paris - SACK Seoul 2022)
클로드 모네, '수련이 있는 연못' (1917-1920), 캔버스에 유채, 100x200.5cm,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세기의 기증 덕에 국립현대미술관은 자존심을 세웠다. 특히 고갱 작품은 기존 소장품인 휴버트 보스의 '서울풍경'(1899)보다 24년 앞선 작품이다. 그간 없던 서양 명화를 확보해 소장품은 1만점을 훌쩍 넘겼다.
지난 4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기증 1주년 특별전에도 공개된 모네(1840~1926)의 말년작 '수련이 있는 연못'(1917~1920)이 매력적이다. 백내장으로 시력을 잃어가던 모네는 시간과 계절 따라 달라지는 형태와 색채를 수련 연작 250여점에 담았다. 하늘과 연못, 구름을 평면적으로 그려 추상미술의 출발점으로도 평가받는 작품이다. 지난해 소더비 경매에서 비슷한 작품이 800억원대에 낙찰돼 이번 서양미술 기증품 중 가장 비싸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노란 모자에 빨간 치마를 입은 앙드레(독서)' (1917-1918), 캔버스에 유채, 46.5×57cm,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모네와 함께 파리 근교 야외 풍경을 그렸던 르누아르의 말년작 '노란 모자에 빨간 치마를 입은 앙드레(독서)'(1917~1918)를 비교해 봐도 좋다.
스페인에서 이주해 파리의 젊은 거장 반열에 오른 피카소(1881~1973)가 남프랑스 발로리스 마두라 공방에서 만든 한정판(edition) 도자도 여성성 탐구를 보여준다. 피카소의 마지막 사랑 자클린을 담은 입체주의풍 '이젤 앞의 자클린'(1956)과 석고 틀로 찍어낸 '자클린의 옆모습'(1956)이 마치 다른 작가 작품같다. 여인 몸체 도자에 얼굴을 그린 '여인램프'(1955)는 말년의 실험성이 돋보인다.
호안 미로, '회화'(1953), 캔버스에 유채, 96×376cm,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피카소를 좇아 파리로 온 고국 후배들 미로(1893~1983)의 추상 '회화'(1953)와 달리(1904~1989)의 초현실주의 회화 '켄타우로스 가족'(1940)도 나란히 걸렸다. 제2차 대전후 피카소와 만났던 러시아 출신 유태인 화가 마르크 샤갈(1887~1985)의 말년작 '결혼 꽃다발'(1977~1978)은 청색조 풍경이 몽환적이다.
전시장은 초저녁 가로등이 켜진듯 자연광 같은 조명으로 19세기 말~20세기 초 예술 중심지로서 파리가 창의성을 뿜어내던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절)'를 재연하려 애썼다. 1원형 전시실 벽에 회화 7점이 걸렸고 안쪽에 피카소 도자와 그의 영상이 있다.
파블로 피카소, 황소 (1955)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파블로 피카소, 이젤 앞의 자클린(1956)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피카소가 약 25년간(1947~1971) 제작한 도자는 장인들이 피카소를 따라 그리거나 판화처럼 찍어 25~500개씩 생산하며 예술의 대중화를 시도했다. 이 도자는 최근 경매에서 수백만~수천만원에 거래됐다.
파블로 피카소, 검은 얼굴 (1948)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전유신 학예연구사는 "8명의 거장들이 동시대 파리에서 맺었던 다양한 관계에 초점을 맞췄다"며 "고 이건희 회장은 동일한 사물을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는 '입체적 사고'를 강조했는데 이번 소장품들도 입체적 사고로 감상해 새로운 차원의 눈을 뜨게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전시는 내년 2월 26일까지.
[이한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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