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단독] "파산 선고 받으면 경비원·보험설계사도 못했지만…" 서울회생법원, 파산자 취업제한 폐지 추진
입력 2020-07-26 16:16  | 수정 2020-07-26 16:46

'공무원, 건강기능식품판매원, 보험설계사, 일반경비원, 아이돌보미, 아파트 동별 대표자, 전통 소싸움경기 소주인….'
이 직업들은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파산 선고를 받은 채무자들은 이 직업들을 가질 수 없다. 이처럼 파산자의 취업을 제한하는 법 조항들로 채무자가 사회로 돌아와 경제활동을 하기 위해 파산을 신청했다가도 면책을 받지 못하면 사실상 피해만 떠안게 되고 재기가 어려워진다는 지적이 많았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면책을 받지 못한 파산자들의 취업 제한을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법원에서 나왔다.
26일 서울회생법원 관계자는 "지난 20일 도산절차자문위원회에서 파산선고를 받은 사람들의 취업을 제한하는 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법무부와 기획재정부, 금융위원회 등에 전달했다"고 밝혔다. 또 "관계 부처 공무원들도 이러한 문제제기에 공감했다. 실무상 쟁점을 정비한 뒤 다음 회의를 열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개인파산 절차는 크게 파산 선고와 면책으로 나눠진다. 먼저 채무자가 파산을 신청하면 법원은 재산과 부채, 변제 능력 등을 고려해 파산이 필요하다고 판단될 경우 선고를 한다. 이후 이뤄지는 절차가 면책이다. 면책까지 마치면 파산 신청인의 남은 채무에 대한 변제책임은 면제되고 파산 선고로 생기는 불이익도 사라진다. 그러나 면책이 불허되면 채무 변제책임이 유지되는데다 다른 불이익도 남아있게 된다. 채무자가 재기를 위해 파산을 신청했으나, 사실상 정상적 경제활동을 통해 사회로 복귀할 길이 막히는 것이다.
백주선 한국파산회생변호사회장(47·사법연수원 39기)는 "위기에 몰린 사람을 다시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있게 하는 것이 파산제도지만 불이익이 커 취지가 침해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또 "채권자들은 채무자들이 파산제도를 남용한다고 주장할 수 있으나 개인의 경제위기는 무능과 낭비보다 구조적 문제로 생기는 경우가 더 많다"고 설명했다.

지난 2006년에는채무자회생법 제32조 제2항으로 '차별적 취급의 금지' 조항이 신설됐다. 회생절차나 파산절차에 있다는 이유로 정당한 사유 없이 취업의 제한이나 해고 등 불이익을 받아선 안 된다는 규정이다. 그러나 이는 선언적 규정에 불과하고 여전히 각 법에는 취업제한이 명시돼 있다. 국가공무원법 제33조와 제69조는 각각 파산선고를 받고 면책을 받지 못한 자는 공무원으로 임명할 수 없고 재직 중인 경우 퇴직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공인회계사법 제4조와 변호사법 제5조도 같은 내용을 직업의 결격 사유로 규정하고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건강기능식품판매원, 보험설계사, 일반경비원, 아이돌보미 등 진입장벽이 높지 않은 직업, 심지어는 아파트 동별대표자나 전통 소싸움경기 소주인 같은 직종도 제한된다.
서경환 서울회생법원 수석부장판사(54·21기)는 지난해 10월 발표한 논문 '파산면책의 정당화 근거 및 개인도산제도 활성화를 위한 개선방안'에서 "파산선고를 받고 복권(면책)되지 않은 것을 직업상 결격사유로 규정하고 있는 법 규정이 226개나 존재한다는 것이 큰 문제"라고 밝혔다. 또 "이러한 법규정은 파산 선고 자체를 불성실의 징표나 사회적 신뢰의 상실로 이해하고 징벌이나 불이익을 줘 채무자의 갱생이라는 도산제도의 목적에 정면으로 반한다"고 설명했다.
파산 선고를 받은 자들의 취업제한 폐지 논의가 처음은 아니다. 지난 2005년과 2014년에도 법무부가 취업제한 폐지를 추진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최근 3년간 개인파산이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는데다 코로나19 사태가 가져올 경기둔화로 파산 신청이 급증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파산자들의 재기를 막는 법 조항을 고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대법원 통계에 따르면 2018년 상반기 법원에 접수된 개인파산 사건은 총 2만1175건이었으나, 지난해 같은 기간에는 2만2924건이 접수된 데 이어 올해 상반기에는 2만4112건이 접수됐다. 파산을 선고받았으나 면책이 기각되며 불이익만 떠안은 인원도 2018년 상반기에는 1200명인 반면 지난해 상반기에는 1458명으로 늘었다. 올해 같은 기간에는 지난해보다 소폭 줄어든 1359명이 면책을 신청했으나 기각됐다.
도산법 전문가로 꼽히는 한 고법 부장판사는 "해외 사례를 보더라도 파산 선고를 받는다고 해 직업을 잃고 취업까지 제한되는 건 이례적"이라고 했다. 또 "채무자가 궁지에 몰렸을 때, 파산제도를 활용했을 때 받는 불이익이 큰 것을 우려해 다른 부정한 방법을 사용할 여지도 커진다"고 설명했다.
서울회생법원은 이외에도 개인파산·회생 접수 증가에 대비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지난 22일에는 전체법관회의를 열고 개인회생 특별면책 요건으로 비자발적 실직으로 인한 장기간의 소득 상실 등을 추가하는 실무준칙 개정안을 의결했다. 회의에 앞서 파산회생제도개선TF에서는 개인회생 신청인을 상황에 따라 파산절차로 전환할 수 있도록 보정명령을 활성화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서류를 통일해 절차를 간소하게 하는 방안과 해외 사례를 분석해 국내에도 관련 입법을 제안하는 방안 등이 검토됐다.
[정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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