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시인들의 시인` 실비아 플라스 돌아오다
입력 2020-06-12 14:25 
메리 벤투라와 아홉 번째 왕국

영미권 현대시인이자 소설가인 실비아 플라스(1932~1963)는 세기가 지나도록 여전히 회자되는 예술가다. 숭배되거나 추앙되는 모든 것을 배격한 그는 세 번에 걸친 자살시도 와중에도 '거상', '에어리얼(Ariel)', '벨 자(Bell Jar)'를 남겼다. 세 권의 책은 사후 반 세기 동안 전세계 예술가로부터 인용되고 또 재생산됐다.
소설처럼 살다 시처럼 죽은 실비아 플라스의 미발표작 단편 '메리 벤투라와 아홉 번째 왕국'(창비)이 최근 한국에 출간됐다. 1952년 그녀의 나이 스무 살 무렵에 쓰였으나 정식 출간되지 못한 채 인디애나대에 보관돼 있다가 작년에서야 영국의 한 출판사가 펴낸 책이다. 사후 출간된 시 전집으로 시 부문 퓰리처상을 받은 실비아 플라스의 초기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 메리는 부모의 강제로 북부행 기차에 올라 어디론가 떠난다. 목적지는 '아홉 번째 왕국'이다. 그러나 그곳이 어디인지, 왜 가는지, 누굴 만나러 가는지를 알지 못한다. 아홉 번째 왕국은 절대적인 미지의 장소다. 검은 바탕에 빨간색으로 목적지 숫자만 적힌 차표는 이상하다. 문제는 열차가 반드시 편도이며, 그 여행에서 왕복은 허락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단 네가 아홉 번째 왕국에 도착하면, 돌아오는 일은 없어. 그곳은 부정(否定)의 왕국, 의지가 꽁꽁 얼어붙은 왕국이야."
종착지를 상상하며 메리와 동행하다 보면 그녀의 불길한 여행이 시간 그 자체의 흐름이란 걸 어렵지 않게 짐작케 된다. 목적지인 왕국은 '시간의 끝'이자 각자의 개별화된 죽음으로 진입을 뜻하는 듯 읽힌다. 또 정차하지 않는 기차는 시간의 알레고리임을 환기한다. 이쯤에서 실비아 플라스가 설정한 메리는 철학의 오랜 난제이자 일종의 가설인 '던져진 존재'에 가닿음을 깨닫게 된다.
"저 사람들은 자기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나요?" "저들은 눈이 멀었어. 저들은 다 완전히 눈이 멀었어."
실비아 플라스 신작은 진은영 시인이 번역했다. 진 시인은 '옮긴이의 말'에서 실비아 플라스가 결국 1963년 2월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실과 이번 책을 등치하며 "그는 원치 않는 목적지로 가는 기차에서 스스로 내렸다. 가장 과격한 방식으로 비상 정차를 감행했다"며 "자신에게 충실하기 위해서는 죽거나 미쳐야만 했던 그의 곁에는 다른 방식으로 탈출을 도와줄 친구가 없었다"고 썼다.
[김유태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MBN APP 다운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