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배우 정진영, 영화 '사라진 시간'으로 감독 데뷔
입력 2020-06-12 08:46  | 수정 2020-06-19 09:05


33년 차 배우는 한없이 겸손했습니다. 영화 '사라진 시간'을 쓰고 연출한 배우 정진영은 "완성된 게 대견할 뿐"이라고 낮춰 말했습니다.

17살에 품었던 연출의 꿈을 40년 만에 이룬 소감은 '발가벗겨진 느낌'. "작품에 내가 담기면 연민을 갖게 되기 때문에 절대 안 된다"라고는 했지만 "내가 모르던 내가 담겨 있어 추궁당하는 느낌"이라고 했습니다.

영화는 장르를 규정짓기 어렵습니다. 어느 시골 마을에 들어온 젊은 교사 부부가 화재로 숨지고, 사건을 수사하던 형사 형구(조진웅 분)가 하룻밤 사이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는 경험을 합니다. 가족은 사라지고 동네 사람들은 자신을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사라진 시간'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 감독이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놓지 않고 있다는 실존주의적 질문을 던지는 영화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남이 생각하는 나의 괴리는 누구나 겪는 일이고, 남이 보는 내가 궁금해졌습니다.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상황은 굳이 따져 묻지 않아도 됩니다. 해석은 틀린 게 있을 수 없고, 관객의 자유입니다. 해석을 꼭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 작품에 앞서 다른 작품이 있었는데 버렸어요. 나는 다른 식의 정서나 발상을 가진 줄 알았는데 되게 관습적이어서 놀랐죠."

이후 '내가 왜 자꾸 눈치를 보나, 틀리든 맞든 내가 느끼는 대로 투박하게 가자' 하고 한달음에 시놉시스를 쓴 게 이 영화입니다. 떠오르는 생각들을 따지지 않고 늘어놓은 시놉시스의 처음과 끝은 영화에서 그대로 유지됐습니다.

정 감독은 "갑자기 시작해 갑자기 끝나야 한다"고 처음부터 생각했고, 결국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세련된 무엇을 할 생각은 없었어요. 많은 것을 숨겨놓긴 했지만, 설명이 많지 않은 영화이고 싶었고요. 재담 넘치는 할머니의 이야기나 아라비안나이트처럼, 조금 이상하지만 작은 배에 같이 올라 파도를 타듯 어디로 갈지 모르는 이야기를 따라가는 거죠. 아기자기하게 돌아가는 것 그 자체로 재밌게 만들고 싶었고, 재밌게 보셨으면 합니다."

정 감독은 "내가 '슬픈 코미디'라고도 했는데 그것조차 오해의 여지가 있다"며 "장르라는 틀로 보지 않고 그냥 이야기를, 형구를 따라가는 영화로 보시는 게 가장 좋을 것 같다"고 덧붙였습니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어느 순간 들려온 카펜터스의 '클로스 투 유'(Close To You)가 귀에 꽂혔고, 이후 같은 음악을 반복해 들으며 시나리오를 마무리했습니다.

쓰는 내내 주인공 형구로 상상했던 조진웅에게 완성된 초고를 건네기 직전 '클로스 투 유'를 가제로 붙였습니다. 음악도, 제목도 아쉽지만 쓸 수는 없었습니다.

빨리 거절당하려고 초고를 건넸던 조진웅이 하루 만에 출연을 결정했고, 영화를 책임졌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형구가 밤새 술을 마시며 괴로워하는 롱테이크 장면은 감독이 "연기뿐 아니라 다른 모든 걸 포함하는 아름다운 장면"으로 꼽았습니다.

현역 배우인 감독의 연기 지도는 배우를 믿는 것이었습니다.

"배우를 믿습니다. 배우는 줄거리가 아니라 감정을 가지고 오거든요. 내가 생각한 것과 약간 다른 감정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틀린 감정을 가져오진 않아요. 주황을 요구했는데 주홍을 가져왔다고 주황을 요구하진 않아요. 녹색을 가져오면 소통을 통해 바꿔야죠."

개봉을 앞둔 지금이 가장 떨리고 힘들다는 정 감독은 차기 연출작에 대해 그 어느 질문보다 단호하게 답했습니다.

"한 번은 내가 하고 싶다는 이유로 해도 되지만, 두 번째는 그것만으로는 할 수 없어요. 영화에 참여한 배우와 스태프를 책임져야 하는데, (다시 한다면) 더 큰 책임을 질 능력이 되어야죠.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에요. (차기작은) 정말 모르겠습니다."

[MBN 온라인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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