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브라질 국채 투자 어쩌지`…헤알화 폭락 속 정국 혼란 가중
입력 2020-04-24 16:29  | 수정 2020-04-26 17:37

중국발 코로나바이러스19(COVID-19) 여파가 덮친 브라질 정치·경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모양새다. 코로나19 피해가 커지는 가운데 대통령이 군부 쿠데다 옹호 집회에 참가하는 식이다. '스타 판사' 출신 법무부 장관은 사의를 표했고, 대통령에게 '신자유주의 개혁' 전권을 받아 이를 추진하던 경제부 장관은 주요 정책 발표 자리에 나오지 않고 있다. 정국 혼란 속에 브라질 헤알화 가치도 연일 추락하면서, 브라질 국채에 투자했던 글로벌 투자자들은 조바심 어린 시선을 모으고 있다.
23일(현지시간) 세르지우 모루 법무부 장관이 장관직 사의를 표명했다고 로이터통신이 이날 전했다. 장관은 "대통령이 경찰청장을 바꾸면 나도 그만둘 것"이라면서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의 인사 방침에 대해 공개 반발했다. 대통령은 경찰 장악력을 높이겠다면서 모루 장관이 직접 임명한 마우리시우 발레이슈 경찰청장을 다른 인물로 교체하겠다고 장관에 통보한 상태다.
모루 장관이 장관직을 내려 놓겠다고 하자 브라질 안팎이 술렁이는 모양새다. 모루 장관은 판사 시절 이른바 '세차 작전'(Lava Jato) 수사를 지휘하면서 나라의 뿌리깊은 정경유착 관행과 위선을 캐내 '좌파의 아이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전 대통령을 뇌물 수수혐의로 감옥에 넣은 인물이다. 세차 작전은 좌·우 정권을 막론하고 역대 브라질 대통령들과 국영 석유기업 '페트로브라스', 건설사 '오데브레시' 등이 줄줄이 얽힌 비리를 밝힌 계기였다. 이 과정에서 브라질 뿐 아니라 파나마, 페루 등 이웃 나라 정권 부정부패까지 드러나 중남미 대륙 희대의 수사로 통했다.
모루 장관은 여론 지지가 높아 2022년 대선에 출마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재선을 노리는 보우소나루 대통령도 모루 장관을 '러닝메이트'(부통령 후보)로 거론했었다.

모루 장관은 파울루 게지스 경제부 장관과 함께 보우소나루 정권을 지탱하는 상징적 인물이다. 모루 장관은 사법·치안을 아울러 '사회 분야'를 총괄하고 게지스 장관은 투자·재정·기획을 아울러 '경제 분야'를 총괄하는 슈퍼 부처 수장이다.
이런 가운데 게지스 장관마저 최근 거취가 심상치 않아 정권 균열론이 부각되고 있다. 23일 게지스 장관은 연방 정부의 '프로-브라질'(Pro-Brazil)투자 발표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현지 폴랴지상파울루 신문 영문판이 전했다. 프로-브라질은 정부의 3개년 공공인프라프로젝트로 정부 주요 사업이다.
대신 타르시시우 프레이타스 인프라부 장관과 월터 브라가 네투 육군참모총장이 대신 계획을 발표해 눈길을 끌었다. 네투 총장은 최근 브라질 내 쿠데타 설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달 초 브라질에서는 주요 부처 장관과 군 고위 간부들이 네투 총장을 보우소나루 대통령을 대신한 '사실상 대통령'으로 추대했다는 일부 언론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재정 균형'을 중시하는 게지스 장관이 23일 발표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이유는 '재정 확장'에 방점을 둔 투자 계획에 반발한 탓이라는 게 외신 분석이다. 이날 프로-브라질 투자 규모가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았지만 기존 180억 헤알(약 4조210억원)으로 잡힌 예산이 300억 헤알(약 6조7017억원)으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로이터통신이 이날 전했다.
글로벌 금융시장에서는 브라질 투자자들이 게지스 장관의 한 마디 한 마디에 대해 귀 기울여왔다. 보우소나루 대통령이 '신자유주의 개혁' 전권을 장관에게 부여했기 때문이다. 장관은 보우소나루 대통령이 대선 후보이던 시절 '민영화·공공 부채 줄이기' 등 신자유주의 경제 공약을 만들었고 이를 통해 국내외 '브라질 투자' 열풍을 일으켰던 인물이다.
브라질 정국 혼란의 한 가운데 선 것은 다름아닌 대통령 본인이다. 공군 출신인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열대의 트럼프'로 불리며 극우 선동을 일삼아왔다.
이런 가운데 20일 브라질 연방대법원은 대통령이 참가한 극우 집회를 '헌정 질서·민주주의 훼손' 혐의로 조사하기로 결정했다. 알레산드리 지 모라이스 대법관은 "연방검찰총장 요청을 받아들여 지난 19일 수도 브라질리아 육군본부 앞에서 열린 군부 쿠데타 지지 집회 조사를 허용한다"고 밝혔다. 해당 집회는 대통령이 참가해 '군사 독재정권 시절 보안법 부활·군부 정치 개입 확대'를 주장하는 연설을 한 행사다. 다만 사법당국은 대통령 권위를 감안해 보우소나루 대통령을 직접 조사 대상으로 거론하지는 않았다.
코로나19판데믹 사태에 대한 막말과 기행 탓에 이미 '대통령 왕따설'도 돌았다. 지난 16일 대통령은 '코로나19 방역'을 강조한 루이스 엔히키 만데타 보건부 장관을 해임하고 다른 사람을 새로 임명했다. 대통령은 "어차피 사람은 죽는다"면서 사회적 거리 두기나 봉쇄령에 반대했고, 보건 당국 경고를 무시한 채 마스크를 벗고 대규모 극우 집회에 나가 연설을 하는가 하면 사람들 손을 부여잡고 사진을 찍는 식의 기행을 거듭해왔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 온라인 사회연결망(SNS) 업체들이 '대통령의 게시물이 공중 보건을 해친다'는 이유로 줄줄이 삭제했을 정도다.
이미 시민들이 나서서 '냄비 시위'를 벌여가며 '대통령 퇴진'을 외치는 가운데 갈수록 정국 혼란이 짙어지자 야권도 이를 기회로 삼고 퇴진 압박에 나섰다. 브라질 연방 하원에는 대통령 탄핵 추진 요구서가 최소 24건 접수됐다. 하원 의장이 탄핵 절차 개시 여부를 결정하지 않았지만 '브라질 좌파의 아이콘' 룰라 전 대통령이 언론 인터뷰와 SNS를 통해 "지금같은 코로나19 위기상황에서 보우소나루는 더더욱 대통령 자격이 없다"면서 "우리는 대통령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것을 용납해선 안될 것"이라고 강조하며 여론 조성에 나섰다. 일부 야권 정당과 시민단체들은 "보우소나루를 쫓아내는 것이 코로나19 대응의 기본"이라는 내용을 담은 성명서도 발표했다.
브라질 정국 혼란 속에 헤알화 가치는 연일 바닥치고 있다. 코로나19판데믹까지 겹치면서 지난 1994년 7월 '헤알 플랜'(Plano Real) 도입 이후 통화 가치가 쭉쭉 빠지는 중이다. 법무 장관과 경제 장관 관련 소식이 전해진 23일에는 달러 대비 헤알화 환율이 5.53헤알로 올랐다. 이날 기준 올해 들어 환율이 37%가량 올랐다. 환율이 오른다는 것은 그만큼 통화가치가 빠진다는 것이다. 코로나19판데믹으로 브라질 원자재 수요가 줄어드는 가운데 유가 폭락으로 브라질 원유도 유탄을 맞는 등 악재가 쌓이고 있기 때문이다.
브라질 국채 투자자들의 불안감도 커질 수밖에 없다. 최근 브라질 국채 10년물 금리는 7%선을 오가고 있다. 수익률이 높아보이지만 이자 수익과 별개로 헤알화 가치가 추락하면 그만큼 환 손실도 커진다.
한편 23일 상파울루 증시의 보베스파(Bovespa) 지수도 전날보다 1.26% 하락한 결과(79673포인트) 8만 포인트를 밑돌았다. 지난해 대통령 취임 초기 10만 포인트를 돌파하며 사상 최고 랠리를 이어가던 것과 반대되는 분위기다.
브라질 중앙은행은 '극심한 경기 침제 위기'를 이유로 다음 달 5~6일 열리는 통화정책회의에서 기준금리를 사상 최저치로 인하할 가능성을 시사했다. 한때 연 14.25%까지 올라갔던 기준금리는 현재 연 3.75%로 내려간 상태다. 3.75%는 1996년 브라질이 기준금리 체제를 도입한 후 역대 최저 수준이다. 유엔 산하 중남미·카리브 경제위원회(CEPAL)는 올해 브라질 경제가 -5.2%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할 것으로 보고있다.
[김인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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