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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K현장]정태춘 박은옥의 저항은 시대를 뛰어넘는다
입력 2019-03-07 15:46 
정태춘 박은옥. 사진|강영국 기자
[매일경제 스타투데이 박세연 기자]
정태춘 박은옥. 이 부부가 사는 법은 특별하다.
정태춘은 20세기 후반 한국 사회의 모순과 저항을 온몸으로 담아낸 실천적 예술가다. 새로운 세기 들어 인간 소외로의 문명 전환이 심화되는데 대한 비관성에 주목하고 질타하는 성찰의 예술가로 이름을 알렸다. 1978년 1집 앨범 '시인의 마을'을 시작으로 가수로도 활동했다.
박은옥은 정태춘의 노래들을 탁월하게 소화해 내고, 함께 활동해온 시적인 보컬리스트다. 1979년 노래 '회상'이 데뷔곡이다. 음악과 예술에 대한 열정, 그리고 시대에 저항하는 정신이 통해 한 마음이 된 두 사람은 1980년 결혼, 정태춘 박은옥이라는 예술인 부부이자 '동지'로 함께 해왔다.
그렇게 해 온 세월이 어느새 40년.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정태춘 박은옥 40 프로젝트'가 가동된다. '정태춘 박은옥 40 프로젝트'는 이들이 활동해 온 40년의 음악사적, 사회적 의미를 조망하기 위해 2019년 연간 진행되는 기념 사업이다. 3월부터 11월까지 콘서트, 앨범, 출판, 전시, 학술, 아카이브, 트리뷰트 프로그램 등이 전국에 걸쳐 진행된다.

'저항'으로 대변된 시대 정신은 얼굴을 바꿨지만 사회 곳곳의 부조리와 모순은 여전한 세상. 인간성이 자본에 잠식되고 '삼포세대'란 표현이 일상화 된, 염세와 패배주의로 물든 세상, 정태춘 박은옥은 다음 세대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할까.
7일 오전 서울 충무아트센터에서 진행된 '정태춘 박은옥 40 프로젝트' 발표회 겸 기자간담회에서 정태춘은 "지난 10여년 활동이 많지 않았고 지난 40년을 결산하면서도 얼마나 성과가 있었는지, 얼마나 나눌만했는지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하지는 못했다. 주변 지인들이 '그냥 지나가면 안된다'고 해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고민하고 표현했는지를, 그런 것들이 당대 다른 예술가들에게 어떤 영감을 줄 수 있을지 고민해보자는 생각에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됐다"고 말했다.
정태춘. 사진|강영국 기자
40주년 소회는 예의 담담했다. 정태춘은 "40주년을 맞으며 개인적으로 특별한 소회는 없다. 이미 노래 창작을 접은지 오래고, 시장에서 빠져나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특별한 소회는 없다"고 말했다.
정태춘은 "그래도 어쨌든 일을 벌리며 만난 사람들, 팬들의 반응 이런 것들을 보면서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다 싶다. 나의 이야기를 너무 오랫동안 진지하게 들어준 분들이 많다는 생각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은옥은 "원래 숫자에 예민한 사람은 아니다. 정태춘과 생각이 비슷하다. 그저 오랫동안 노래 했구나, 오래 노래할 수 있게 해준 많은 분들이 계시구나, 그리고 기자회견 하면서 '정태춘이 인복이 많은 사람이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때로는 시대를 위로하고, 때로는 시대를 대변한 음악을 해 왔지만 지난 10여년 음악 활동은 거의 없었던 정태춘. 그는 "정확한 연도는 기억이 안 나지만 '아 대한민국' 앨범이 있었고, '종로에서', '건너간다',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를 내놓으며 시장에서 철저히 반응이 없는 상황을 맞이했다. 정서적인 부분이나 나름의 고민을 앨범에 담았다고 생각했는데 내 고민을 읽어주는 피드백이 없었다. 그리도 대중예수가라면 대중의 취향을 따라가야 하는데 나는 그 부분이 많이 부족한 사람이라, 그 생각에 점점 깊이 들어가면서도 세계가 변화하고 있고 한국 사회가 나아가고 있다는 낙관적인 상황 인식에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과거 우리 시스템 뒤의 어떤 문제를 갖고 싸우고 나아간 데 집중했다. 우리 삶을 정확히 표현하는, 들여다보는 방식으로 과거와 같은 자본주의 사회주의 이런 방식으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문명이 만든 산업 시스템, 그 속의 산업주의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그러면서 대중과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지게 됐다. 그리고 다시 대중의 관심, 취향, 그런 것들로 돌아갈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노래는 나에게 있어서 이야기를 담는 그릇이었는데, 계속 담기엔 적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협소한 대중일 수 있지만 붓글을 가지고는 내 이야기를 계속 할 수 있겠구나, 앨범 하나 내기 위해 5~6개월 작업하고 많은 돈을 들이고 하는 것보다, 붓글로는 내 이야기 할 수 있겠구나 싶어서 노래에 매달리지 않아도 되겠다 싶었다"고 길게 설명했다.
박은옥. 사진|강영국 기자
데뷔 초창기 서정성 깊고 목가적인 음악으로 사랑받은 정태춘은 90년대 '아 대한민국'을 기점으로 저항 음악가로 통하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해 정태춘은 "내 안의 분노를 담아낸,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른 변화였다"고 소개했다. 그는 "나에게는 중대한 변곡점이었다. 그 배경에는 우리 사회가 있었다. 나만이 아니라 그 시대를 함께 지나왔던 사람들이 똑같이 체험한, 군사독재시절, 광주항쟁, 시민들의 저항 이런 게 나에게도 똑같이 영향을 미쳤다. 여러 상황 속에서 나도 깨어났고 변화했고, 비로소 시민이 됐달까. 나를 깨워준 건 우리 시대라고 생각한다. 많은 분들과 함께 연대하면서 그 시대의 변화를 위해 동참했다"고 말했다.
정태춘은 "지금은 나도 '아 대한민국' 앨범을 잘 안 듣는다. 불편하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그 노래만이 나에게 정당했다. 다른 노래들은 부르지 않았고 그 노래만 불렀는데 지금은 전혀 안 듣는다"고 말했다.
정태춘은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어떤 가수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저항 가수가 되겠다 혹은 어떤 가수가 되겠다는 계획에서 나온 게 아니라, 그냥 나의 분노에서 나온 것이었다. 창작자의 마음에 분노가 없고서야 어떻게 제3자적으로 그런 노래를 만들수 있겠는가 싶었다"며 "그 당시에는 노래의 미학이랄지 고정관념이랄지 그런 것 아무 것도 고민할 필요 없이, 그냥 내 안에서 솔직하게 나오는 내 안의 분노를 담아낸, 아주 자연스러운 흐름으로서의 앨범이었다. 그 이후 음악들이 조금씩 변화되는 과정에서 그냥 나의 생각에 충실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태춘은 이어 "이번 프로젝트에서 우리끼리 얘기하는 내용이 있는데, 주위에서 나에게 네번째 깃발을 들으라고 한다. 첫번째가 전교조 합법화를 위한 싸움 했던 것, 두번째가 가요 검열 철폐였고 세번째가 평택에서 많은 예술가들과 미군부지 확정 반대 위해 싸웠던 것이었다. 그리고 네번째 깃발 들 때가 됐지 않았냐 하는데, 내 문제의식에 공감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시장이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고, 이윤이 발생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는. 그 시장성을 갖지 않은 모든 것은 사장되는 최첨단 산업문명 사회에서 그 시장 밖 무엇을 만들자 라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시장 매커니즘 통하지 않고도 통할 수 있는 예술, 문화. 시장 밖 예술 이라는 화두가 우리 내부에서는 이야기되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이번 프로젝트 안에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정태춘. 사진|강영국 기자
박은옥은 "정태춘은 원래 서정적인 노래를 했던 사람이다. 가사가 검열에 걸려 묵음처리로 최초로 저항을 표현하며 지나왔다. 초기 노래들은 개인의 일기였고, 80년대 후반부터는 사회의 일기였다고 한다. 그게 가장 적합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초기 노래를 사랑하셨던 많은 분들이 변했다고 충격받고 배신감도 느낀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아 대한민국' 음반을 낼 때는 또 다른 세대를 만나며 호흡했다. 초기 노래도, 이후 노래도 정태춘의 노래는 관통하는 하나가 있다. 비록 개인적인 일기에서 사회적 일기로 바뀌었다 하지만 같이 음악 하는 동료로서 볼 때 여전히 서정성, 서사성은 갖고 있었기 때문에 40년 지난 지금 굳이 돌이켜보면, 그게 다 정태춘 노래였구나 싶다"고 말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정태춘을 지켜보며 느낀 점도 털어놨다. 박은옥은 "옆에서 지켜볼 때, 사전검열 싸움을 6년간 너무 오래 외롭게 진행했는데 그 때가 제일 안쓰러워보였다. 나라도 열심히 도와야겠다 싶어서 공연장에서 당시 판매 금지됐었던 불법음반을 소개하며 사전검열이 왜 없어져야 하는지, 창작자뿐 아니라 듣는 사람의 권리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없어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열심히 했고, 다행히 6년 만에 그 법이 없어져서 후배들이 다양한 자기 얘기를 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게 정태춘이 한 일 중 가장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두 사람에게 음악은 어떤 의미일까. 먼저 마이크를 잡은 박은옥은 "다음 생에 또 태어나면 또다시 음악 하는 사람이고 싶고, 하나의 소망을 덧붙이자면 정태춘처럼 재능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나는 목소리로 표현할 뿐이지 정태춘처럼 글쓰고 표현하지 못해서 참 부러웠다. 재능은 타고나는 것이지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정태춘을 보며 절망도 느꼈다. 하지만 음악이 없는 삶은 생각해보지 않았고, 다음 생에서도 나는 노래하는 사람이고 싶은 생각을 해본다"고 말했다.
정태춘은 "초등학교 때 음악을 접하고 창작도 하고, 얼결에 가수가 되고, 그러면서 사실은 한단계씩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마구 진행된 노래 인생을 살았다. 나에게 주어졌던 어떤 환경 속에는 열정을 다해서 뛰어들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노래는 내 인생에서 거의 전부 다였다. 노래로 나의 존재와, 내 실존적인 고민과 세상에 대한 메시지까지 담아낼 수 있었으니까. 노래는 내 인생의 전부였다"고 강조했다.
'정태춘 박은옥 40 프로젝트' 기자간담회. 사진|강영국 기자
이번 프로젝트의 공동 추진위원장인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은 "정태춘 박은옥 두 음악가의 현재성에 더 주목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말했다. 김규항은 "두 분이 활동을 스스로 접었던 이유는 대중과의 예술적 교감이 쉽지 않았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인데, 단순히 인기가 떨어졌다거나 앨범이 떨어졌다는 게 아니라 예술가로서 대중과 교감이 되지 않는다는 말씀을 들었다"고 말했다.
김규항은 "이제는 대중이 두 분을 다시 호명할 때가 아닌가, 외람되지만 그렇게 생각한다. 그 호명이란 386들의 추억의 소환이 아니라, 지금 현재의 10대 20대 30대 젊은 세대들의 현재성과 두 분의 음악이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이어 "'92년 장마, 종로에서'라는 노래를 정태춘 박은옥 모르는 젊은이들이 듣고 충격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두 분의 음악이 현재와 맞닿아있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면서 "두 분 음악의 현재성에 주목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프로젝트 사업단 총 미술감독을 맡은 김준기 현 예술과학연구소장은 "정태춘의 예술가로서 40년의 업적은 가히 르네상스맨이라 압축해 요약할 수 있다. 최근에는 붓글로 한시를 짓는 등의 활동도 하고 있고, 서정성을 담아낸 창작자, 가수로서 80년대 말 시대정신 담아낸 가수로서 표현의 자유를 위해 주민들과 함께 액티비티한 활동 하고 계시다"고 말했다.
이어 "정태춘 박은옥 선생님의 예술활동 회귀하면서 지금의 대중음악 현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실천 할 것인가가 고민이다. 정태춘 박은옥의 현재성을 어떻게 풀어나갈 지 키워드가 있는데, '시장 밖 예술'이라는 키워드를 해주실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정태춘 박은옥은 오는 4월부터 15개 도시에서 전국투어 '날자, 오리배'를 개최한다. 이번 투어는 4월 13일 제주아트센터를 시작으로 11월까지 이어진다. 서울에서는 4월 30일부터 5월 7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M씨어터)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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