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3·1운동 100주년] 직접 되돌아보는 3·1운동 그날의 흔적들
입력 2019-03-01 19:30  | 수정 2019-03-01 20:42
【 앵커멘트 】
꼬박 백년 전인 1919년 3월 1일, 전국적인 규모의 만세운동은 산발적으로 우연히 일어난게 아니었습니다.
철저한 준비과정을 거쳐 전국민들에게 확산이 됐는데, 그 흔적을 찾아 역사의 현장에 박자은 기자가 다녀왔습니다.


【 기자 】
▶ 스탠딩 : 박자은 / 기자
- "1919년 3월 1일, 이후 딱 100년이 지났습니다. 만세 소리가 가득찼던 우리 주변 곳곳엔 아직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는데요, 직접 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3·1운동을 뭍밑에서 준비했던 서울의 보성학교입니다.

▶ 스탠딩 : 박자은 / 기자
- "2월 27일, 3만여 장의 독립선언문이 이곳에서 비밀리에 인쇄됐습니다. 원래는 2층 건물이었지만 불에 타 없어져 지금은 터만 남았습니다."

▶ 스탠딩 : 박자은 / 기자
- "드디어 3월 1일, 33명의 민족대표가 이곳에서 축배를 들고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는데요. 내부자의 밀고로 바로 일본군에게 발각됐지만 3·1운동의 시발점이 된 셈이죠. 주점이었던 자리에 현재 비석만 세워져 있습니다. "

그날 오후 파고다공원을 가득 채운 시민들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 인터뷰 : 이덕남 / 독립운동가 신채호 선생 며느리
- "사람이 태어나서 호적이 없다는 건 기본권 자체가 없는거야. 기본권이 없으면 사람이 가진 모든 권리 주장을 아무것도 못하지."

릴레이처럼 퍼져 나간 함성 소리는 4월 1일 천안에 닿았고 충청권 최대 독립 만세운동을 이끌어냈습니다.

그 중심엔 유관순 열사가 있었습니다.

▶ 스탠딩 : 박자은 / 기자
- "고작 열여덟, 고향 천안으로 내려온 유관순 열사는 이곳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해 삼천여 명이 모여들었습니다."

이렇게 만세운동이 조직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건 그 해 조소앙 선생 등 국외 독립지사가 중국에서 작성한 대한독립선언서 덕분이었습니다.


▶ 인터뷰 : 조인래 / 독립운동가 조소앙 선생 손자
- "2월 1일 날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는 육탄 일전으로 독립을 완성하라 투쟁을 해서…. 어느날 갑자기 만세 시위하자 그게 아니죠. 굉장히 조심스럽게 일련의 일이 일어난 거예요 ."

▶ 스탠딩 : 박자은 / 기자
- "이렇게 한복을 입고 만세 운동에 나섰다는 것 자체가 저와 같은 후손들에겐 믿기 힘든 일인데요. 애국지사의 숭고한 정신 덕에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삼일절뿐 아니라 늘, 되새겨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3·1절을 시작으로 국내외에서 만세를 외친 사람들은 당시 전국민의 12%에 달하는 2백만여 명, 전국적인 항일운동의 위대한 시작이었습니다.

MBN뉴스 박자은입니다.
[ jadooly93@mbn.co.kr ]
영상취재 : 이우진·김 원 기자, 김근목VJ
영상편집 : 이재형
자료출처 : 서대문형무소·국가기록원
MBN APP 다운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