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공연 리뷰] 美 `힙합 왕` 한국 2030을 위로하다
입력 2018-07-31 17:23 
켄드릭 러마 첫 내한공연
켄드릭 러마는 미국 힙합계의 선비다. 한국 젊은 층이 바른 생활 사나이들을 놀릴 때 쓰는 선비란 표현은 이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 딱 어울린다. 그는 요즘 래퍼들처럼 모든 가사를 돈 자랑으로 채우지도 않고, 마약·폭행 등 사생활 시비에 휘말리지도 않는다.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그를 백악관으로 초대해 빈민 지역 문제 해결책 등을 논의했으며, 퓰리처상 위원회는 그를 지난해 음악 부문 수상자로 뽑았다. 클래식, 재즈 뮤지션이 아닌 가수가 퓰리처상을 받은 건 처음이다. 이력만 놓고보면 재미없는 남자의 표상이지만 지난 30일 '현대카드 슈퍼콘서트 24 켄드릭 러마'를 보기 위해 서울 잠실 보조경기장에 모인 2만여 남녀는 그의 노래에 몸을 흔들며 열대야를 격렬하게 불태웠다.
무엇이 미국에서 넘어온 이 선비에게 열광하게 하는가. 그것은 러마가 부르는 노래의 도입부에 있었다. 러마는 청자를 흡입하는 곡의 첫 소절을 만드는 데 탁월한 소질이 있다. 이날 관객들은 체감 온도 38도를 넘나드는 날씨에 짜증을 내다가도 '험블(HUMBLE.)' '로열티(LOYALTY.)' 등 노래가 시작될 때마다 피리부는 사내의 연주에 홀린 마을 어린이들처럼 몸을 흔들었다.
랩 스타일은 단조로운 것 같으면서도 캐릭터와 상황에 따라 변화했다. 그가 이날 부른 '스위밍 풀스(Swimming Pools)' '비치, 돈 킬 마이 바이브(Bitch, Don't kill my vibe)'에 대해 한동윤 음악 평론가는 "가사에 맞게 노래 안에서 캐릭터를 설정해서 성우처럼 목소리를 변형해서 랩을 한다"며 "한 노래 안에서도 여러 명이 랩을 하는 것 같은 효과를 낸다"고 평가했다.
그의 노래에는 속칭 MSG가 없다. 비트를 천천히 쌓아올리다 폭발시키는 요즘 일렉트로닉댄스뮤직(EDM) 적인 요소나 자극적인 후렴구도 존재하지 않는다. 러마는 오히려 시적인 가사에 포인트를 주는 쪽이다. 그래서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한국인이 듣기엔 다소 밋밋하다는 평가다. 러마의 이번 공연이 최근 현대카드 슈퍼콘서트 중 이례적으로 늦게 매진된 데는 이러한 이유가 있다.

하지만 이날 스크린에는 러마의 속사포 랩을 따라 부르는 상당수 2030 모습이 찍혔다. 미국 내 인종 차별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는 가사를 한국 관객이 노래하는 모습은 상당히 기이하게 비쳤는데, 태평양 너머 사는 한국인이 그 가사 안에 담긴 설움을 이해하기란 요원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김반야 대중음악 평론가는 "켄드릭 러마는 사람 자체가 가진 에너지가 폭발적이라 이를 기대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며 "또한 자신이 켄드릭 러마의 의식 있는 음악을 듣는다는 걸 인증하고 싶은 사람도 다수였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두 차례 음향 사고가 발생해 관객석에서 아우성이 나오는 도중에도 러마는 꿋꿋이 노래를 이어가며 '힙합의 왕'다운 면모를 과시했다.
그는 첫 내한 공연에서 선보이는 마지막 곡으로 '올 더 스타스(All The Stars)'를 골랐다. 마블 영화 최초로 흑인 주인공이 스토리를 끌고가는 '블랙팬서'에 삽입된 의미 깊은 노래다. 러마는 해당 앨범 프로듀싱을 총괄하며 미국 사회에서 아직도 차별받는 흑인들을 위로했다.
'오늘 밤은 나의 꿈이 내게 뭔가 알려주는 밤이 될 거 같아/모든 별들이 내게로 다가오고 있다고'('올 더 스타스' 中) 내일이 걱정돼 황급히 콘서트장을 탈출하던 많은 관객이 이 노래에 발걸음을 멈췄다. 아침이면 전쟁터 같은 회사와 취업 스터디로 몰려갈 한국의 젊은 관객들에게도 이날 밤 모든 별들이 다가와 말을 걸어줬을까.
[박창영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MBN APP 다운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