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잊혀진 극장? 문턱 낮은 극장 되고 싶어요."
입력 2018-03-15 12:57  | 수정 2018-03-15 13:43

지하철 시청역에서 내려 가로수가 늘어진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걷다 보면 정동극장을 만나게 된다. 1995년 개관한 정동극장은 한국 최초의 근대식 극장 '원각사'의 복원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떠나 당대 가장 '핫'한 데이트 코스였다. 부모님 세대는 손을 꼭 잡고 이 긴 돌담길을 걷다 정동극장에서 공연을 보곤 했다. 예술가들에게는 동경의 장소였다. 배우 손숙의 '어머니', 송승환 연출의 '난타' 등 당대 최고 흥행작이 이곳을 거쳐 갔다.
"오랜만에 와보시죠?" 정동극장 앞으로 마중나온 손상원 극장장(47)이 건넨 인사에 머쓱해졌다. "올 일이 없었다"는 답에 손 극장장이 고개를 선선히 끄덕인다. "잊혀진 극장이 되버렸죠."
2010년은 정동극장의 최전성기였다. 관광객이 봇물 터지듯 밀려들었고 정동극장은 외국인 대상으로 우리 전통 음악·무용을 접목한 '넌버벌 퍼포먼스'를 올리며 늘 문정성시를 이루었다. 손 극장장은 "그 때는 1년에 12만 명의 외국인이 정동극장에서 공연을 봤다"고 했다. 하지만 국내 관객에겐 되레 조금씩 잊혀져가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관광 전용 극장이란 이미지가 되버린 거죠. 또 늘 같은 상설작품만 오르다 보니 관객은 물론 예술가도 찾지 않게 됐죠."
"'아, 정동극장! 들어봤어요. 근데 어디 있죠?' 정동극장에서 일한다고 하면 사람들 반응이 이래요." 뮤지컬 '그날들', '해를 품은달' 등 을 선보인 공연제작사 이다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와 한국공연프로듀서협회 회장을 거쳐 재작년 6월 정동극장에 부임한 손 극장장은 자존심이 상했다. 칼을 갈았다. 작년부터 창작탈춤 '동동', 소리꾼을 주인공으로 한 뮤지컬 '판'등 새로운 공연을 올리며 변화를 예고했다. 본격적인 시작은 이제부터다. 2018년 정동극장은 '적벽'을 시작으로 단일 콘텐츠 상설공연장에서 다양한 기획 작품을 선보이는 레퍼토리 공연장으로 변신한다.
-기획공연을 선보이는 게 2010년 이후 8년만이다. 변화를 결심하게 된 계기는?
▶상설공연의 주 관객층은 외국인 관광객이었다. 그러다보니 관광시장의 변화에 따라 극장 전체의 목표와 성과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관광시장이 점점 힘들어지면서 정동극장 역시 직격탄을 맞았다.
-사드로 인한 한한령으로 줄어든 중국인 관광객 영향도 컸을 것 같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사드 이전부터다. 중국의 경우에는 어느 순간부터 '저가 관광' 상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소위 비행기와 호텔 포함 왕복 20~30만원 패키지 상품이다. 공연을 정가를 주고 관람할 수 있는 상품구조가 아니다. 가격격쟁이 치열해졌다. 티켓이 5000원 미만에 판매되는 경우도 생겼다. 저가 경쟁에 공공공극장이 뛰어들 순 없고, 가격대를 유지하다보니 중국 단체관광객은 사드 사태 전부터 줄기 시작했다. 오히려 올 초에 일본 관광객이 많이 줄었다. 아베 총리의 북한과 전쟁 관련 한 마디에 상품이 다 취소되더라. 개별관광객은 꾸준히 늘고 있지만 워낙 어려워 우리끼리 '모래알 줍기'라고 표현한다.(웃음)
-기획공연은 국내 관객을, 상설공연은 외국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투트랙으로 가는 건가? 비중이 어떻게 되나.
▶맞다. 4시 상설공연은 외국인도 즐길 수 있는 넌버벌 공연으로, 8시 기획공연은 젊은 창작진들의 작품을 발굴하려 한다. 기간과 회차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략 비중은 5:5다. 내수관객이 50%는 되어야 공연시장이 안정적으로 돌아간다.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 역시관광객과 내수 관객이 함께 가는 구조다. 예를 들어, 뮤지컬 '라이언킹'은 대부분 외국 관광객이지만 뮤지컬 '킹키부츠'는 초연 때 가보니 젊은 뉴요커들이 훨씬 많더라.
-정동극장의 정체성은 여전히 '전통'인가.
▶그렇다. 계속해서 우리 전통을 소재로 한 공연을 올린다. 하지만 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옛날에 판소리꾼들이 왜 폭포수를 맞으며 소리를 연습했을까. 소리꾼들은 제대로 무대를 갖추지 않은 저잣거리에서 노래하지 않았나. 사람들의 말소리와 발소리 사이에서 공연해야 하니 폭포수의 거친 물소리도 뚫을 수 있는 소리를 단련해야 했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오늘날 공연장으로 들어온 소리는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
▶전통의 보존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보다 대중화에 방점을 찍고 싶다. 전통도 '재밌다'는 인상을 주고 싶다.
-전통공연의 대중화는 쉽지 않은 목표다. 우리나라사람들이 공연을 많이 봐야 한 달에 한 번인데, 그 기회를 전통공연에 쓰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어렵다. 내 임기 내에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욕심내기보다는 관객 한 명 한 명이 소중하다. 올해 첫 작품인 '적벽'은 판소리 다섯 마당 중 하나인 '적벽가'를 현대무용과 버무린 공연이다. 적벽가는 판소리 중에도 한자어가 많아 가장 어렵다고들 말하는데 현대무용과 만나니 아주 역동적인 작품이 나왔다. 작년 시범공연 때 "적벽을 보고나서 적벽가를 들어보고 싶어졌다"는 관람 평이 있었다. 바로 내가 목표하는 바다.
정동극장이 사람들에게 어떤 극장으로 기억되길 바라는가를 물었다. '툇마루'란 답이 돌아왔다. "정동극장 위치가 너무 좋아요. 광화문 한 복판에 있잖아요. 점심시간 앞에 이 앞 직장이 유동인구가 어마어마해요. 그런데 이 앞만 지나가고 공연장 문턱을 넘어오질 않아요."(웃음) 그래서 작년 '정오의 예술마당'을 기획했다. 무료로 12시 20분부터 50분까지 전통공연을 극장 앞마당에서 선보였다. "밥 먹고 쉬는 겸 공연 보고 회사에 돌아가시라고. 어느 날은 300명이 이 마당에 앉아 공연을 보는데 너무 기뻤어요. 그렇게 지나가다 들릴 수 있는, 문턱이 낮은 공연장을 꿈꿉니다."
[김연주 기자 / 사진= 이충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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