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똑똑전화? 거대자료?…이해못할 정부식 순우리말
입력 2017-10-09 16:29  | 수정 2017-10-09 16:45

'어른왕자인 A씨는 똑똑전화를 이용해 만화 주인공의 정밀모형을 늘찬배달로 주문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정부 공식문서에 권장하는 순우리말로 만들어본 문장인데 무슨뜻인지 감을 잡기도 어려운 수준이다.
여기서 어른왕자는 '키덜트'를 의미하는 우리말이고, 똑똑전화는 '스마트폰', 정밀모형은 '피겨(figure)', 늘찬배달은 '퀵서비스'를 각각 의미한다. 알아듣기 쉽게 요즘말로 바꾸쓰면 '키덜트인 A씨는 스마트폰을 이용해 만화 주인공 피겨를 퀵서비스로 주문했다' 정도가 될 것 같다.
문체부와 그 소속기관인 국립국어원에서 권장하는 순수 우리말 표현이 너무 이해하기 어렵고 생소해 글로벌 시대에 걸맞게 때론 영어식 표현을 혼용해 쓰는게 더 합리적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한글날'의 뜻을 되살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의사소통 자체를 가로막는 수준이 되서는 곤란하다는 이야기다.
9일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김한정 의원은 "이미 사전에 실려있는 '웹툰'이나 '스마트폰'을 굳이 '누리터쪽그림'이나 '똑똑전화'로 바꾸는 것은 불필요해 보인다"며 "늘찬배달(퀵서비스), 어른왕자(키덜트) 등의 단어는 지난 3년간 언론에서 단 한 차례도 사용된 적이 없다"고 밝혔다.

실제 키덜트를 뜻하는 '어른왕자'는 설명을 듣지 않고선 곧바로 알아듣기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키덜트는 어린이를 뜻하는 '키드'(Kid)와 어른을 의미하는 '어덜트'(Adult)의 합성어로 어린애 같은 취미를 가진 성인을 가리킨다. 그러나 다 큰 성인이라는 의미의 '어른'과 왕의 아들이라는 의미의 '왕자'를 합성해 '어른왕자'로 부르면 이것이 어떻게 해서 키덜트와 같은 뜻이 되는지 추론하기 쉽지 않다. 마찬가지로 21세기 금맥으로 최근 떠오르고 있는 빅데이터(big data)는 '거대자료'로 바꿔쓰도록 했는데, 이것도 얼른 그 의미를 알아차리기가 어렵다. 또 민간과 정부 등 다양한 주체의 참여를 통한 행정관리를 의미하는 전문용어인 거버넌스(governance)는 '민관협력관리'로 쓰게 했다.
문체부는 또 더 나은 선례를 '측정기준'으로 삼아 따른다는 의미의 벤치마킹(benchmarking)은 '본따르다'로 바꿀 것을 권했다. 낙후된 구도심 지역에 자본이 몰리고 임대료가 오르면서 원주민들이 쫓겨나는 현상을 가리키는 젠트리피케이션은 '둥지내몰림'으로 쓰도록 했다. 문체부는 위와 같은 용어가 통용되도록 정부기관이 공문서를 작성하거나 보도자료를 작성할 때 각 부처에 있는 국어책임관을 통해 영어 표현 등을 고쳐쓰도록 했다.
그러나 문체부가 제시하는 단어들이 일반에 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는 게 문제다. 한 중앙부처 대변인실 관계자는 "거버넌스와 빅데이터 등 그대로 쓰지 않으면 의미가 잘 와닿지 않는 전문용어들은 차라리 그냥 쓰는게 나아 보인다"며 "홈페이지를 순화한 '누리집'도 상당히 오랜기간 써온 순우리말인데도 아직 일반에선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일부 단어는 우리말을 써야 한다는 데 집중하다 보니 의미를 분명하고 쉽게 전달해야 한다는 목적을 상실하기도 했다. 거대자료(빅데이터), 누리터쪽그림(웹툰) ,둥지내몰림(젠트리피케이션) 등이 대표적이다. 외래어 번역기처럼 직역하다보니 북한말과 비슷하다는 지적마저 나온다. 실제 북한에선 투수를 '넣는 사람', 계란말이는 '색쌈', 도넛은 '가락지빵', 데이터베이스는 '자료기지'라고 표현한다.
김한정 의원은 "국립국어원이 2004년이후 발표한 순화어는 457개에 달하지만 널리 통용되는 단어는 거의 없다"며 "'블루투스'같은 단어는 '쌈지무선망'으로 순화했다가 문체부 심의에서 '블루투스'로 되돌린 사례도 있다"고 지적했다.
[최희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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