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
노조에 속절없이 밀리는 금융권
입력 2017-08-29 17:47  | 수정 2017-08-29 20:32
문재인정부 출범 후 금융권이 노조에 속수무책으로 밀리고 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노동시간 단축 등 친(親)노동정책을 펴는 정부 기세에 눌려 그간 각 금융사와 노조 측이 첨예하게 대립해 온 산별교섭 재개, 성과연봉제 등 노사관계 이슈 주도권이 노조로 급격히 옮아 가는 모양새다. 29일 금융권에 따르면 시중은행과 금융 공기업 등 사측 협의체인 금융산업사용자협의회를 이끄는 하영구 전국은행연합회장과 허권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 위원장이 이날 긴급 회동을 하고 지난해 결렬된 산별교섭 재개 협의에 나섰다.
지난 28일 은행연합회 정기이사회에서 사용자협의회 주요 일원인 시중은행장들이 지난해 와해된 사용자협의회를 다시 복원하고 노조와 산별교섭 논의를 추진하기로 의견을 모은 데 따른 것이다.
이날 회동은 하 회장이 교섭 재개 조건으로 임금체계 개편 논의와 산별교섭 체계 변경을 위한 태스크포스(TF) 구성을 내걸고 이에 노조가 난색을 표하면서 소득 없이 끝났다. 다만 사용자 측이 노조와의 협의 자체를 거부했던 기존 입장을 바꿔 접촉을 시작한 만큼, 향후 대화가 다시 이뤄질 가능성은 남아 있는 상황이다. 당초 노조는 이달 31일을 교섭 날짜로 제안했지만, 이날 회동 분위기를 감안하면 실제 교섭일은 다소 늦어질 전망이다.
시중은행 등 금융권 사용자들은 2010년부터 사용자협의회를 꾸려 매년 금융노조와 산별교섭을 해왔다. 그러나 지난해 성과연봉제 도입을 놓고 찬성(사용자협의회) 측과 반대(금융노조) 측 대립이 심해지자 사용자협의회 일원 중 대부분이 협의회에서 탈퇴했고, 결국 교섭도 중단된 바 있다. 앞서 금융노조는 지난 17일과 24일을 교섭일로 정하고 사용자 측 참여를 요구했지만 사용자 중 단 한 명도 응하지 않았다. 이에 금융노조가 "명백한 부당노동행위"라며 반발하자 불과 일주일도 안 돼 산별 교섭 검토로 입장을 바꾼 것이다. 노조와 갈등을 빚던 시중은행 경영진이 노조 요구를 대폭 받아들이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노조가 은행 법인과 함영주 은행장을 부당노동행위 혐의로 고소·고발하며 첨예화됐던 KEB하나은행 노사 갈등은 지난달 27일 사측이 노조 활동 보장과 불법·부당노동행위 방지, 대규모 승진 인사를 약속하는 합의문에 서명하면서 일단락됐다. KB국민은행은 지난 21일 노조위원장 선거 개입 의혹을 받는 임원 두 명의 사표를 수리하고 초과근무시간 한도 제한 없는 금전적 보상과 임금피크제 적용을 받는 하위 등급 직원의 임금 삭감 관행을 폐지하기로 노조와 합의했다. 윤종규 KB금융지주 회장 겸 KB국민은행장은 노조 사무실을 찾아 공식 사과했다. 게다가 국민은행 노조는 참여연대 출신 하승수 변호사를 사외이사로 선임하는 방안을 추진하는 등 경영개입 요구에도 나설 계획이다.
지점 축소를 놓고 노조와 대립각을 세웠던 씨티은행은 지난 7월 노사 합의를 통해 폐쇄 점포 숫자를 당초 계획했던 101곳에서 90곳으로 축소했다. 또 임금 인상, 성과급 지급 등 노조가 요구한 내용 중 대부분을 도입하기로 했다. 이처럼 사측이 노사갈등을 서둘러 봉합하려는 시도에 나서는 것은 노조 편에 선 새 정부와의 코드 맞추기로 풀이된다. 지난 4월 금융노조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노사 합의 없는 성과연봉제 폐기 △과도한 성과문화 확산 중단 △낙하산 인사 근절 및 관련 제도 보완 등의 내용을 담은 정책협약을 체결했다. 그간 금융노조가 정부와 사측에 강력하게 요구했던 내용이다. 협약에 따라 금융노조는 당시 문재인 민주당 대선 후보에 대한 공식 지지를 선언했다. 이에 화답하듯 새 정부는 금융노조 출신인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을 임명했다. 김 장관은 금융권 노동조합 연합체인 전국금융노동조합연맹에서 첫 여성 상임 부위원장을 지내는 등 노동운동가 경력으로 정치권에 발을 디딘 3선 의원이다. 일각에서는 사측이 노조 불만을 누그러뜨리는 데만 집중하다 보면 금융사 혁신을 저해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내놓는다. 국민은행은 24시간 영업하는 인터넷은행에 맞서기 위해 일부 점포에 한해 저녁 7시까지 문을 여는 야간영업 서비스 도입을 추진했지만, 노조 반발로 서비스 점포(130개에서 40개)와 시작 시기(4월에서 10월)를 대거 삭감하거나 늦췄다.
[김태성 기자 / 박윤예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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