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최악폭설 美고속도로 체험르포 "연료 바닥...주유소 향해 그냥 걸었다"
입력 2016-01-24 17:20 

미국 동부에 사상 최악의 강풍을 동반한 폭설과 한파가 불어닥쳤다. 교통이 마비되고 고립이 속출했다. 피해자는 8500만명으로 집계됐다. 본의 아니게 사상 최악의 폭설이 덮친 미국 고속도로를 경험하게 돼 그 위력을 기록했다.
노스캐롤라이나주 중남부의 내륙항 페이옛빌에서 개인적인 용무를 마치고 워싱턴DC로 복귀하는 길이었다. 22일(현지시간) 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23일 아침에는 눈으로 변해 있었다.
전날부터 이미 항공기는 모두 결항된 상태였고 열차마저 운행을 중단했다. 활주로와 선로의 눈을 모두 치우고 운행을 재개할 때까지 얼마나 걸릴 지 알 수 없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스마트폰 문자메시지를 통해 지하철과 버스 등 대중교통 운행이 중단된다는 소식도 들어왔다.
선택은 하나 뿐이었다. 고속도로. 미국 최남단 플로리다주에서 최북단 메인주까지 미국 동부해안을 가로지르는 95번 고속도로에 올라섰다. 워싱턴까지는 500km 거리다. 잔디와 나무 위에는 언뜻 보기에도 5cm 이상 눈이 쌓였으나 폭설이 예보된 탓에 일찌감치 뿌려놓은 염화칼슘으로 인해 고속도로는 정상 주행에 무리가 없을 만큼 말끔했다.

그러나 1시간30분간 140km를 달려 도달한 록키마운트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도로는 깨끗했지만 하늘을 뒤덮은 듯 내리는 폭설이 시작되면서 가시거리는 채 5m가 되지 않았다. 차량들은 시속 20km 이하로 속도를 줄였고 일부는 갓길에 멈춰섰다. 속도를 줄인 차량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추돌하는 사고가 속출했다.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탓에 추돌은 또다른 추돌을 불렀고 사고 차량이 뒤엉켜 길게 늘어섰다. 뒤늦게 달려 온 경찰차도 현장에 진입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90km를 더 가서 버지니아주에 접어들자 고속도로에 눈이 그대로 쌓이기 시작했다. 제설차량들이 부지런히 오갔지만 제설속도보다 적설속도가 훨씬 빨랐다. 2~3km마다 눈길에 미끄러져 도로 밖으로 밀려나간 차량들이 눈에 띄었다. 스노우타이어를 장착한 견인차량들이 속속 도착했지만 이미 차량 타이어가 간신히 보일 정도로 눈이 덮여 견인이 불가능했다. 차량에 탑승했던 사람들을 태워서 가까운 대피소로 옮기는 것이 최선이었다. 차량 히터에 의존해 수시간째 구조 차량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더러 눈에 띄었다.
버지니아주 중부에 자리한 주도 리치먼드부터는 강설량이 더욱 늘어났다. 강풍도 더해졌다. 미국 고속도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형 컨테이너 트럭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운전석이 있는 부분은 앞으로 달렸지만 뒤에 매달려 끌려가는 컨테이너는 눈길에 미끄러져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옆을 지나던 다른 차량이 흔들리는 컨테이너에 튕겨져 나가 눈 속에 처박혔다. 컨테이너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갓길 너머로 미끄러져 나간 트럭도 부지기수였다. 미끄러진 컨테이너 트럭이 도로를 가로막으면 피해 갈 도리가 없었다. 경찰 차량도 눈에 가로막혀 사이렌만 울릴 뿐 달리지 못했다.
리치몬드를 10km 가량 벗어난 지점에서 화장실이 급해 갓길에 정차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어간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그나마 고속도로는 끊임없이 제설작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차가 갈 수 있었지만 다른 곳은 차가 도저히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제설차량들이 고속도로를 우선 제설하느라 일반 국도나 간선도로까지 제설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멈춰선 차를 보고 뒤따르던 경찰차 따라서 멈춰섰다. 한번 멈추고 나면 눈길이 미끄러워 다시 출발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차가 무사히 출발할 때까지 경찰차가 지키고 서 있었다.
워싱턴DC까지 85km를 남겨둔 프레드릭스버그. 오랜 시간을 운행했기에 연료가 바닥나고 있었다. 지나오면서 고속도로 인근에 주유소가 없지 않았지만 입구가 눈으로 막혀 진입이 불가능했다. 직원이 출근하지 못해 문을 열지 않은 주유소도 있었다. 하지만 더이상 갔다가는 고속도로 한가운데에 멈춰설 것 같았다. 하는 수없이 주유소가 바라보이는 가장 가까운 곳에 차를 세워놓고 주유소까지 걸어가 기름통에 휘발유를 담아와 연료를 채웠다.
도로에는 기름이 떨어져 멈춰선 차들이 적지 않았다. 주유하기 위해 고속도로를 벗어났다가 다시 고속도로에 올라서지 못한 차량도 많았다.
이윽고 95번 고속도로와 워싱턴DC 외곽을 순환하는 495번 고속도로가 만나는 지점에 도달했다. 하지만 95번 도로에서 495번 도로로 갈아타는 것은 그야말로 곡예에 가까웠다. 급회전과 급경사가 어우러진 분기점은 대형 제설차량이 들어갈 수 없어 눈이 그대로 쌓여있었고 자칫 미끄러진다면 고가도로 아래로 떨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또 고속도로 3개가 교차하는 이 지점은 4개의 진입로로 갈라지는 곳이었는데 차선은 눈에 덮이고 표지판은 눈보라에 가려 방향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평소 5시간 거리지만 이미 9시간을 지나고 있었다. ‘운행 자제(Avoid Travel)를 알리던 고속도로 전광판이 ‘운행 금지(Ban Travel)로 바뀌었다. 하지만 진출로가 눈으로 막혀 고속도로를 벗어날 수 없었다. 4개의 진출 램프를 지나치고 난 후 가까스로 갓 제설작업을 마친 듯 차가 지나갈 수 있는 진출로를 발견했다. 진출로를 빠져나오자 상황은 더 심각했다. 그나마 고속도로는 제설작업을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움직일 수가 있었지만 일반도로는 금새 바퀴가 빠져 겉돌았다. 전진과 후진을 수차례 반복하면서 빠져나오기를 수 차례, 겨우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주차장에 눈이 쌓여 주차가 불가능했다. 그냥 도로 가운데에 차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다른 차량들도 운행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문제될 건 없어 보였다. 주차된 차량들은 눈으로 뒤덮여 한동안 운행할 수 없을 것이다.
주차는 했지만 차량 문을 열기가 쉽지 않았다. 쌓인 눈이 문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좁은 틈새를 비집고 내려서자 발이 푹 빠졌다. 눈은 무릎 위에 찼다. 걷는 것도 쉽지 않았다. 사상 최악의 블리자드는 워싱턴 일대를 마비시키고도 남았다.
[워싱턴 = 이진명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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