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한국 문화계·문화산업, `문화강국의 꿈`에 더 가까이
입력 2015-08-12 11:54 

한국 음악시장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성장률을 보이고 있으며 사상 최초로 세계 8대 시장에 진입했다.”
전세계 음반산업의 대표단체인 국제음반산업협회(IFPI)는 지난 5월 발간한 ‘2015년 시장 보고서(Recording Industry in Numbers)에서 한국음악시장을 분석하면서 이렇게 평가했다. 지난해 국내 음악산업 규모는 4조5514억원으로 지난 2011년 3조8174억원에 비해 20%나 증가했다. 2009년 3126억달러이던 국내 음악콘텐츠 수출규모는 불과 5년만인 지난해 2억9704억 달러로 무려 10배 가까이 성장했다.
한국 영화도 르네상스를 맞고 있다. 2년 연속 관객 2억명을 돌파했고 국민 한사람이 한해 4.19편의 영화를 관람해 ‘세계에서 가장 많이 영화를 보는 시장으로 커졌다. 뛰어난 정보기술(IT)을 기반으로한 컴퓨터그래픽(CG) 등 영화기술 서비스의 해외 매출액은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중국 역대 박스오피스 톱10 중 세 편이 한국 업체의 시각효과(VFX)를 사용했을 정도다. 헐리우드는 우리 감독과 배우 모셔가기 경쟁을 벌인다.
대한민국의 문화예술은 ‘K컬쳐라는 신조어를 만들어가면서 세계무대에 우뚝 섰지만 사실 70년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는 문화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장르별로 문화예술을 꽃피우기 위해 부단하게 노력했다.
광복과 함께 찾아온 남북분단과 곧이은 한국전쟁의 비극은 문화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엔 ‘단장의 미아리고개, ‘이별의 부산정거장, ‘굳세어라 금순아 등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노래한 가요가 많았다. 한국영화는 전쟁의 상처가 아물어가면서 부흥기를 맞는다. 1956년 개봉한 ‘자유부인은 춤바람난 교수부인이라는 파격적 소재에 키스신·베드신까지 선보여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1959년에는 한국 영화 사상 처음으로 한해 제작편수가 100편을 넘어섰다. 1960년대 들어 4.19혁명과 함께 일시적으로 검열이 사라지자 우리 영화사의 수작들이 탄생했다.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집요하게 파고든 김기영의 ‘하녀와 한국 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한 유현목의 ‘오발탄이 대표작이다.

1959년 최초의 상업라디오가 생기고 여러 채널이 가세하면서 1960년대 라디오 방송시대가 열리고 가요도 융성기에 들어간다. 이미자의 ‘동백아가씨, 한명숙의 ‘노란샤스의 사나이, 최희준의 ‘하숙생 등이 라디오 전파를 타고 크게 유행했다. 1961년 TV 정규방송이 시작되면서 드라마와 쇼 프로그램이 국민들을 TV 앞으로 끌어들였다. 1960년 중반 영화도 신성일, 최무룡, 신영균, 장동휘, 허장강, 최은희, 김지미, 엄앵란, 문희, 윤정희 등 스타 배우들을 대거 배출하며 호황기를 구가했다. 문학분야에서는 박경리, 최인훈, 김승옥 등 한글을 모국어로 하는 1세대 작가들이 등장해 문학발전을 촉진시켰다.
유신체제로 접어들던 1970년대 정부의 통제가 한층 강화되지만 암울한 시대상을 반영한 작품이 쏟아지면서 역설적이게도 문화예술의 전성시대를 맞는다. 이장호의 ‘별들의 고향이 46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공전의 히트를 쳤고 음악에서는 김민기, 신중현, 송창식 등으로 대표되는 싱어송라이트들이 국내 대중음악 발전에 초석을 닦았다. 70년대 문학은 이른바 ‘신문연재 소설진으로 분류되는 최인호, 조서작, 김주영 등의 주도로 문학의 상업화가 진행된다.
신군부의 등장한 1980년대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을 유도하기 위한 이른바 ‘3S 정책의 영향으로 ‘애마부인, ‘어우동 등 성애영화가 양산됐다. 1980년대 성애영화 제작편수는 전체 영화의 55%에 달했다. 80년대 가요계는 ‘가왕 조용필이 주름잡았다. 클래식은 1988년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이 개관돼 대중과 만날 수 있는 공간을 갖게 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1990년대 문민정부 출범으로 민주화가 이뤄졌지만 영화는 시장개방이 크게 확대되면서 헐리우드와 힘겨운 경쟁을 해야했다. 위기를 겪으면서 우리 영화의 체질은 탄탄해졌다. 1998년 강제규의 ‘쉬리는 한국형 블록버스터 출현을 알리면서 600만명 관객을 동원했고 일본에 수출되기도 했다. 가요계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해 ‘90년 문화아이콘으로 부각됐다.
영화 뿐만 아니라 대중음악도 1990년대 중반 일대 위기에 직면한다. 인터넷 불법 다운로드가 성행하면서 음반시장이 붕괴됐다. 음악업계는 고육지책으로 한국보다 인터넷이 덜 발달해 음반시장이 그나마 건재했던 일본, 동남아로 몰려나갔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장르가 ‘K팝이었다. K드라마도 저가외주제작이 성행하면서 외주사들이 생존을 위해 드라마를 해외에 팔게 되면서 꽃폈다. 이 시기 예술분야도 해외에서 진가를 인정받는다. 홍혜경, 조수미, 신영옥 등 성악가들이 국제무대에서 한국인의 음악성을 알렸으며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은 시대를 앞서가는 영상 작품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다.
낙후됐던 공연분야에서도 성공작이 나온다. 뮤지컬 명성황후는 1995년 초연 이후 아시아 첫 브로드웨이, 웨스트엔드 진출과 창작뮤지컬 최초 100만 관객, 1000회 공연 돌파 등 신기록 행진을 지속하고 있다.
2000년대 들어 한국 문화는 날개를 달고 하늘높이 비상한다. 2000년 HOT의 베이징 공연 성공에 이어 2001년 드라마 ‘가을동화가 대만 시청률 1위를 차지하며 한류열풍을 몰고 왔다. 2002년에는 가수 보아가 일본 오리콘차트 1위에 올랐고 2003년에는 ‘겨울연가가 일본 NHK에서 인기리에 방영됐다. 2012년 7월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뮤직비디오가 다양하게 패러디되면서 신드롬으로 불리면서 전세계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유튜브 조회수에서도 24억 뷰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달성했다. 2013년말 방영된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는 중국 최대 정치행사인 양회에서 언급될 만큼 중국에 큰 문화적 충격을 줬다.
K팝과 K드라마·무비에 이어 순수문화 역시 지구촌 곳곳에서 영향력을 높여나가고 있다. 난타공연은 대표적 한류관광 상품으로 각광 받으며 올해 누적관객 1000만명을 돌파했다. ‘우물안 개구리였던 문학 역시 2000년대 이후 해외로 눈을 돌려 고은, 황석영, 이문열 등의 소설이 세계 20여개국 이상에 출판됐다.
[배한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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