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증요와 용서의 광시곡…한여름 연극 ‘프로즌’ 열풍
입력 2015-07-15 15:37 

소극장에 증오와 용서의 광시곡이 휘몰아쳤다.
110분 동안 배우 3명이 주체할 수 없는 분노와 좌절, 슬픔, 패배감, 허탈함을 쏟아냈다. 무엇이 그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을까. 바로 사람이다.
연극 ‘프로즌은 딸을 잃은 낸시, 그 딸을 살해한 랄프, 그를 분석하는 정신과 의사 아그네샤의 갈등을 날카로운 3중주로 풀어나간 수작이다. 숨막히는 긴장감 속에 세 사람은 상처를 드러내고 고통스러워한다.
낸시는 열 살 난 딸 로나를 방치한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랄프를 용서한다. 그러나 정작 용서를 받은 랄프는 평생 처음 느낀 죄책감에 자살한다. 연쇄살인범 랄프 역시 아동 학대의 피해자였다. 어린 시절 양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해 전두엽 손상을 입은 그는 어린 소녀 7명을 성폭행하고 살해하면서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했다
랄프와 상담하던 아그네샤는 자신의 트라우마와 마주한다. 아그네샤는 친구의 남편과 사랑에 빠졌지만 그는 트럭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친구에 대한 죄책감과 연인을 잃은 상처 속에서 허우적댄다.

배우 3명의 에너지로 100℃ 이상 끓어올랐다가 다시 차갑게 모든 상황을 정리하는 이 연극이 대학로를 강타했다.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에도 매진 행진을 이어갔다. 지난달 9일 개막도 하기 전에 티켓이 다 팔렸다. 지난 5일 막을 내린 후 9회 연장 공연까지 매진되자 지난 10일부터 앙코르 공연에 돌입했다. 초연 극장인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100석)보다 50석 많은 아트원씨어터 3관으로 무대를 옮겼다.
초연 연극이 왜 이렇게 뜨거운 사랑을 받게 된 걸까. 원작의 힘과 스타 연출가 김광보, 극단 맨씨어터 배우들의 열연이 상승효과를 일으켰다. 원작은 영국 여성 극작가 브리오니 래버리의 대표작으로 2004년 토니 어워드 최우수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호평을 받았다. 등장 인물 3명이 가해자와 피해자가 되어 상처를 주고받는 인간 관계 본질을 예리하게 포착했다.
김 연출은 실력파 배우들의 연기를 잘 살려 극을 완성시켰다. 무대 세트보다는 연극의 주체인 배우에 중심을 두는 연출가다. 테이블과 의자 3개만 두고 인간의 어두운 내면으로 비극을 그려갔다.
배우 박호산과 이석준은 괴물과 인간 사이를 오가는 랄프 역을 소름끼치게 소화했다. 평소에 어리숙하지만 갑자기 짐승처럼 포악해지는 랄프의 감정선을 잘 살려 공포와 긴장을 만들어냈다.
낸시 역을 맡은 배우 우현주는 아이를 둔 엄마여서 감정이입이 자연스러웠다. 떨리는 손으로 죽은 딸의 인형과 동화책을 만지며 아픔을 토해내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기 전 상황부터 실종된 아이를 찾는 부모 모임을 만드는 과정, 20년만에 로나의 시체를 찾기까지 고통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아그네샤 역할 배우 정수영은 친구에게 용서를 구하지 못하고 연인의 죽음 조차 제대로 슬퍼하지 못하는 얼음 속에 갇혀사는 여인을 차갑게 연기했다.
세 배우의 독백으로 밀도높게 진행하던 극은 40여분만에 그들을 만나게 한다. 랄프의 불행한 과거가 드러나면서 선악의 구분은 의미 없어진다. 어린 시절 영문도 모르고 학대를 당해 뇌를 다친 그는 무의식 속에서 자신의 아동성애와 살인에 면죄부를 준다. 가끔 세상은 당신의 뒤통수를 치고는 원하지 않는 곳으로 당신을 데려갑니다”라는 그의 대사가 묵직한 울림을 준다.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에 대한 연민이 차오르는 순간이다.
그렇지만 진정한 용서는 없다. 아그네샤가 낸시에게 자신도 용서받을 수 있겠냐고 묻자 고통과 함께 살아가라”는 대답을 듣는다.
연극이 몰아넣은 고통의 한복판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위안을 얻을 수 있다. 쇼팬하우어는 힘들고 괴로울 때 최상의 위안은 자신보다 고통받는 존재를 바라보는 일”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공연은 26일까지. (02)762-0010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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