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누룽지탕 원조, 중식대모 이향방 “나의 요리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입력 2015-06-12 15:07  | 수정 2015-06-12 19:23


칠순의 나이에도 요리에 대한 열정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누룽지탕 원조 이향방(70)은 국내 요리 업계에서 ‘중식대모로 불린다. 그는 중국 산동 출신 화교 부모님 슬하에서 1남1녀 중 장녀로 서울 영등포에서 태어났다. 6.25전부터 식당을 운영했던 외할머니는 어린 그에게 간단한 식당 일들을 시켰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24살에 대만 외교관 집안으로 시집을 가고 본격적인 요리 인생은 시작된다. 시아버지의 직업 탓에 시댁에는 손님이 끊이질 않았다. 특히 주말에는 시아버지와 함께 마작을 즐기는 손님들을 위해 두 끼 정도는 직접 준비하는 게 일상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혹독한 시집살이로 고개를 흔들었겠지만 그는 불평보단 새로운 요리를 개발하는 재미에 푹 빠져들었다. 요리를 맛본 손님들의 칭찬도 그에게 큰 힘이 됐다. 본격적으로 요리를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30살이 되어서다. 대만에서 요리학원을 다니며 2개의 자격증을 취득했는데 그것이 훗날 장사 밑천이 될 것이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갑작스런 남편의 사업 실패는 그에게 운명처럼 찾아왔다. 부부와 어린 3남매, 외할머니, 어머니, 조카까지 그의 식솔은 모두 8명이나 됐다. 식솔을 살리기 위해 그는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처음 중식당을 연 곳은 연희동. 연희동에 화교 학교가 생기면서 그 일대가 화교촌이 된 게 그곳에 터를 잡은 가장 큰 이유였다. 먼저 외할머니의 종자돈 10만원을 가지고 15평 정도의 가게를 구했다. 그 곳을 채운 것은 테이블 4개와 그를 포함한 종업원 3명뿐이었다. 손바닥만한 공간에서 남들과 같은 요리를 파는 것은 누가 봐도 승산 없는 게임으로 생각한 그는 과감하게 자장면, 짬뽕 같은 면류는 취급하지 않았다. 대신 누룽지탕, 오향닭발, 오향땅콩, 물만두, 부추전병, 파전병, 탕수육 등 오직 요리만을 판매했다. 양장점 디자이너와 꽃꽂이 선생을 할 만큼 손재주가 뛰어난 그의 요리는 입과 눈이 즐겁다는 입소문과 함께 대박이 나기 시작했다.




요리깨나 먹어봤다는 호사가들에게 ‘이향방이라는 이름 석 자에는 꼭 두 가지가 딸려 나온다. 가장 먼저 오늘의 그를 있게 해준 누룽지탕이다. 그는 대만 한 식당에서 처음 누룽지탕을 맛봤다. 바싹하게 튀긴 찹쌀누룽지에 해물을 넣어 만든 소스를 부어 찌이익하는 소리와 함께 먹은 기억을 그는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그가 처음 가게를 열고 메뉴에 누룽지탕을 넣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집에서 쉽게 먹을 수 있는 누룽지를 누가 돈 내고 먹겠냐는 선입견이었다. 그런 손님을 대할 때마다 그는 맛없으면 계산하지 말라고 호기를 부렸다. 자신의 요리에 대한 배짱이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는 그가 처음으로 중국에서 가져온, 눈으로 먼저 마신다는 모리화차다. 20여 년 전 그는 손님들에게 후식으로 대접하기 위해 수십 종류의 차 중 고르고 골라 모리화차를 선택했다. 모리화차를 맛본 사람들은 이제껏 맡지 못한 향기에 빠져들었다. 후식으로뿐만 아니라 모리화 꽃을 식당에서 직접 팔면서 그에게 큰 수익을 안겨다 줬다.



그의 식당은 전직 대통령들 덕에 유명세를 치루기도 했다. 그중 한명은 자신의 집까지 출장 요리를 부탁했고 또 다른 한명은 그 맛을 잊지 못해 비서관을 보내 청와대까지 포장 배달을 부탁했다. 그들이 가장 좋아했던 요리도 다름아닌 누룽지탕이었다. 브로콜리를 이용한 좌종당계, 대게다리를 이용한 깐풍게발도 좋은 반응을 얻었는데 시중 식당에서 브로콜리와 청경채 재료를 요리에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질 만큼 그는 새로운 요리를 개발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천하 산해진미를 경험한 것으로 따지면 용호상박인 전직 대통령들도 그의 요리에 매료될 수 밖에 없었다.



요리 인생 40년인 그에게도 롤모델이 있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수양어머니이자 영원한 요리 스승인 대만의 요리연구가 故 후페이메이 선생님이다. 그와의 인연이 시작된 곳은 대만이 아니라 서울이었다. 1988년 국내 새마을본부 지도자들이 국내 닭고기와 돼지고기 판매촉진을 위해 대만의 요리대가들을 초청해 방송국에서 2시간동안 특별 생방송을 한 적이 있었다. 원활한 소통을 위해 이향방 선생에게 대만대사관은 통역을 요청하면서 후 선생을 대면하게 된다. 통역과 통역 대상자가 아닌 요리인으로 만난 그들은 곧 사제의 연을 맺고 스승은 그를 호적에도 올려 수양딸까지 삼았다. 후 선생은 대만에서 47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매일 새로운 메뉴로 요리 프로그램을 진행하여 기네스북에도 오른 업계의 전설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수양어머니이자 스승의 뒤를 밟는 그는 칠순 나이에도 요리연구와 후학 양성에 열심이다. 얼마 전 그는 평생 모은 1100권이 넘은 요리 서적을 도서관에 기증하기도 했다.



40년 전 급작스런 집안 문제가 아니었다면 그는 지금 평범한 노인으로 여생을 보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요리로 인해 영광의 순간도 많았지만 식당과 요리를 같이 하며 남모른 아픔과 고생도 많았다. 하지만 그는 요리와 함께 한 40년을 후회하지 않는다. 중식대모란 호칭으로 한정 짓기 아깝게 3000가지가 넘는 레시피를 가지고 있는 명실상부한 최고의 요리대모이다. 현재 중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요리사들, 수많은 요리 연구가들, 중식을 배우고 싶은 여러나라의 대사관 부인들이 앞 다퉈 그를 찾아왔다. 숨이 부칠 만큼 앞만 보고 달려왔을 무렵, 몇 년 전 그에게 갑작스런 병마가 찾아온다. 죽음을 생각한 그는 65년 인생을 돌아보며 후회스러운 일, 아직 못한 일, 감사한 일, 아쉬운 일들에 대해 유서를 썼다. 다행스럽게도 성공적인 수술로 건강을 되찾았고 그는 자신의 유서를 바탕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자신의 요리에 향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를 찾는 한 그는 계속 요리를 할 것이다. 그리고 평생 수 없이 경험한 음식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더 내고 싶다고 말한다. 최고의 중식대가 아니 요리대가의 더 멋진 제 2의 요리인생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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