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안성기 “주름이 있어야 배우다”
입력 2015-03-18 15:14 

암에 걸린 아내를 4년째 수발 중인 50대 남성이 있다. 화장품 회사의 상무인 그는 낮에는 격무와 싸우고 밤에는 아내의 고통과 씨름한다. 요즘 그에게 부하 직원인 30대 여성(추 대리)이 눈에 아른거린다. 밝은 웃음과 매끈한 몸매, 찰랑거리는 머릿결은 병상에 누워있는 고목같은 아내에게 없는 것이다. 남자는 아내가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다른 여자에게 빠져든다. 세상은 그를 비난할 수 있을까.
다음달 9일 개봉하는 ‘화장은 관객에게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진다. 욕망과 절제의 기로에 선 중년 오 상무 역은 ‘국민배우 안성기(63)가 맡았다. 김훈 작가의 동명의 소설이 원작이고, 임권택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지난 18일 서울 종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안성기는 욕망과 싸우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 아니냐”고 물었다.
그는 카메라는 추 대리에 대한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는 오 상무의 속을 훔쳐보려고 한다. 드러내지 않듯 드러내야 하는 연기에 관심이 갔다. 인물의 본심을 보여주는 연기가 힘들었다”고 했다.

영화엔 쇠락하는 생명을 향한 애잔한 정서가 가득하다. 오 상무는 전립선 비대증을 앓는다. 소변 배출을 돕는 줄을 바지 속에 숨기고 다니는 그는 슬픈 눈빛으로 푸석푸석한 아내를 바라본다. 인간이라면 필연적으로 직면하는 생의 소멸을 생각하게 만드는 순간이다.
평소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요. 어떻게 살아야할까, 하는 생각이죠. 세상을 떠날 땐 가져가는 게 없으니까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고 하죠. 잘 버리고, 아름답게 마감하고 싶어요.”
그는 대화 중 다음 할 얘기를 까먹었다”고 하는 순간이 많았다. 은퇴 생각이 멀지 않은 나이다.
옛날에 내가 좋아했던 배우가 이상한 모습으로 나왔을 때 속상했어요. 팬들이 그런 아픔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아요. 사람들이 ‘보고 싶다할 때까지 열심히 하다가 ‘사아악하고 시야에서 사라지고 싶어요.”
오 상무는 추 대리를 향한 욕정에 괴로워하지만, 결코 이성을 확 놓고 욕망으로 돌진하지 않는다. 임권택 감독은 이에 대해 인간의 향기는 절제에서 나오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음주나 도박과 같은 어떠한 스캔들에 휘말리지 않고 60여년 가까이 배우생활을 해온 안성기는 나야말로 오 상무보다 훨씬 더 많이 절제하면서 살아왔다”며 웃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그는 종교가 모든 것을 자제하게 만드는 것 같다”고 했다.
다른 사람이 보면 제가 굉장히 절제력이 강하다고 하는데, 특별한 것은 없어요. 가장으로서, 배우로서 해야할 일이 있기에 하는 것뿐이에요. 유니세프 친선대사를 오래 하다보니까 (봉사가)몸에 배게되고, 계속 연기해야하니까 운동이 습관이 된 것처럼 나도 모르게 (절제가)체화된 것 같아요.”
쑥쓰러운지 너털 웃음을 지었다. 눈가에 진한 부채 주름이 잡혔다. 거뭇한 기미가 눈에 들어왔다. 얼굴 관리는 거의 안한다고 했다.
배우는 주름이 있어야 해요. 물론 피곤하고 노쇠한 느낌을 주는 주름은 싫죠. 근데 그게 인생인걸 뭐….”
그는 요즘 (사람들이) 하도 많이 가꾼다. 성형왕국은 오명인 것 같다. 외형보다는 내면에 충실한 게 좋다는 생각에 외모 관리는 소홀하게 된다”고 했다. 단 그는 건강은 중요하다”고 했다.
꾸미는 것보다 속의 에너지를 챙겨요. 외모는 안좋아도 내면에 힘이 있어 보이고 싶어요. 에너지가 속에서부터 밖으로 나오니까요.”
아버지 친구의 영화(황혼열차·1957)에 단역으로 출연한 우연이 운명이 될 줄 몰랐다. 꼬집어도 아프다고 기억 못할 나이”(5살)였다고 했다. 아역 시절에만 70여편에 출연한 그는 10대때 각종 연기상을 휩쓸었다. 군 제대 후 성인 연기자가 되선 ‘남부군, ‘하얀전쟁, ‘실미도, ‘부러진 화살까지 필모그래피를 두껍게 채웠다. 자타 공인 국민배우”다.
영화를 찍는 작업은 똑같지만, 캐릭터는 매번 새롭고 함께 일하는 사람도 매번 달라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만나니까 지겨울 수가 없죠. 새로운 세계를 찾아가는 재미가 커요. 촬영마다 항상 기쁨이 있어요.”
오 상무가 겪은 중년의 쇠락함은 그를 비켜간 듯했다. 오늘도 그는 모든 일정을 마친 뒤 헬스장에서 웨이트 트레이닝을 2시간 가량 한다. 국민배우가 ‘롱 런하는 비결이다.
[이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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