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단독] 한국 원자력계의 대부, 한필순 고문 별세
입력 2015-01-25 16:09 

 한국 원자력계의 대부(代父) 한필순 한국원자력연구원 고문이 25일 오전 10시 30분께 심근경색에 의한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향년 82세.
고(故) 한필순 고문은 1933년 평남 강서 출신으로,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에서 물리학 학사를, 미국 일리노이대에서 물리학 석사,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0년부터 국방과학연구소(ADD)에서 연구원 생활을 시작한 군 출신 과학자다.
1970년대 황무지와 다름 없었던 한국 방위산업 수준을 한단계 향상시킨 주인공으로 낙하산, 방탄헬맷, 한국형 수류탄 등 개발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군에서는 "한국 방위산업 현장에는 한필순이 있다”는 말이 퍼져있을 정도였다.
고인은 애국심이 남다른 과학자였다. 70년대 미국 한 대학에서 조교수 자리를 제의받았지만 "무기를 만드는데 당신이 필요하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한마디에 꿈을 접고 한국에 남았다. 신군부가 들어서고 정치 혼란기였던 1982년, 고인은 에너지연구소 부소장 겸 대덕공학센터장에 취임하면서 원자력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 에너지연구소는 이름만 바꾼 원자력연구소였다. 미국이 한국 원자력연구소 폐쇄를 요구하자 전두환 정권이 외관상으로 일단 없애고 이름을 에너지연구소로 바꿨다. 이때 고인은 원자력 발전기술 자립화를 주장했다. 별다른 자원 없는 한국이 원전 기술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연구원 내부에서는 "원자력을 모르는 사람이 센터장으로 와서 무리하게 일을 추진한다”는 비난이 나오기도 했다. 1980년대 한국의 원전 기술력은 일본을 100으로 봤을 때 10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인은 "기술이 없으면 노예가 된다”는 확고한 철학으로 원전 기술 자립화를 추진했다. 연구원들과 끊임 없이 토론하고 설득해 마침내 한국형 연구용 원자로와 핵연료, 한국형 경수로 원전 개발을 시작했다. 고인은 1984년부터 7년 동안 한국원자력연구소 소장을 역임하며 이 모든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당시 개발된 한국형 경수로는 영광 원전 3, 4호기에 적용됐으며 이후 아랍에밀레이트에 수출한 모델인 'APR1400'의 모태가 됐다.
고인은 원전 연료가 되는 핵연료 국산화에도 큰 공을 세웠다. 고인은 핵연료 국산화 사업을 시작하면서 함께 연구할 외국 회사를 모집할 때 미 정부 반대를 무릅쓰고 미국 웨스팅하우스사를 탈락시켰다. 기술 제공 의지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후 고인은 핵연료 전량 국산화에 성공해 "유전개발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원자력계에서는 고인이 없었다면 한국 원자력 기술 자립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김종경 한국원자력연구원장은 "고인은 외국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던 원자력 기술을 우리 스스로 만들 수 있도록 초석을 다진 한국 원자력계의 대부”라며 "이 분이 아니었다면 원자력 수출도, 연구용 원자로 개발도 이뤄지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족으로는 장남 기철, 장녀 윤주(주식회사 콩두 대표), 차남 기석(한국화이바AMS 근무) 씨가 있고 빈소는 서울 강남성모병원 장례식장 31호실에 마련됐다(02-2258-5940). 발인은 29일 오전, 장지는 대전 현충원이다.
[원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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