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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K인터뷰] 김무영, “귀화? 태극마크는 평생의 꿈이다”
입력 2013-05-10 13:37  | 수정 2013-05-10 18:40

[매경닷컴 MK스포츠(일본, 고베) 김원익 기자] 일본 프로야구에서 뛰고 있는 유일한 한국인 투수 김무영(27)은 단 한 번이라도 태극마크를 다는 것이 꿈이다.
올 시즌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중간계투로 16경기에 나서 평균자책점 1.10의 눈부신 활약을 하고 있다. 16⅓이닝동안 내준 자책점은 불과 2점. 15개의 탈삼진을 솎아냈다.
일본 최고 수준의 소프트뱅크 계투진이 아니었다면, 다른 보직을 맡을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패전조나 추격조로 활약 중이다. 지난 2년 동안의 호투로 코칭스태프의 신뢰도 얻어냈다.
임시였지만 세이브 상황에도 등판했다. 9일 오릭스 버펄로스와의 경기 9회말 2-1, 한 점차 리드상황에서 마무리 투수 브라이언 폴켄버그가 가와바타 다카요시의 머리를 맞혀 퇴장당하자 아키야마 고지 소프트뱅크의 감독은 김무영을 마운드에 올렸다. 폴켄버그 외에도 마무리급 투수들이 즐비한 상황. 그러나 갑작스레 올라온 김무영은 스트레이트 볼넷에 이어 끝내기 안타를 맞고 고개를 떨궜다.

그렇지만 김무영의 비상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9일 경기를 앞두고 만난 김무영은 걸쭉한 사투리가 인상적인 순박한 부산 사나이였다. 자신에 대한 이야기에는 못내 쑥쓰러워 하다가도 야구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뜨거운 열정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 야구인생 2막, 이제부터 시작
김무영은 지난해 32경기에 등판해 31⅓이닝을 소화하며 1승1패3홀드 평균자책점 1.72라는 훌륭한 성적을 냈다. 올해는 지난해보다 느낌이 더 좋았다. 김무영은 올 시즌 작년보다도 몸 상태가 더 좋은 것 같습니다. 1군에서 많은 경기를 뛰어본 것이 처음이었는데 늘 불펜에서 대기하면서 몸을 풀고 공을 던지는 것이 생각보다 체력적으로 힘들더라구요. 그래서 겨울 동안 체력 훈련도 열심하 하고 준비를 잘했습니다”라며 활짝 웃었다.
지난해 김무영은 패전조와 추격조를 다양하게 오갔다. 올해 역시 마찬가지. 김무영은 지난해 다양한 경험이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성적이 나름 잘 나왔지만 내가 평균자책점 1점대 중반을 기록해도 필승조는 그보다 더 낮은 1점대 초반이나 그 이상을 찍으니까요(웃음). 아마 우리 계투진이 12개 구단 중 최고일거에요. 일단 올해 저는 초반에 나와서 분위기를 바꾸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라며 씩씩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해 굴곡 많은 야구인생 20여년만에 감격적인 첫 승을 거뒀다. 김무영은 당시 이날을 위해서 바다를 건너왔다”는 감격에 찬 소감을 전했다. 고대하고 고대했던, 그리고 기적과 같은 1승이었다. 그날을 떠올리는 김무영의 표정에는 그때의 벅찬 감회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잠깐 말을 멈춘 김무영은 원래 처음에는 고시엔에 가고 싶어서 바다를 건너왔는데, 1승을 하니까 정말 기쁘더라구요”라며 부모님 생각이 정말 많이 났고 정말 조금이지만 내가 일본에서 잘하고 있구나. 내가 이렇게까지 야구를 한 것과 그간의 일들이 작게나마 인정받는 그런 느낌이었요”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꿈을 좇아 현해탄을 건넌 소년 김무영
김무영은 사연 많은 남자다. 중학생 김무영은 구타가 죽기보다 싫었다. 야구는 정말 하고 싶었지만, 이유 없는 상습적인 선배들의 구타는 소년의 꿈을 시들게 했다. 선배의 권유에 따라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넜다. 열다섯 소년의 마음에는 고시엔 구장을 밟고 싶다는 꿈도 생겼다.
그런데 이게 웬일. 김무영의 꿈은 영글기는커녕 시들어만 갔다. 일본어 한 마디 못했던 김무영은 부족한 학업을 따라잡기 위해 늦게까지 공부를 해야 했고, 해가 질 무렵에야 겨우 글러브를 꼈다. 처음에는 정말 힘들었죠. 일본어를 거의 한 마디도 못했으니까요. 거기가 외국인 고등학교나 그런 곳도 아니고 일반 고등학교였는데 2학년부터는 일본애들하고 똑같은 조건에서 시험을 쳤어요. 그래서 성적이 떨어지면 남아서 공부를 하고 해가 지면 겨우 야구를 하러 나갔는데 내가 공부를 하러 온건지 야구를 하러 온건지 헷갈릴 정도였어요.”
고민은 깊었다. 팀은 번번이 고시엔 예선에서 떨어지기 일쑤였다. 학업과 야구를 병행하면서 좀처럼 늘지 않는 실력에 여기서 멈출까도 싶었다. 하지만 아들을 일본으로 보내 뒷바라지를 해준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다시 이를 악물었다. 프로선수를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한 후쿠오카경제대학교에 특기생으로 진학해 어깨가 빠질 정도로 공을 던졌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구속은 140km를 넘지 못했다. 그러다 대학 1학년 겨울 방학 고향 부산의 한 헬스클럽 트레이너의 지도로 근육과 체격을 키웠다. 이후 최고 구속은 150km를 훌쩍 넘겼다.
3학년 겨울 방학에는 드래프트 지명이 확실하다는 스카우트들의 이야기까지 들었어요. 프로선수의 꿈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줄 알았는데 4학년 초부터 갑자기 어깨가 아팠습니다. 어깨 이두근 염증이었는데 그게 그렇게 오래 갈줄은 몰랐죠. 1년 동안 공을 못 던지고 결국 독립리그에 갔습니다. 나중에 프로에 가서도 그 부위 부상이 저를 괴롭힐 줄은 그때는 몰랐습니다.”
△ 눈물 젖은 독립리그...다시 찾은 희망
기자님 독립리그 사정을 좀 아십니까?” 김무영에게 들은 독립리그는 정말 야구를 하고 싶다는 꿈만으로 버텨내야 하는 곳이었다. 김무영은 독립리그에 입단하면 2년을 뛰어야 프로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월급 100만원이 채 안되는 돈을 받는데 그걸로 연습 장비도 사고 숙식도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도 대학을 졸업하고 명색이 사회인인데 부모님께 손을 벌릴수도 없고 거의 매일 라면만 먹었습니다. 부모님은 그래도 그 사정을 알고 라면을 몇 박스씩 보내줬는데 정말 그 때 생각을 하면….”
점심으로 국수 한그릇을 먹고 집에 오면 라면을 끓여먹고 다음날 아침 다시 공을 던지는 날들의 반복이었다. 배는 고팠지만 성적은 훌륭했다. 후쿠오카 레드워블러의 마무리로 2승 17세이브 평균자책점 0.41의 성적을 냈다.
그리고 2008년 드디어 소트프뱅크의 지명을 받았다. 야구를 하면서 처음으로 3000만엔이라는 거금도 손에 쥐었다. 그때만 생각하면 김무영은 아직도 웃음이 난다. 그때는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했어요. 야구를 하면서 처음으로 벌어본 큰 돈이었으니까요. 당시에는 환율도 높았거든요(웃음). 계약금은 전부다 그간 힘들게 뒷바라지 해준 부모님 드렸습니다.”
입단 후에도 어깨 상태는 완벽하지 않았다. 구속도 140km 초반에 머물렀다. 2군에서 다시 눈물겨운 생활을 하다 몸 상태를 회복하면서 좋은 성적을 냈고 2011년 7월 1군에 승격되면서 기회를 잡았다. 9경기서 평균자책점 2.35로 가능성을 보여준 이후 2012년부터 어엿한 주전으로 활약중이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 평생의 꿈은 태극마크”
김무영은 2009년 3월 일본인 부인 오이케 마이씨와 혼인신고를 했다. 가장 어렵고 배고팠던 시절 김무영을 뒷바라지해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2011년 결혼식을 올렸고 슬하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두 아들도 생겼다. 일본에서 태어난 아들은 당연히 일본 국적을 갖고 있다.
아직 병역을 해결하지 못했지만 한국 국적을 포기할 생각은 없다. 무영, 편하게 야구를 하려면 얼른 귀화를 해라”는 주위의 권유는 쏟아진다. 그러나 그때마다 김무영은 고개를 젓는다. 눈물 젖은 이국 생활을 하면서 품어온 단 하나의 꿈 ‘태극마크 때문이다.
다소 민감할 수 있는 병역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김무영은 대뜸 호탕한 웃음부터 터뜨렸다. 병역 문제는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잖아요. 당연한거니까요. 아시안 게임에 뽑아만 주시면 참 열심히 할텐데”라고 웃더니 이내 표정을 고쳤다.
어릴때부터 한 번도 태극마크를 못 달았어요. 어릴적에는 그 실력에 어유 꿈도 못 꿨죠(웃음). 그런데 국제대회서 한국 선수들이 뛰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야구선수로서 한번이라도 태극마크를 달고 싶다는 꿈이 생겼어요. 정말 그 느낌은 잊지 못할 것 같아요.”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그를 볼 수 있을까. 김무영은 시종일관 조심스러웠지만 대표로 선발되고 싶다는 꿈을 감추지 않았다. 김무영은 제가 일본에서 뛰더라도 대호형 처럼 매일 이렇게 기사가 나거나 하는 선수가 아니잖아요. 제 인지도도 그렇고 저를 주목하기 쉽지 않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다른 선수들보다 제가 일본 선수들과 일본야구를 많이 아니까, 그 점은 강점이 있지 않을까요? 뽑아만 주신다면 열심히 해야죠”라고 다시 활짝 웃었다.
일본에서 만난 김무영은 밝고 유쾌한 청년이었다. 그간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텐데도 어두운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끝내 포기할 수 없었던 야구에 대한 열정과, 아직 이루지 못한 꿈 때문은 아니었을까. 김무영이 소프트뱅크의 심볼인 매처럼, 화려한 비상을 꿈꾸고 있다.
[one@mae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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