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우상화·팬덤은 밀랍 날개…버닝썬 추락은 필연이었다
입력 2019-03-15 17:30  | 수정 2019-03-15 21:50
밀랍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던 우상은 '버닝썬'(burning sun·타오르는 태양)에 날개가 녹아 추락하고 있다. 그리스 신화의 한 장면 같은 일이 지금 K팝에서 벌어지고 있다. 만능 엔터테이너 이미지를 가지고 각종 사업으로 영역을 확장하던 빅뱅 승리(본명 이승현·29)는 자신이 등기이사로 있던 클럽 버닝썬에서 촉발된 일련의 스캔들에 가수 본업까지 내려놓게 됐다. 이에 더해 그와 친밀하게 지냈던 정준영, FT아일랜드 최종훈, 하이라이트 용준형이 줄줄이 각종 범죄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됐던 것으로 드러나면서 한국 연예기획업의 근본적 문제에 대해 지적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K팝이 '국위선양' 핵심 산업으로 부상한 이후 아이돌(idol·우상)을 지나치게 우상화하는 문화가 이들의 도덕적 해이를 유발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전지전능한 엔터테이너
보이·걸그룹에 신비로운 이미지를 부여하는 건 'K팝 산업'의 핵심이다. 일반적인 아이돌 그룹은 기획사가 '끼 있는' 인재를 선발해 3~5년 내 '제작'하는 과정으로 탄생한다. 1990년대 이후 한국 연예기획사는 이런 식으로 수많은 인기 그룹을 배출할 수 있었지만 이 팀들은 '공장'에서 탄생해 아티스트로서 자격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달고 다녔다.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2000년대 중반 무렵부터 본격 등장한 게 이른바 '아티스트형 아이돌'이다. 2006년 데뷔한 빅뱅은 예술가형 아이돌의 선봉장이다. 지드래곤(권지용·31)을 중심으로 노래와 랩을 잘하고, 춤에 능할 뿐만 아니라 작사·작곡까지 스스로 한다는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일부 아이돌은 이를 넘어 '만능 엔터테이너'라는 점을 내세워 대중에게 다가갔다. 운동에 연기, 심지어 사업까지 잘하는 연예인이라는 것이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우리나라는 기획사 등 인위적인 제도, 이른바 '매니지먼트 시스템'의 힘을 통해 '아마추어'가 '스타'로 만들어진다"며 K팝 아이돌의 예술성에 대한 태생적 결핍이 '다재다능함'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진다고 풀이했다. 그는 "연예인들이 사업 경험이 일천함에도 이에 능력을 보여야 한다는 환상이 있다"며 "이전에는 사업을 하더라도 연예기획업 위주였는데 최근에는 한류 열풍이 불면서 비(非)연예 분야로까지 사업이 확장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승리는 만능을 넘어 전지전능한 연예인으로 자신을 포지셔닝했다. 작사, 작곡을 직접하는 '자작돌'을 넘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가 능통한 외국어 능력자, 사업 수완까지 뛰어난 기업인으로서의 면모를 강조했다. 이런 과정에서 비즈니스를 성공시키기 위해 급기야는 해외 투자자에게 성상납까지 했다는 게 그가 받고 있는 의혹이다. 자본은 그렇게 '만들어진 우상'을 적극 활용해 이익을 취한다. 김헌식 평론가는 "연예인이 본업에 충실하면서 사업까지 잘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버닝썬은 만들어진 우상을 내세워 사람 장사와 마약 장사를 했다"고 말했다.
도덕적 흠결은 기획사가 세탁
연예기획사는 소속 아이돌의 도덕적 흠결을 털어냄으로써 우상을 완성한다. 연예인이 부정적 이슈에 휘말렸을 때 이미지 세탁을 통해 이른 시일 내 복귀시키는 데 주력하는 것이다. 문제 연예인을 자숙·반성케 하고, 기획사 매니지먼트 시스템을 점검하는 건 뒷전이다. 승리가 '버닝썬게이트'에 연루되기 전에도 YG에는 수많은 가수가 마약 투약 의혹으로 조사를 받았다. 대마초 흡연과 관련해 지드래곤은 양성 판정을, 탑은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기도 했으나 기획사에선 대중이 공감할 만한 수준의 징계나 자성의 시기를 부여하지 않았다. 오히려 승리가 출연한 넷플릭스 예능 'YG전자'를 통해 마약을 개그 소재로 사용함으로써 대마초 흡입이 별일 아니라는 듯한 인상까지 풍겼다. 문제가 생기면 소속사가 어떻게든 해결해준다는 인식이 아이돌들의 도덕적 일탈을 부추긴다는 분석이 나오는 부분이다.
특히, 동료들이 연루된 범죄 의혹이 유야무야 넘어갔던 전력은 승리에게 부정적 학습효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컸다고 풀이된다. 김반야 음악평론가는 "소속 뮤지션이 줄줄이 마약류에 연관됐던 것을 그저 감추고 부인하고 어떻게든 넘기려고만 했던 것은 분명 책임이 있다"며 "윤리를 떠나 범죄에 관한 것임에도 대처 방법이 너무 안일했다"고 비판했다.
'버닝썬게이트'와 '몰카 공유 사건'에서도 한국 연예기획사는 문제 진상을 파악하기보다는 '우상'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는 데 주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지난달 26일 빅뱅 승리가 포함된 카카오톡 단체방의 성접대 의혹 대화가 공개되자 소속사 YG엔터테인먼트는 "조작된 문자 메시지"라며 "가짜 뉴스나 루머 확대에 법적으로 강경 대응하겠다"고 선을 그었다. FT아일랜드 최종훈, 하이라이트 용준형이 정준영, 승리 등과 카카오톡 채팅방에 함께 있으며 법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대화를 나눴다는 각종 의혹이 제기되자 FNC와 어라운드어스 등 두 사람의 소속사는 즉각 부인하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두 사람은 관련 혐의를 인정하고, 용준형은 팀 탈퇴, 최종훈은 연예계 은퇴를 선언했다.
광신도 같은 팬덤
지지 연예인이 하는 일이라면 뭐든 감싸고 드는 팬덤도 아이돌의 도덕적 불감증을 키우고 있다.

트위터에는 'SeungriYouHaveUS(승리 유 해브 어스)'라는 해시태그(해시 기호 # 뒤에 특정 단어를 써 연관 게시물을 모아 분류하는 체계)가 지속적으로 올라오고 있다. 일부이긴 하지만 이들은 빅뱅이 승리까지 포함한 5명이어야지만 팀으로서 완성된다며 승리를 비호한다. 아이돌이 각종 의혹에 휩싸일 때마다 절대적인 지지를 보이는 열혈 팬덤은 스타의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줄일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 의견이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우상으로 떠받들어진 사람은 '자신이 하는 것은 뭐든 정당화될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고 꼬집었다. 정병욱 음악평론가는 "아이돌이라는 직업군 자체는 너무 어릴 때부터 스타 의식을 가지게 된다"며 "어릴 때부터 스타 의식을 갖게 되면 도덕적 불감증을 갖게 될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시청자들은 승리를 '위대한 승츠비'(승리와 개츠비의 합성어)로 포장한 MBC '나 혼자 산다'와 정준영이 과거 불법 성관계 영상 촬영 의혹을 받았음에도 빠르게 복귀시킨 KBS '1박2일' 게시판에 항의 글을 올리고 있다. TV 예능 프로그램이 이들 활동에 대해 긍정적 이미지만 편향적으로 보여줘 일탈을 방조했다는 비판이다. 황선업 음악평론가는 "우상화는 대한민국 TV쇼의 폐해"라며 "우리나라는 예능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을 주축으로 아이돌이 소비되다 보니 방송에서는 특정 캐릭터를 강조해 반응을 끌어낸다"고 설명했다.
한류도 글로벌스탠더드 생각해야 할 때
한류의 질주에 취해 도덕과 윤리는 간과했던 대한민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이번 '버닝썬 게이트'를 통해 근본부터 재점검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 중론이다. 김헌식 평론가는 "이젠 글로벌 팬에게 어필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국내에서 하듯이 우격다짐 우상화는 힘들다"며 "윤리적 하자가 있을 경우 한류의 거품은 바로 걷힌다는 걸 알게 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김반야 평론가는 "K팝 육성 시스템 안에 너무 남성 위주로 편향된 성 고정관념이 존재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며 "대표, 교육자, 현장에선 여자 매니저도 별로 없다 보니 여성을 도구화하는 왜곡된 성개념이 계속 생기고 있다"고 짚었다. 황선업 평론가는 "대중이 TV에 나온 연예인 이미지를 너무 그대로 믿는 건 아닌지 생각된다"며 "매체에 나온 이미지를 너무 맹목적으로 소비하지 말자는 자각을 가질 때"라고 말했다.
[박창영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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