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항거:유관순 이야기' 고아성이 전하는 8호실 옥중일기, 그리고 유관순
입력 2019-02-21 11:07  | 수정 2019-02-21 13:27
영화 '항거:유관순 이야기' 포스터/사진=네이버 영화

한 여성이 족쇄를 찬 채로 서대문형무소에 도착한다. 한눈에 보기에도 야윈 맨발에 굳은살과 상처가 박혀있다. 수레에서 내려와 머그샷을 찍는 곳까지 더듬거리지만 당당한 걸음으로 다가온 여자. 바로 '유관순'이다.
고향 충청남도 병천에서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한 유관순(고아성 분)이 서대문 감옥에 갇힌 첫날의 모습이다. 붉게 멍들고 상처 난 얼굴과 지저분한 행색을 하고 있지만 유관순의 눈빛에는 일제에 대한 저항의 의지가 초연히 담겨있다.
영화 '항거:유관순 이야기'(이하 항거)의 첫 장면이다.

영화 항거는 1919년 3.1 만세운동 후 세 평도 안 되는 서대문 감옥 8호실 속, 영혼만은 누구보다 자유로웠던 유관순과 8호실 여성들의 1년의 이야기를 다룬다.
맨발에 속옷도 입지 못한 채 생활해야 하는 8호실의 열악한 환경. 8호실 여성들은 제각각의 이유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감옥에 투옥됐다. 그 속에서 이화학당 선배 권애라(김예은 분), 수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기생 김향화(김새벽 분), 일본어를 할 줄 아는 다방 여인 이옥이(정하담 분) 등을 만난 유관순은 이들과 함께 3.1운동 1주년 만세를 계획하며 독립의 의지를 불태운다.

영화 '항거:유관순 이야기'/사진=네이버 영화

'뻔할 가능성 높은' 독립운동영화 속 '뻔하지 않은' 독립투사들
이 작품은 유관순의 영웅적 일대기를 담아내는 것에서 더 나아가 유관순의 개인적인 감정과 8호실 여성들의 인물관계에 방점을 찍는다.

'익히 알려진 독립투사' 이전에 어린 학생이었던 유관순의 감정선은 영화 내내 진한 여운을 남긴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회상하며 슬퍼하고 자신이 만세 운동을 하게 된 이유를 곱씹으며 후회를 드러내는 유관순에게서 약하디약한 소녀가 보인다.

8호실을 처음 마주한 유관순은 경악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비좁은 8호실에는 편히 앉을 공간조차 허락받지 못한 25명의 여성들이 검은 비닐 속 정신없이 부대끼는 콩나물처럼 서 있다.
25명의 여인들은 다리를 붓지 않게 하기 위해 방안을 빙글빙글 돈다. 천천히 원을 그리면서도 멈추지 않는 그들의 모습에서 저항정신 뿐 아니라 서로를 의지하는 우정도 엿볼 수 있다. 수원 기생 김향화가 아리랑을 제창하니 다 같이 노래를 따라부르며 미소짓는다. 옥중 사람들의 표정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여유로운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8호실 여성들은 노래를 멈추라는 제지를 받지만 되려 목소리를 높인다.

영화 '항거:유관순 이야기'/사진=네이버 영화

"우린 개구리가 아니다!"

다물라고 다물 입들이 아니기에, 더하여 장난스레 개구리 소리를 따라 하며 반발한다. 엉뚱하지만 익히 예상할 수 있었던 어떠한 무력저항보다도 인상적이다. 독립에 대한 열망과 순수성이 숭고하게 느껴질 정도.

영화 말미, 기개 높은 이 여성들이 한데 뭉쳐 불러낸 3.1운동 1주년 만세는 어땠을까? 따로 말할 필요가 없겠다.

당시 사회의 부적절한 젠더인식까지 찌르는 듯한 옥중 대화 또한 인상적이다.
독립운동을 시작한 계기에 대해 털어놓는 장면에서 수원 기생 김향화는 비전형적인 독립 염원을 토해낸다. '지배하는 계층'이 양반에서 왜놈으로 바뀌었을 뿐 저에게 독립은 먼 나라 이야기라던 김향화는 "조선 여인들의 평등과 존엄을 위해 독립운동을 시작했다"고 담담히 이야기한다.

영화 '항거:유관순 이야기'/사진=네이버 영화

즐길거리는 단연, 배우들의 열연
유관순 역을 맡은 고아성의 작품 소화력은 단연 압권이었다. 특유의 잔잔한 연기가 스크린에서 빛을 발했다.
둘의 생김새마저 닮았다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고아성이 유관순이고, 유관순이 고아성이다.

김새벽(김향화 역)과 김예은(권애라 역), 정하담(이옥이 역)도 훌륭하게 제 역을 소화했다. 제멋대로 열정을 불태우지 않고 제각각 분한 인물들의 독립심을 제 색깔로 표현했다. 덤덤한 대사들을 옹골차게 채워낸 연기투혼이 숭고할 정도다.

다소 아쉬웠던 점은 8호실 속 이야기가 촘촘하게 짜인 만큼 8호실 밖 인물들의 매력이 반감된 느낌이 없지 않아 있다는 것.


일본의 제대로 된 신민이 되고자 조국을 등진 헌병보조원, 니시다 역의 류경수도 사실감 있는 연기를 선보였다. 하지만 유관순과 다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그 시대 청춘의 또 다른 모습을 대변하기엔 니시다는 단조로운 반동 인물의 전형을 벗어나지 못했다.

오히려 일본인 간수로 분한 조연배우가 감초역을 톡톡히 해냈다. 독립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에서 악역에 해당하는 이들은 대체로 남성이다. 순사 복을 입고 총칼을 든 뒤 폭력적인 면모를 갖춘 캐릭터가 배치되는 것이 정석. 하지만 8호실을 지키는 일본인 간수는 여성이다. 불필요한 가학성은 쏙 빠졌지만 냉혹한 여성 간수의 눈빛이 자칫 따분할 수 있는 클리셰를 비틀었다.

영화 '항거:유관순 이야기'/사진=네이버 영화

노련한 연출만큼 생각할 거리도 풍부해
감옥 속 생활은 흑백으로, 과거 회상씬은 컬러로 표현한 담백한 연출은 당대 암울한 시대적 현실을 강조하는 장치로 작용했다. 더하여 불필요한 원근감과 공간감을 반감시키며 비좁은 8호실의 열악함을 실감케 했다. 배우들의 깊은 감정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은 덤.
감옥이라는 배경에서 지나칠 수 없는 고문 장면도 부담감을 반으로 덜고 감상할 수 있다.

카메라는 내내 독립투사의 '발'을 보여준다.
서대문 감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유관순의 마지막 순간까지 유관순을 비롯한 독립투사들의 수많은 걸음이 조명된다. 격정적인 정신적 투혼과 신체적 고난까지 가감 없이 담아내는 발의 '표정'들을 통해 그들이 걸었던 역사적 경로에 집중하게 된다.

영화 '항거:유관순 이야기'/사진=네이버 영화

3.1운동 100주년 기념 볼거리 '종합선물세트'
어떤 방식으로든 마음을 끓어오르게 만드는 '독립투사' 소재에, 관록 있는 배우들의 열연, 실제를 바탕으로 한 한정된 이야기 속에서 율동감을 포착해 낸 세심한 연출력까지 꾹꾹 눌러 담은 '항거:유관순 이야기'.
물론 가벼운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가슴 속에 태극기 하나쯤 품고 봐야 하는 영화.
러닝타임 105분. 2019년 2월 27일 개봉.


[MBN 온라인뉴스팀 한희조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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