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대통령후보 1위 윤석열은 고려 개국공신 윤신달과 고려영토를 크게 넓힌
윤관 장군의 후손으로 파평 윤씨이지만, 나는 조선의 부패한 간신배들과 대항한 조선의 상남자 윤선도와 혈족인 해남 윤씨다.
윤선도의 집안은 동인 가계로 그의 집안은 사림이 동서로 나뉘자 동인이 되었고, 그의 할아버지 윤의중 역시 동인이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가족을 따라 피신하였다가 되돌아왔다. 1597년(선조 30년) 산사에 들어가 수학하였는데, 이때 불교에서 법회 수륙재를 열었으나 관심두지 않고 학업에 정진하였다. 그러나 정유재란이 터지면서 다시 피신하였다.
11세부터 절에 들어가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으며 17세에 남원 윤씨로 판서 윤돈의 딸과 결혼한다. 이후 한양조씨와 첩인 경주 설씨를 맞이한다.
정여립 사건과 기축옥사를 계기로 1591년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분당되었다. 그는 북인에 가담하지 않고 남인이 되었.
청년기
성균관 유생 시절
청년기에 그는 북인들의 학문과 사상 역시 반대하여 광해군 때 관직에 나가지 않고 유교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1606년 승보시(陞補試)에 1등하였다. 그 뒤 1612년(광해군 4년) 향시에 합격하였다.
1612년 진사시에 1등 2위로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다. 바로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었다. 그해 겨울에 생부 윤유심(尹惟深)이 병으로 눕자 임종시까지 극진히 간호하였다.
1616년(광해군 8년) 성균관 유생으로 있을 때 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 김제남이 다른 뜻을 품고 있음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해 이이첨, 권신 등 대북계열 인사들이 왕을 제대로 모시지 않고 권세를 휘두르자, 그해 12월 이를 비난하는 글을 써서 왕에게 올렸다. 그해 이이첨 일파의 월권행위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이후 광해군의 권세를 등에 업고 뇌물수수와 권력남용 등의 부패행위를 자행하는 이이첨, 김개시 등을 비판하고, 인목대비 폐모론과 영창대군, 임해군, 능창군 등의 처형을 규탄, 비판했다.
유배와 석방
또한 1616년(광해군 8) 성균관유생으로서 이이첨의 정치를 난정(亂政)으로 규정하고, 이와 함께 박승종(朴承宗)·유희분(柳希奮) 등의 망군(忘君)의 죄를 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사간원 등 3사에서 탄핵이 빗발쳤고 1617년 유배를 당해, 함경북도 경원(慶源)으로 유배, 이후 경원과 경상남도 기장(機張) 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9] 이를 병진소(丙辰疏)라 한다.
폐행신(嬖幸臣) 이이첨(李爾瞻)이 국정을 제멋대로 하며 의정(議政) 박승종(朴承宗)과 왕후의 오빠 유희분(柳希奮)이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 버렸다.
이때 유생인 이형(李瑩)이 그를 두둔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어 평소 이이첨과 친분이 있던 그의 양아버지 윤유기에게도 귀양을 보내라는 여론이 나타났으나 삭탈관직하고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선에서 끝났다. 이후 그는 관직을 단념하고 학문연구에 치중했다. 1617년 1월 절도유배의 형이 내려진 뒤 압송되었으나 다시 유배되었다. 1617년 한 해 동안 양사로부터 그에게 죄를 주어야 된다는 탄핵상소가 계속 조정에 올려졌다. 그러나 아버지 윤유기나 생부 윤유심이 북인의 당원이었던 덕에 죽음은 모면할수 있었다.
경원에 유배된 그는 유배지에서 서당을 짓고 벽촌의 젊은이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경원 유배살이 중 그는 〈견회요 (遣懷謠)〉 5수와 〈우후요 (雨後謠)〉 1수 등 시조 6수를 지었다. 1618년 광해군과 이이첨 일파를 비난하다가 변방에 유배된 이들이 여진족 등과 내통한다는 이유로, 그도 배소가 경상남도 기장군으로 이배되었다.
1619년 5월 양아버지 윤유기(尹惟幾)의 상을 당하여 특별히 풀려나 3년상을 마친 뒤 다시 유배지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1623년 인조 반정이 일어나자 풀려났다.[9] 그러나 그는 인조반정을 찬양하지는 않는다. 1623년 3월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으나 3개월 만에 사직하고 해남으로 내려갔다. 이후로 그는 남인으로 전향하여 남인으로 생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