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고하십니다.
파주시 내 새로 주거지역으로 발전할 별하람마을에 거주중인 서현수입니다.
저는 1993년 서울에 있는 홀트아동복지회에 입사하여 일산서구 탄현동에 위치한 장애인 주거생활시설인 홀트일산복지타운에 발령받은 뒤 업무를 시작하다가 1994년 가을에 뜻밖의 사고로 위급상황을 격게 되어 병원에서 뇌 및 눈, 치아, 뼈 등등 11번의 응급수술을 실시하였고 처음에 “죽을 수 있다”는 의사의 말에 고양시 병원에는 응급실에 들어가지 못하였었고 119 연락하여 서울 이대목동병원에 응급차로 이송되어와 응급실에 응급치료를 받은 뒤 위기는 넘겼지만 두 눈은 파열됐다는 말이 있었고 하지만 석달 후에 왼쪽 눈만 파열됐다는 결과가 나와 앞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찾았고 이빨은 모두 파열되어 거의 임플란트로 이를 심는 과정을 격었었습니다 그 와 중 매일 낮에 가계서 일을 하고 저녁에 병원에 찾아 오시며 근교에 있는 목5동성당에 가셔서 밤새 울음을 멈추지 않으신 어머니의 기도 덕에 한 쪽 눈만 잃게 되는 신체력을 갖게 되었고 그런 사연을 글로 작성하여 평화신문의 제출하여 최우수 성적을 거두었으며 그 시상금으로 받은 금액(1995년 100만원)을 봉투도 뜯지 않고 홀트아동복지회에 사회복지기금으로 기증하는 사랑의 손길을 보여주셨었습니다
저는 시각장애4급 판정을 받았는데도 홀트아동복지회에서 다시 입사시켜주시어 사무업무와 홀트장애인종합체육관에서 장애인체육운동, 고양시세계휠체어농구대회 등을 3번 개최 진행하였으며 현재 홀트보호작업장에서 지적장애 근로인들의 임가공 작업파트의 직업훈련교사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저는 저 때문에 어려워진 가정을 회복시켜야 겠다라는 마음가짐으로 결혼을 뒤로 미루아 아직 27년이 지난 지금도 미혼인 상태로 있는데 이런 고비를 넘겼던 저를 인도해 주시며 지금도 저와 거주를 같이 하시는 어머니를 소개해 드리려 이 글을 씁니다
1941년 생으로 1966도에 아버지(고)서종환)를 만나 결혼하신 저희 어머니는
아버님이 대기업에 입사하시어 잘 결혼생활을 시작하시던 중
어머니는 1968년 및 1969년, 1972년에 각각 아들을 출산하시어 아들 삼형제를 키우셨는데
아버님이 뜻밖에 신장염 질환으로 1974년에 돌아가시자 그때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친할머니 및 외할머니, 그리고 고모 및 고모 아들까지 함께 어울려 살도록 돌봐주실 때도 있었습니다
남대문 시장 및 왕십리에서 식당 외 이것저것을 하시던 어머니는 아들들에게 아버님이 천주교 신자이셔서 어머니도 천주교 신자가 됐었다고 천주교 다니는거 어떻냐고 물어보시는 말씀을 하셨어서 저희는 초등학교때부터 성당에서 복사 활동 및 각 단체장 역할을 하는 천주교 신자가 되었고
아들들이 학교 및 성당에 가 있을 때 어머니는 가계를 운영하시며 수익금으로 집에 계시는 할머니의 식생활 물품과 약을 구입해 주셨었고
친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외할머니가 집에서 같이 생활토록 해주셨으며
고모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이혼하시자 고모와 고모아들을 돌봐주시는 사랑의 보금자리 역할을 해주셨었습니다
그러시던 중 1983년 식당 장사를 멈추시고 결혼하시기 전부터 한복에 관심이 있으셔서 한복관련 일을 시작하신 어머니는 종로6가 동대문종합시장 옆 건물에서 시작하여 한복일을 해오셨는데 그때부터 아들들은 학교 끝나고 왕십리의 집에 가방을 내려놓은 뒤 종로6가로 버스를 타고 가서 한복을 맞추신 분의 원단을 들고 서울 각 지역에 거주하시는 한복 미싱사들에게 갇다주고 완성된 한복을 어머니에게 갇다주어 한복을 맞추신 분들이 한복을 찾아가게끔 했었습니다 그때만해도 오토바이 운반자들이 아주 활기차게 물품 운반을 해주었는데 그 운반비가 만만치 않아 저희 들이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손님이 토요일에 오는 경우가 많아 저희 들도 토요일 오전 수업이 끝나면 종로6가에 가서 어머니에게 짜장면이나 짬뽕을 사달랠려고 때를 쓰는 때도 있었고 일 끝나시고 집에 들어올 때 같이 장사하시는 분들이 저녁먹고 가자고 하시면 저희도 옆에 붙어 얻어 머고 가는 일이 제일 즐거운 때 였었지요
그렇게 한해 두해가 가다보니 외할머니도 주님의 부르심을 받으셨고 고모도 고모 아들을 중국으로 출국시키시어 대학교를 보내도록 인도하셨으며
저희 첫째 형님도 대학교에 보냈다가 졸업 후에 천주교 수도회 수사신부가 되겠다고 요청하시어 카톨릭대학교에 보내시는 작업을 하셨었습니다
제 동생은 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입대하고 난 후 제대하여 좋은 제수씨를 만나 2001년에 결혼을 하게 되었고 딸 2명을 낳아 아주 사랑받는 아버지가 되었었죠^^
하지만... 아버지처럼 암에 걸렸다라는 판정을 받아 일을 못나가게 되었고 동생 대신 일을 하게 된 제수씨의 정성으로 몸이 좋아지다가 암 치료 5년 쯤에 급성으로 재발되어 3년전 아버님 곁으로 떠나 지금 제수씨가 조카2명을 데리고 생활하고 있씁니다
그런데 종로6가에서 한복일을 하실 때는 원단도 없이 다른 사람의 작업일을 하시다보니
위와 같이 가정 및 사회에서 지출금은 많은데 수익금이 그리 많지않아 원단파는 장사를 하셔야겠다는 의뢰를 저에게 했었고
저는 종로5가 광장시장 내 1층에 가계 자리를 봐두었다 라고 말씀하시는 어머니의 의견을 존중하여 사업자등록증을 등록하고 어머니 가계 바로 옆에서 먹자골목이 있어 많은 사람이 다니는 곳에서 장사하시도록 도와드리고 있씁니다
그런데 그렇게 장사를 하시면서 거주지는 전에 저 때문에 4천8백만원의 수술비 및 치료비가 들어 보유금이 적었던 관계로 월세 및 전세로 생활하다가 금촌2동에 공공임대아파트가 되어 입주하게 되면서 먼 곳에서 가계에 오시게 되는 길을 제가 만들어 드릴 수 밖에 없었고
또 어머니도 연세가 드셔가시다 보니까 신체적으로 아픔을 격게 되시는데
대장염으로 암센터에서 치료를 받으시고 고혈압 및 대상포진 등등
다니시는 병원 만 5군데가 되셔서 가실때마다 제가 휴가를 써서 같이 다니고 있씁니다
지금은 그동안 또 아파트 구입 및 장사 관계로 대출금이 많아 저의 월급으로는 어떻게 해결방안이 나오지 않는 관계로 아파트를 팔아 그 갑아야 할 금액을 모두 막은 뒤 다시 월세 아파트로 나온 후 지금 다시 운정1동에 공공임대아파트에 입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 19 발생으로 가계 운영이 되지 않는 국내경제 상황이 발생하였고 어머니와 저는 고령 및 장애 관련 전철이 무료이지만 버스는 유료 이므로 전철을 타고 출퇴근 하였었는데 얼마 전 부터 코로나 신규 확진자가 급증하면서 전철을 타지 않고 가게에 가시겠다라는 말씀을 들어 저희 아파트 앞에서 공덕역에 가는 급행버스와 공덕역에서 종로5가에 가는 일반버스를 확인하여 필요시 쓰시라고 카드에 버스지출금을 미리 일정금액 입금하여 전해드리고 있습니다
지금 연세가 82세이신 어머니가 가게에 가실 때 걷는 시간을 포함하여 2시간30분~3시간, 오실 때도 2시간30분~3시간 가량이 걸리는 가계 운영을 하시는 이유가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혼자 되시고 나서 지금까지 해 오신 어머니 만의 공간이 바로 광장시장 내 ‘서울고전한복’이기에 어머니와 그 주변 어머니와 같이 연세가 많으신 한복가계 어르신들과의 유대관계, 바느질 하시는 분들과의 관계, 원단을 같다주시는 분들과의 관계를 생각하셔서 제일 편한 곳이 서울 종로구 광장시장 內 한복 원단집 ‘서울고전한복’이기에 일반인들에게 다시 한번 우리 고유문화의 한복을 알릴수 있도록 방송 협조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