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괴광기(日帝怪狂期)=일제강점기 때 은사금(恩賜金)과 강제위안부 피해보상 금액 근거.
명심보감(明心寶鑑) 염의편(廉義篇)은 사람이 청렴(淸廉)하고 그 말이 고결(高潔)하고 선(善)한 말은 사람을 감동시키며 나아가 잘못 됨을 참된 사람으로 되돌아가게 한다는 내용의 말이다.
부원군(府院君)이란 왕비의 친아버지를 말하며 조선 24대 헌종의 비인 효정왕후 홍씨가 바로 홍기섭의 아들인 홍재룡(洪在龍)의 딸이 바로 헌종의 비이다.
홍재룡에 대한 이러한 글이 바로 명심보감 염의편(廉義篇)에서 나오는 글이다.
간략하게 조선 24대 헌종(憲宗)의 역사를 올리옵니다.
나라에 관리임명과 과거제도및 국가재정의 기본인 삼정(三政)인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 (還穀)의 문란과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와 수재발생 등으로 민생의 어려움으로 인한 유랑민들이 나타났으며 이양선(異樣船: 무력을 동행한 외국의 배)의 출몰로 내우외환(內憂外患)이 그치지 않았다.
이러한 시대에 헌종은 순조(사도세자의 손자)의 손자이자 후에 익종으로 추존된 효명세자의 아들이며 1834년에 순조가 별세하자 8세의 어린나이로 조선 24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나이가 어린관계로 순조의 비인 효명세자의 어머니이며 안동김씨인 순원왕후가 수렴청정 (垂簾聽政)을 하다가 헌종이 15세가 되던해인 1841년에야 비로소 친정을 하게 되었다.
1837년 3월에 영흥부원군 김조근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으나 4년 뒤에 병에 걸려 병사하자
1844년 10월에 익풍부언군 홍재룡(洪在龍)의 딸을 계비로 맞이하였다.
헌종 1년에 수렴청정을 한 순원왕후 김씨는 1811년에 일어난 홍경래의 란(亂)의 사후 수습 으로 서북인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고 관리로 등용할 것을 교시하였다.
헌종 5년 1839년에 천주교 탄압인 기해박해가 일어났다.
헌종 6년 1840년 12월에 안동김씨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효명세자의 비인 풍양조씨의 세력이 우세해지게 되었다.
헌종 11년 1845년에 영국군함 사마랑호가 제주도와 서해안을 불법측량하고 돌아가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헌종 12년 1846년 6월에는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프랑스 군함 3척을 이끌고 충청도 외연도에 들어왔다. 그리고 7월에 조선의 최초 신부인 김대건이 체포되어 효수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헌종 14년에는 이양선(異樣船)들이 경상 전라 황해 강원 함경도 등지에 빈번하게 출몰하여 백성들의 민심이 크게 동요되는 국내외적인 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이러한 위협에도 적절한 안정책도 세우지 못한채 즉 방책도 세우지 않은채 권력의 장악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헌종의 재위 14년 중 6년의 수렴청정을 제하면 9년간의 짧은 친정기간에 세도정권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안동김씨와 풍양조씨 일문의 권력투쟁에 휘말리다가 23살에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이당시의 세계정세가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정치력의 부족으로 적절한 방책을 세우지 못하였다.
결국 조선은 23대 정조의 둘째 아들인 순조시대 1811년에 홍경래의 란(亂)으로 시작하여 세도정치의 부패와 삼정의 문란이 지속되어 조선은 자력의 힘을 신장하지 못하고 26대 고종 때에 임오군란(1882년)과 갑신정변(1884년)은 조선 내정의 불씨를 스스로 끌어들여 결국 청일전쟁(1894년 7월)의 불씨를 만들고 동학혁명은 1860년(철종 11년)에 최제우가 창도한 종교이며 녹두장군 전봉준(全琫準)은 동학에 입교하여 1894년(고종 31년) 1월 10일에 1천 여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동학혁명이 일어나게 되어 나라는 자력을 잃고 청나라와 일본의 힘을 빌려 정책을 펴려고 하였으나 청일전쟁이 끝나고 3개월 후인 1895년 8월 20일 새벽에 민비(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났으며 그리고 민비가 시해당하고 2년 후인 1897년 10월에는 나라를 즉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바꾸고 황제라 하고 연호를 광무(光武)라 하였다.
그러나 결국 자국의 힘이 약해 나라를 지탱하지 못하고 조선의 나라는 즉 대한제국의 나라는 학문을 배워 나라를 위급함에서 구하여야 하는 애국애족의 국가관이 없이 1910년에 은사금을 받고 매국하여 조선의 나라는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 일제괴광기(日帝怪狂期) 1년 때 은사금(恩賜金)에 대하여.
은사금에 대하여 말이 나오는 것은 1910.8.22에 한일광합병조약=한일합병조약 제5조에 나오는 문구다.
우리의 고귀한 미풍양속과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역사(歷史)와 문화가 무력만 앞세우는 이성을 잃은 미개인인 왜놈에게 고귀한 내 나라를 빼앗겼다. 즉 악행과 간계와 만행만 일삼는 왜놈은 도덕 인의도 없는 그들이 자기 나라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왜놈들한테 빼앗겼다. 그들은 괴광합병을 하면서 합병한 놈에게는 즉 나라를 매국한 놈에게는 은사금을 주었다. 그들의 음모는 치밀하고 간사한 괴략(怪略)들이었다.
이러한 괴략들에 말렸다. 지금부터는 이러한 역사를 연구하여 두 번 다시는 나라를 빼앗기지 않게 국가관을 키우고 부국강병의 나라를 만들어 자주 자립하여 나라를 바로 일으켜야 한다.
우리 단군조상님께서 물려주신 우리의 위대한 역사와 고귀한 문화의 정신을 짐승보다 못한 왜놈이 어떻게 다스린단 말인가 한마디로 바둑의 초급자가 장기의 초급자가 고단자를 어떻게 이긴다는 말인가 가소롭고 가소롭다. 한마디로 미친놈이 어떻게 신선을 즉 대인을 다스린단 말인가. 곧 짐승이 어떻게 사람을 다스린단 말인가!
물론 짐승들에게 당한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잘못이지만 일본은 세계대전에서 항복하여 패망하였기 때문에 11년의 세계대전과 우리나라는 36년간 피해를 보았기 때문에 피해보상을 요구를 할 수가 있다고 봅니다.
아아 역사의 소중함이여 아아 나라의 소중함이여 아아 우리의 슬기를 찾읍시다.
아래에 괴광합병(한일합병) 당시에 은사금을 받은 사람과 거절한 사람의 내용을 적어 봅니다.
◉ 은사금(恩賜金)을 거절(拒絶)하고 자결(自決)한 사람으로는
전 성균관박사(前 成均館博士) 김근배(金根培).
전 중추원찬의(前 中樞院贊議) 김지수(金志洙) 그 외 등등이 있다.
또한 일본은 1945년 일본천왕이 항복한 후 패왕(敗王)이 되었으므로 폭력과 강요에 의한 강탈한 모든 것을 침략이전의 상태로 환원할 의무가 있으며 또한 배상을 해야 한다.
적어도 나라를 개인의 사욕으로 팔아넘긴 자에게 준 은사금(恩賜金) 정도의 배상은 받아야 된다고 보는 바(所=事)입니다.
왜냐 배상 문제에 있어서 그 은사금 이상은 묻지를 못합니다.
나라를 잃어버리게한 것은 누구의 책임입니까? 그것은 우리나라가 전부 다 책임이 있다고 보며 그 배상 문제에 대해서는 은사금 정도에서 생각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는 바입니다.
나라를 개인의 사욕으로 괴상스럽게 미친 짓으로 팔아넘긴 대가는 반드시 정리를 해야 된다고 봅니다.
다시 한마디만 더한다면
강제위안부의 피해보상문제는 한사람당 적어도 은사금을 제일로 많이 받은자인 고종의 형인 이재면(李載冕)의 금액인 83만엔(166억원)으로 청구하여 받아내야 세계2차대전도 종식이 되며 또한 한일관계도 종식이 되는 것이라고 보는 바(所=事)입니다.
그리고 세계2차대전의 역사는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총살을 당하였고 독일의 히틀러는 자살을 하여 그 죄값을 죽음으로 종식을 했다. 그러나 일본만행천황은 활복자살도 않하고 또 총살을 시키지 못하고 또 반성도 않하고 미국에 매달려있다.
곧 일본만행천황인 히로히토를 능지처참할 때 세계대전도 종식이 되며 일본은 주권이 회복이 되는 자격을 줄 수가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 외 억울하게 참혹하게 당한 독립투사 등과 독도문제와 문화제문제 등도 반드시 피해보상을 받아내야 하는 것이 관건(關鍵)이다.
[명심보감(明心寶鑑)의 염의편(廉義篇)에서 홍기섭의 아들 홍재룡(洪在龍)]
洪蘷燮 少貧甚無料(홍기섭 소빈심무료): 홍기섭이 젊었을 때 심히 가난하여 말할 수 없더니
一日早 婢兒踊躍 獻七兩錢曰(일일조 비아용약 헌칠양전왈): 하루는 아침 일찍이 어린 계집종이 기쁜 듯이 뛰어와서 돈 일곱 량을 바치며 말하기를
此在鼎中(차재정중): 이것이 솥 속에 있었습니다.
米可數石 柴可數駄(미가수석 시가수태): 이만하면 쌀이 몇 섬이요. 나무가 몇 바리입니다.
天賜天賜(천사천사): 참으로 하느님이 주신 것입니다.
公驚曰 是何金(공경왈 시하금): 공이 놀래서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된 돈 인고 하고는
卽書失金人推去等字(즉서실금인추거등자): 즉시 돈을 잃은 사람은 와서 찾아 가라는 글자를
付之門楣而待(부지문미이대): 대문 위에다가 기다린다는 뜻을 붙였다.
俄而姓劉者(아이성유자): 이윽고 얼마 아니되어 유가라는 사람이
來問書意(래문서의): 찾아와 글의 뜻을 물었다.
公悉言之(공실언지): 공이 사실을 전부 말해주었다.
劉曰 理無失金於人之鼎內(유왈 이무실금어인지정내): 유가가 말하기를 남의 솥 속에다가 돈을 잃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果天賜也 盖取之(과천사야 개취지): 참말로 하늘이 주신 것인데 왜 취하지 않습니까
公曰 非吾物何(공왈 비오물하): 공이 말하기를 나의 물건이 아닌데 어찌 가지겠소.
劉俯伏曰 小的昨夜爲窃鼎來(유부복왈 소적작야위절정래): 유가가 꿇어 엎드리며 말했다.
소인이 어제 밤에 솥을 훔치려 왔다가
還憐家勢蕭條而施之(환련가세소조이시지): 도리어 가세가 너무나 불쌍하고 쓸쓸하여 이것을 놓고 돌아갔더니
今感公之廉价 良心自發(금감공지염개 양심자발): 지금 선생님의 고결하고 착한 마음에 감동되어 좋은 마음이 스스로 일어나서
誓不更盜(서불갱도): 다시는 도둑질을 않하기로 맹세를 하겠으며
願欲常待(원욕상대): 선생님을 늘 모시기를 원하오니
勿慮取之(물려취지): 저의 원을 들어주시기를 물리치지 마십시오.
公則還金曰(공즉환금왈): 공이 돈을 돌려주면서 말하기를
汝之爲良則善矣(여지위양즉선의): 네가 착한 사람이 된 것은 좋으나
金不可取終不受(금불가취종불수): 이 돈은 받을 수 없으며 끝끝내 받지 않았다.
後公 爲判書(후공 위판서): 뒤에 공은 판서가 되고
其子在龍 爲憲宗國舅(기자재룡 위헌종국구): 그의 아들 재룡이는 조선 24대 헌종의 부원군이 되었으며
劉亦見信 身家大昌(유역견신 신가대창): 유가도 또한 신임을 얻어 몸과 집안이 크게 번영 하였느니라. (終)
상기의 글은 제가(황효상 호는 심조불산) 전자책이며 10권으로 발간하여 판매하고 있는 본문에서 나오는 글입니다. 그리고 에도 올리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