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 자료의 저작권은 ‘MBN 정운갑의 집중분석’에 있습니다.
전문 게재나 인터뷰 인용 보도 시,
아래와 같이 채널명과 정확한 프로그램명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MBN <정운갑의 집중분석>
매주 월~금 오후 5시
재방 익일 새벽 1시, 새벽 4시
=====================================================
장호권 (고 장준하 선생 장남)
▶ 안녕하십니까.
- 안녕하세요.
▶ 오랜만에 다시 모셨습니다.
- 반 년 만에.
▶ 결과가 나와서 마음이 뿌듯할 듯. 1974년이죠?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15년의 징역, 39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았을 때 기분은?
- 특별한 기분보다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고 오래된 것이기 때문에 담담하고 약간 서글픈 생각이 들더라고요.
▶ 여러 가지 만감이 교차했을 듯.
- 네. 사실 이번에 판결은 장준하 선생님의 무죄, 이런 판결이라기보다 39년 전에 유신 헌법이 유죄다, 이걸 보여주는 사법부의 진실이죠. 사법부가 이 진실을 고백하기까지 시간이 참 오래 걸렸구나, 그런 걸 생각하니 서글픈 마음이 들더라고요.
▶ 국민 대통합의 본보기를 보여준 사례라고. 그동안 한이 풀리셨습니까.
- 한이 풀렸다, 장준하 선생님의 긴급조치로 15년 받고 고생을 하셨던 것, 그 외에 것으로도 상당히 많은 가족들이 고통을 받고..
▶ 감시, 감독, 위협이 계속 됐다고.
- 그렇죠. 39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는데 저희가 생각할 때는 한이 풀렸다기보다 할 일이 시작되는 구나, 그런 생각.
▶ 72년에 유신헌법 53조는 대통령의 위기라고 판단되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긴급조치를 내룰 수 있다, 긴급조치 1호는 유신 헌법에 대해서 유언비어 날조, 이런 걸 유포 금지 내용이었는데 장준하 선생이 당시 긴급조치 1호 판결을 받은 건 어떤 이유?
- 그 당시 그랬습니다. 긴급조치라른 건 유신 때문에 생긴 건데 박정희가 위헌이라고 나왔는데 법을 만들어서 영구집권을 했을 때 장준하 선생님이 유신 헌법을 개정하자, 하는 범국민 적 청원 운동을 일으키셨어요. 그래서 서명 운동을 시작한지 일주일도 안 돼서 40만이 서명. 그 때는 모바일도 없었는데. 그러니까 위기를 느낀 거죠.
▶ 그 때 40만이라는 건..
- 대단한 숫자. 제가 그 때 그걸 거둬드리기 위해서 전국을 차를 타고 매일 돌았으니까. 위기를 느끼다보니까 긴급조치를 발동한 거죠. 그래서 유신에 대해서 유신법에 대해서 비방을 하거나 개정을 원하는 청원 운동을 하는 거나 이렇게 되면 긴급 조치법으로 다스린다고 해서 긴급 조치법이라는 것은 영장 없이 체포, 구속하고 법정에서 15년 형을 때릴 수 있는 악법 중의 악법.
▶ 그런데 이번 판결이 너무 늦었다, 만시지탄 이런 감이 있을 텐데. 만약, 장준하 선생이 살아계신다면 이번 판결에 대해서 어떤 말씀을 하실까.
- 아마 이번 판결을 살아 계신다면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만 웃으시면서 이제부터 할 일이 많구나, 이런 말씀을 하실 듯.
▶ 2010년에 대법원이 긴급조치 1호가 위헌이다, 라고 선언. 3년이 지났잖아요. 이게 참 답답했을 듯. 왜 질질 끌었을까, 왜 안 했을까. 당시 이동흡 후보자도 관련되어 있는 상황. 청문회 진행되는 걸 보면서 마음이 씁쓸하셨을 듯.
- 씁쓸하다기보다 결국 이것도 39년의 일. 그동안 정권이 몇 차례 바뀌긴 했었습니다만 소위 이 나라의 법적인 권력 말고, 헌법적 권력을 컨트롤이라고 할까? 뒤에서 발목을 잡고 있는 그런 권력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즉 장 선생님의 긴급조치와 관련된 그런 부류들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이돕흡 후보자도 여기에 들어가겠지만 그들이 아직까지도 존재는 없어졌는데 그들은 살아서 과잉된 어떤 충성을 보이는 거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들의 죄를 가리기 위해서 그런 거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해봤죠.
▶ 헌법 재판소장 후보자로 어떻게 보세요? 이동흡 후보자.
- 개인적으로 그 분을 모릅니다만 그 분의 행적을 봐서 과연 대한민국의 사법부라는 건 국민의 마지막 보루인데, 과연 그런 사람들이 수장이 될 수 있겠는가, 거기에 대해서 상당히 의문점을 가지고 있는 거죠.
▶ 장준하 선생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장준하 선생이라고. 왜?
- 특별한 이유보다도 저는 장자로서 장 선생님이 상당히 선친이라고 부르기로 했는데 습관이 됐는데 굉장히 엄하게 키우셨어요. 어렸을 때부터. 그리고 교육을 시키면서도 교육이라는 말씀을 안 하고 교육을 시켰고. 아버지란 말도 못해봤습니다. 그 저 부친에 대해서 호칭을 간신히 한 건 아버님. 그리고 자라서 성인이 돼서 한창 힘든 시기에 모시고 다니면서 아들로서도 옆에서 가장 믿을 수 있으니까 보좌하면서 일을 하다보니까 자연히 옆에 같이 있는 분들과 똑같이 선생님, 선생님 하게 됐죠.
▶ 어렸을 때 함께할 수 있었던 시간이 많지 않았을 듯.
- 네. 어렸을 때는 장 선생님과 같이 할 수 있는 시간이 드물었죠. 남들과 같이 아버지와 아들이 손잡고 간다든가, 부러운 점도 있었습니다.
▶ 지금 의문사 규명 작업도 진행하고 있는데, 유골 감식 결과가 중요한데 나왔습니까? 아님 진행중인지.
- 유골 감식을 거의 1개월 했습니다. 각계 분야 전문가들이 물론 법의학자도 포함해서 1개월 가량 굉장히 심도있게 하고 있는데 이제 감식이 끝났습니다.
▶ 원래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겁니까?
- 왜냐하면 장 선생님의 타살 의혹이라는 거, 저희는 암살이라고 하고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하는 부류가 있어요. 그러니까 나는 왜 반론을 제기하는지 당사자가 아닌데 왜 하는지 잘 이해가 안 가지만 어찌됐던 객관적으로 우리가 봐야 하고 그래서 저희는 암살이라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 증언하기 위해서 검식을 하게 된 거고, 검식 결과에 따라서 소위 타살이 아니라고 얘기라는 부류들, 그들한테도 만약에 감식 결과가 저희도 아직 개입을 안 하고 있습니다만, 모르죠. 거기서 이것은 타살이 아니다, 예를 들어서 그렇게 나온다면 그들도 편해지는 거고 그래서 이건..
▶ 그러면 받아드리는 거죠?
- 그렇죠.
▶ 이쪽이든 저쪽이든 받아드리고 새롭게 조명하면 되는 거죠.
- 그렇죠. 그래야지만 여러 가지 소위 새로운 정부가 섰을 때에도 서로가 부담 없이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 결과는 언제 나오는지.
- 결과가 다음 달 중순 경우에. 지금 아마 최종 보고서를 쓰고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거기에 외국에서 여기에 대한 코멘트가 들어올 거고 그런 것 때문에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 지금 장 선생께서 타살을 확신하는 가장 큰 이유는 원형 함몰 부분이 있었는데 그것 때문인지 확신하시는 건지.
- 저희는 그렇습니다. 애초에 장 선생님이 돌아가셨을 때 산에서 돌아가셨을 때 그 당시 상황이 두 가지로 보고 있는데 하나는 시대적 상황, 그 당시 장 선생님과 유신 정권의 관계, 여기서 첫째는 돌아가시기 직전에 한참 전부터 장 선생님 신변을 조심하라는 많은 충고가 있었죠. 왜냐면 장 선생이 그 당시 유신에 반대하다가 긴급조치를 해서 구속도 됐었고 나오셔서 유신에 종식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하셨어요. 그런 점 하나하고, 그 당시 사람하나 죽이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그 당시 산에서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장례를 치르고 조사에 들어갔을 때 모든 정황이 이건 시간적으로도 그렇고 모든게 맞지 않는 거예요.
▶ 돌아가신 시점, 알려진 시점, 거리가 상당히 있었는데 시간상 괴리가 있다고.
- 왜 그랬냐면 그 사람들이 당시 보고했을 때 만약에 등반하다가 떨어져서 사람들이 저희한테 연락을 해줬다고 하게 되면 그 시간 차가 최소 두 시간 이상 나야하는데..
▶ 사망 시점과 알려진 시간과 거리가 있었다는 거죠. 전화를 하더라도 한 시간이나 두 시간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 뿐만 아니라 핸드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일반 전화도 많은 것도 아니었고 산 속에서 전화도 할 수도 없고 파출소까지 가는데도 걸어서 그 당시는..
▶ 지서에서 유선전화로 연락 받은 겁니까?
- 아니죠. 지서까지 가서 거기서 전화를 연락을 했다고 하더라도 한 시간 이상이 걸리죠. 그런데 사건이 났다고 그 당시 목격자라고 하는 사람, 이제는 동행인으로 밝혀졌습니다만 그 당시 산행했던 사람이 저희한테 알려주고 모친께서 연락을 받은 게 오후 두 시쯤. 사망은 한 시 경에 했단 말이에요. 그럼 두 시간 사이에 다 이뤄졌단 말이냐. 지서에서 연락 받은 적도 없고. 관할 지서에서도 그 도경에서 연락을 받은 거예요. 일선이 아니고. 도경에서 거기 누가 사망했다고 하는데 알아봐라, 얘기가 안 되는 거죠. 도저히.
▶ 미리 알고 있었다는 거.
- 미리 알고 있었다는 거죠. 전화도 없는데 그렇게 알게 되느냐. 증언을 해 준 사람과 저희가 가서 이 사람, 저 사람 입을 맞춰봤을 때는 말이 안 되는 일이 많이 있었고 그 대신에 그 당시 왜 밝히지 못했느냐, 했을 때 장준하 선생님의 사안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도 긴급조치 9호로 다스렸어요.
▶ 그 때 얘기 자체가 위법.
- 위법이었죠. 그 당시는 왜곡, 유언비어 전부 다 긴급조치로 구속시키니까. 그리고 나서 의심을 품었던 동아일보 기자가 구속됐지 않았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진전을 못하고 답보상태에 빠지고 세월이 지나간 거죠.
▶ 목격자가 나중에 동행인으로..
- 최근에 와서 목격을 한 사람이 아니고 동행인이었다고 판단하는데 왜냐면 그 사람의 진술이 상당히 많이 번복이 됐고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이 목격자는 자기의 역할, 암살로 규정하고 있으니까 곧 나오겠지만 그렇게 규정이 됐을 때 그 사람은 자기 역할이 있었다, 자기 역할을 조사받는 과정에서 잊어버리고 딴 사람 역할까지 얘기하다보니까 혼선이 왔구나, 판단한 거죠.
▶ 암살이라면 범인은 그 분으로?
- 아니죠. 그렇게 안 봅니다 그 사람은 동행인이고 안내인이었고 실질적으로 암살이었다면 암살한 당사자는 따로 있다.
▶ 지금도 살아있을까?
- 아마 살아있을 겁니다. 아마 조만간에 그 사람이 나올 것 같은데요. 거기 관계됐던 사람으로. 그 사람이 아마 양심고백을 할지 모르겠지만 은밀하게 연결이 됐는데 그 목격자, 동행인이라고 하는 사람이 얘기한 증언 중에 처음에 나왔다가 나오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장 선생과 같이 있었던 사람 중에 하나가. 그러면서 정말 양심적으로 역사를 바로 세우는 시점이 그런 됐다면 나오겠죠.
▶ 교감을 가지고 있습니까.
- 한 번. 그 다음에 시간이 되면 나오겠다고.
▶ 언제쯤이 될까?
- 모르죠.
▶ 이번에 결과가 나오면 그 결과에 따라서 본인이 나와서 양심고백을 할 수도 있겠다.
- 할 수도 있겠죠.
▶ 심정이 많이 바뀌고 있다는 걸 느낍니까?
- 그렇겠죠. 이 사람은 안 되겠다, 이게 있죠.
▶ 이부영 진상조사위원장. 이명박 정부는 조사 권한이 없다, 새 정부에서 재수사 요청을 하겠다고 밝혔는데.
- 네. 애초에 저희가 이걸 갖다가 수사를 의뢰했죠. 이명박 정부에. 제가 직접 가서 청와대에 접수를 시켰죠. 거기서 대답이 나온 것이 장준하 선생의 지상 규명에 대해서 조사를 다시 하기 위해서 부서를 정하는데 150일이 걸린다는 대답을 해주더라고요. 그 얘기는 안 하겠다는 얘기죠. 150일이라는 것은 5개월이라는 것인데 5개월이라면 임기가 끝난 후란 말입니다. 그 얘기는 안 하겠단 얘기. 그래서 저희가 국민대책위원회라는 걸 꾸려서 국민적 여망으로 조사하자, 하면서 국회에서는 야당에서는 이부영 선생님을 비롯해서 의원들께서 특별법을 만들자고 해서 그 진상 규명회가 구성이 됐고 저희는 민간 차원에서 지금 서명운동을 계속 받고 있고. 이번에 장 선생님이 무죄가 됐다는 보도를 접하고 상당히 많은 관심을 가지고 그동안 해온 서명에 배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즉 국민적 관심이 많다는 얘기.
▶ 이번 무죄 판정의 용의자로 추정되는 그 분의 심정에 또 다른 변화를 줄 수도 있겠네요.
- 그럴 수도 있겠죠.
▶ 그 분은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 모르겠습니다. 말씀하신 목격자란 분, 1974년도 장 선생이 돌아가시고 집에서 장례를 치를 때 불러다가 증언시키고 나서 녹음하고 나서 39년 지난 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 살아는...
- 가끔 기자들도 가서 만나고 하는 모양인데 회피한다고 하는데 충청도 당진에 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 지난 2007년 박근혜 한나라당 후보가 경선 과정에서 모친 방문. 당시 과거사에 대한 사과를 받으셨는데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았다고.
- 그 진정성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해 봐야 해요. 그 당시 2007년도 그 당시 박근혜 경선 후보가 느닷없이 장 선생님 부인을 방문하겠다, 연락을 해서 물론 얘기가 여러 가지 있지만 했을 때 처음엔 의아했죠. 왜냐면 왜 갑자기 이 시점이냐, 경선 시점에. 삼척동자도 아는 거 아니냐, 그렇지만 허락을 했어요. 저는 없었습니다만 와서 박근혜 후보가 그 당시 와서 저희 모친과 나눈 대화에 초점이 뭐였냐, 세간에서는 사과를 했다, 하지만 그 당시 대화 초점은 장준하 선생님과 자신의 부친인 박정희, 나라를 사랑하는 건 똑같았다, 단지 방법에 차이가 있었다, 그걸 주지시키는 걸 초점으로 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것이 과연 사과냐, 진정성이 없고, 사과라는 건 가해자와 피해자가 마음에서부터 마음으로 움직여줘야 하는데 어떤 목적을 가지고 요식 행위로 전달하기 위해서 사과라는 단어를 쓴다는 건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것이고 진정한 사과와 용서가 될 수 없다고 보는 것이죠.
▶ 이번 대선 과정에서 과거사 문제 사과를 했습니다. 과거사에 대해서 진상조사를 하겠다고. 과거보다 진위일보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 그 점은 이번 대선과 관련되어 있죠. 대선에서 박 당선인이 공약으로 국민대통합이라는 명제를 내 놓고 과거사 문제를 꺼냈죠. 물론 여러 가지 말이 왔다갔다하다가 결국은 과거사 대통합을 위해서 해야겠다, 그리고 피해자들에게도 보상을 한다든가 얘기를 했습니다. 좀 있으면 박 당선인이 대통령이 됩니다. 대통령이라는 것은 소위 박정희의 딸이 아니죠. 이제. 국가의 수장입니다. 국가의 수장이라는 자리는 국민이 가지고 있는 어려운 점, 국가가 저지른 모든 잘못을 정리하고 보다듬고 해결할 책무가 있는 거죠.
▶ 국민대통합의 길이다.
- 그럼으로써 박 당선인이 대통령이 된 후에 공약을 꼭 지키라는 것보다는 국민대통합 차원에서 해야 할 일이 바로 대통령이 할 일인까 거기서는 이행을 해주는 그런 책무를 가져야 한다, 이렇게 보는 거.
▶ 아버지로서 장준하 선생은 어떤 분?
- 그런 질문을 가끔 받는데 저는 장준하 선생님, 아버지로서는
▶ 점수를 후하게 못 줄 듯. 같이 하는 시간이 별로 없었잖아요.
- 별로 없었고. 제가 연세대 시험을 쳤을 때 교수님하고 앉아서 인터뷰를 하는데 교수님들이 다 아버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해서 사회인으로서 존경을 할 분이라고 하는데 아버지로서는 빵점입니다, 라고. 저는 그렇습니다. 장준하라는 인물은 자신보다 자신의 가족보다 항상 나라와 백성을 먼저 생각하시는 그런 민족의 스승이고 지도자가 아니었느냐.
▶ 장준하 선생이 돌아가신 뒤 말레이시아로 탈출 계기가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테러를 당한 뒤였다고. 그 이후에도 계속 위협을 느끼고 살아오셨는지.
- 장 선생님이 살아계실 때도 집안은 그랬지만 돌아가시고 난 후에도 저희 가족이 상당히 제제를 많이 받았어요. 그리고 더구나 저는 장 선생님과 유신 시절에 항상 심부름하고 재야인사들과 학생들과 교류를 많이 하고 심부름을 많이 하다보니까 제제와 감시가 굉장히 심했죠. 그러던 와중에 1975년 1년이 채 되지 않은 4월 19일 날 저녁에 테러를 당하게 됩니다. 4월 19일 저녁이었으니까. 테러를 당해서 장장 8시간의 대수술을 받고 턱뼈가 8조각으로 부서졌죠. 중상이었죠. 3개월 입원. 대수술을 받고 물리치료를 3개월, 총 6개월에 걸쳐서 치료를 했죠. 그리고 나서 제가 살아야겠다, 내가 앞으로 일을 하기 위해서 살아남아야 하지 않겠나, 이런 생각에 말레이시아로 나가게 됐죠.
▶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 한 적이 없어요. 왜냐면 장준하라는 분이 그 분의 삶이 어떤 삶이고 이 나라를 위해서 어떤 일을 해야 한다고 숙명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분이고 또 그 분이 그걸 선택하신 분이고 그렇기 때문에 14살 때 대한민국 지도를 옆에 두고 결혼식까지 했으니까 그리고 독립운동 하겠다고 목숨을 걸고 한 분이니까. 그 분의 삶이 그렇다고 하다 보니까 나도 그 분의 자손으로서 이런 짐을 지고 가는 것이 나의 운명이나 숙명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원망이나 그런 생각은 해보지 않았죠.
▶ 20년 뒤 고국으로. 순간순간이 긴장에 순간이었을 듯.
- 힘든 건 사실 죽음의 문턱까지 간 적이 참 많죠. 상상을 초월한 힘든 세월을 보냈죠. 그렇지만 물리적으로 현실적으로 힘든 건 그건 감내를 할 수 있었어요. 그건 충분히 할 수 있었습니다. 단지 하나, 장 선생님이 이루고자했던 그 뜻을 내가 대한민국에서 하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자격지심아닌 자격지심, 현실 도피했다는 그런 압박감? 그런 것 때문에 심적으로 고통이 있었던 것, 그것이 저를 괴롭혔죠.
▶ 지난 대선에서는 안 교수 지지?
- 그건 세간에 그렇게 얘기하는데 사실 지난 대선 기간에 제가 전국을 다니면서 강연을 많이 했습니다. 왜? 장준하 선생님의 사인 때문에. 그것 때문에 역사 강의를 많이 했죠. 그런 와중에 대선과 맞물리다보니까 안철수 씨 얘기를 많이 하게 됐는데 저는 모 언론에서 안철수 개인을 지지한 적 없다. 안재인, 문철수를 지지한다. 즉 그것은 박근혜 씨와 대칭되는 세력은 내가 지지할 수밖에 없다, 야권진영을 지지한다고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박근혜 씨야 어쩔 수 없이 저는 태생적으로 숙명적으로 저의 모든 과거로 봤을 때는 제가 아직 인정을 하지 못하는 그런 부류들에 둘러싸여 있으니까 절대적으로 야권 쪽에 지지할 수밖에 없는 거죠.
▶ 언젠가는 진실 된 화해, 이해 그런 순간이 올 수 있겠죠?
- 저는 그렇습니다. 이번에 박 당선인이 대통령이 돼서 어떻게 이 나라를 국정을 운영할지 상당히 궁금합니다. 제가 아직까지도 믿지 못하는 것은 그 박근혜 당선인을 애워싸고 있는 부류들이 과거 군사 독재 세력들, 전두환을 비롯한 잔재같은 세력들이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과연 박 당선인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 그들로부터 자유롭게 대통령 박근혜 정치를 할 수 있을까, 그것이 상당히 부정적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우려를 많이 하고 있죠.
▶ 오늘 감사드립니다.
-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