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번째 무료강의 시작 ⇛ 우리나라 치외법권은 언제부터 시작하였나와 애로호사건에 대하여 설명
2021.01.07 황효상
글쓰기: 47번째 무료강의 시작 ⇛ 우리나라 치외법권은 언제부터 시작하였나와 애로호사건에 대하여 설명

■ 전체 제목: 사업과 직장을 위한 교양과 역사
■ 47번째 주 내용: 우리나라 치외법권(治外法權)은 언제부터 시작하였나와 애로호사건에 대하여 설명
■ 일자: 경자년(庚子年) 단기 4353년 서기 2021.1.7.목요일.(음력 11.24.)
≪ 신축년(辛丑年)은 2월 12일부터 즉 설날부터 시작합니다. ≫
■ 장소=등재한 곳: 천지인(天地人)방 http://blog.naver.com/hhs0203 에 올려놓았음.
■ 강의자(講義者): 황효상(黃孝相) 호(號) 심조불산(心操彿山)


47번째 무료강의 글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오직 배움의 길로 용기를 가지고 도전하는 자가 실패를 딛고 승리할 수가 있다고 봅니다.

여러분께서 사업과 직장에 초석이 되고 밑바탕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저의 무료강의는 1마당에서 13마당으로 되어있습니다.
매주 목요일 무료강의를 올리겠습니다.
정정당당한 미래를 위해 우리 젊은 후손들에게 대홍익역사(大弘益歷史)배움터와 천지학당(天地學闛)터를 만들어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힘찬하루 보내세요.


제10마당 설명 중 47번째 무료강의 시작


◐ 우리나라 치외법권(治外法權)은 언제부터 시작하였나와 애로호사건에 대하여

▣ 조선 26대 고종 때 운요호=운양호사건(雲揚號事件)과 치외법권(治外法權)에 대하여.
나라를 이어가고 나라가 잃게 되는 것은 국가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정신에 달려있다.
즉 그 나라를 경영하는 사람들이 진정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즉 백성과 더불어 같이 살려고 생각하는 좋은 안을 내 놓을 때 나라는 국제정세와 맞물려 살아가는 방안과 대책이 방책(方策)이 나온다고 봅니다.
새롭게 닥아오는 서구세력에 순발력 있게 대응하지 못하는 것은 다 역사를 더 소중하게 여기고 그 역사 속에는 훌륭한 스승과 좋은 계책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역사의 소중함을 안다면 각 나라의 역사를 배우고 알므로 해서 비교 평가를 할 수가 있어서 대책을 방책을 찾아 낼 수가 있다고 봅니다.

역사 속에는 모든 학문이 다 들어있다. 또한 모략과 모함과 비결들이 다 들어있다.
선인께서 물려주신 훌륭한 역사를 서로 연구하여 나라를 힘차게 이어가도록 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1863년부터 시작한 고종시대에 결국 역사는 19세기 후반기 구미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받은 1866년의 프랑스의 내침인 병인양요(丙寅洋擾)와 1871년의 미국의 내침인 신미양요(辛未洋擾)가 바로 이곳인 강화도에서 일어났습니다.

구미열강은 대원군의 강경한 쇄국정책(鎖國政策)에 부딪혀 실패하였지만 일본은 운양호사건의 결과로 무력적 위협과 함대시위로 즉 운양호사건의 그 다음해 1876년 2월 26일 한일수호조규(韓日修好條規) 즉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또는 병자수호조약(丙子修護條約) 곧 병자망국조약(兵子亡國條約)을 체결하게 되어 무력을 앞세운 왜놈에게 우리나라가 불리한 조약이 되어 망국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 체결의 중요한 내용은
일본과 구미열강들의 자국민의 범죄행위에 대하여는 우리나라에서 곧 우리나라의 백성의 보호는 뒷전으로 밀리고 치외법권(治外法權)을 허용하고 말았다.
지금이라도 우리나라의 백성을 더 소중하게 여긴다면 앞으로는 나라와의 체결은 반드시 심사숙고 하여 우리나라 백성이 더 소중한 쪽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즉 우리나라에서 범죄행위를 하였을 때는 반드시 우리나라법 등을 적용하는 방향으로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힘이 나올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나라의 역사를 알 때 나오는 것이라고 봅니다. 곧 주요한 사건에서 국방력에 밀리지 않을 경우에는 나라를 지탱하는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운양호사건은 치외법권뿐만아니라 근대 제국주의적 영토팽창주의정책을 추구하고 있는 일본의 한반도 침략전쟁의 발단이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가 큰 것이다.


➜ 운요호사건=운양호사건(雲揚號事件)으로 치외법권(治外法權) 허용에 대하여
역사는 대만정벌(1874년)이 먼저 일어나고 만주사변(1931년)이 일어났다.
세계1차대전 전에 일본이 류큐섬(제주도 남쪽)을 대만정벌로 일본의 오키나와섬으로 넘어가게 된 역사와 그 후 2차세계대전 전에 만행을 저지른 만주사변(신의주 북쪽)이 일어났다.

역사는 일본이 1874년에 대만정벌을 하고난 뒤 그 다음해인 1875년에 우리나라에서 운양호사건이 일어나 치외법권 이라는 것이 일어났다.
1875년(조선 26대 고종 12년) 9월 20일 운요호=운양호(雲揚號: 일본군함을 말함)가 강화도해협을 불법으로 침입함에 발생한 한일간의 포격사건이다.

1875년 이때는 일본 122대 명치천황(明治天皇) 8년이며 청나라 11대 광서제(光緖帝) 원년이다.
청나라 9대 함풍제의 황후가 된 서태후(西太后)는 함풍제가 별세하자 10대 11대 청나라를 섭정을 했으며 11대 광서제 때 청일전쟁(1894년 즉 광서제 20년)으로 청나라 함대사령관 정여창(丁汝昌)은 일본함대에 항복하였다.
서태후(西太后)는 청일전쟁에 써야할 자금을 빼돌려 거대한 인공호수 이화원(頤和園)을 만들었다. 이에 일본이 청일전쟁에 승리하고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12대 황제 선통제(宣統帝)는 3살짜리로 앉혔으나 결국 닥아오는 서구세력에 순발력 있게 대응하지 못하고 중국 3대악녀=3대여장부(여태후, 측천무후, 서태후) 중의 한사람인 서태후의 죽음과 함께 청조(淸朝)도 함께 몰락을 하였다.

메이지유신 즉 명치유신(明治維新: 막부체제를 무너뜨리고 일본 122대 명치천황의 관주도의 근대화정치)을 일으켜 근대화한 일본은 대륙침략을 위한 첫 조치로 정한론(征韓論: 조선 한국정복 계략)을 수립하여 한반도 침략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점진적 정한론(征韓論)을 내세우면서 급진파를 견제하여 조선정벌을 보류하고 호전적 무사계급의 불만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1874년(고종 11년) 5월 대만정벌을 단행하였다.
청나라는 일본에 군국적 침략정벌을 당하여 장차 대만정벌과 같이 한국정벌을 단행할 것 이라고 전망하면서 일본의 한반도 침략을 경고한 자문(咨文)을 조선정부에 보냈다.
≪ 1874년 대만정벌(臺灣征伐)에 대하여는 즉 대만 북동쪽에 소재한 류큐섬=류큐왕국=오키나와섬이 일본으로 넘어가게 된 사건은 아래에 별도로 설명을 올리겠습니다. ≫

자문(咨文: 중국과의 공식적인 외교문서)의 주요 내용은
일본이 5,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대만정벌을 수행한 뒤 나가사키(대마도 남쪽이며 원자폭탄을 2번째 맞은 곳)에 주둔중이며 장차 조선을 정벌하려 한다.
프랑스, 미국도 조선과의 관계가 미해결상태(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로 있기 때문에 조선이 서둘러 프랑스, 미국과 통상관계를 체결한다면 일본은 고립되어 감히 동병(動兵)하지 못할 것이고 따라서 한반도의 안보가 보장된다.
이에 조선정부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1873년 12월부터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면서 민씨 척족세력이 집권하기 시작하자 쇄국정책의 당사자인 대원군일파 등을 파면하고 대원군은 하야(下野)하였다.

이에 즉각적으로 일본은 본국정부에 대원군 실각으로 일본의 대한교섭이 유리해졌다는 사실을 보고하였다.
이에 일본정부는 모리야마[삼산무(森山茂)]를 조선의 현 실정을 탐지하기 위하여 급거 부산에 파견하였다.
이에 일본정부에 보고하기를
조선은 일본이 대만정벌소식을 듣고 어찌할 줄 모른다. 그러므로 다소의 위력을 보임이 좋겠다. 라고 강경방침을 건의하였다.
운양호사건 즉 운요호사건이 일어나기 7개월 전에 즉 1875년 2월에 모리야마는 부산에 이사관으로 재차 부임하였다.

이해 4월 15일에 일본정부에 보고하기를
■ 첫째 조선은 지금 내홍(內訌: 내정이 어지럽고)이 심하고 만약 대원군이 재 득세하면 또다시 쇄국정책이 강화될 것이므로 다시 세력을 만회하기 전에 무력을 사용하면 조선개항은 성취될 수 있다.
■ 둘째 일본군함 1~2척을 파견하여 해로(海路)를 탐측하면서 무력시위를 벌이면 일본이 대한교섭에 유리한 권리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 외무성 데라시마는 연안측량을 빙자하여 군함을 조선근해에 출동을 하여 위협함이 국면타개의 최선책 이라는 모리야마의 대한강경책을 받아들여 마침내 해군성과 협의로 군함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일본은 1875년 5월초 운요호 즉 운양호(雲揚號)와 제이정묘호(第二丁卯號) 등 2척을 부산에 파견하면서 조선국 해로를 연구하기 위한 회항 이라는 구실로 군함출동을 단행하였다.
심지어 이노우에 함장은 6월 14일 조선측의 항의를 무시하고 현석운 등 조선관리를 운양호에 승선시키고 일본군함 2척의 합동발포연습을 관람하게 함으로써 일본의 대한포함외교정책을 강행할 것임을 과시하였다.
그뿐만아니라 운요호=운양호(雲揚號)는 조선 동해안으로 북상 영흥만까지 순항하면서 무력적 시위를 벌였다.
드디어 1875년 9월 20일에 서해 강화도 남동방 난지도(蘭芝島)에 정박하여 조선수비병과 격전이 벌여졌다.

일본은 초지진(草芝鎭)과 제물포의 영종진(永宗鎭)에 보복포격을 하여 이에 우리나라 는 근대식 대포와 소총을 후대한 일본을 대적할 수 없어서 패주하였다.
운양호사건은 근대 제국주의적 영토팽창주의정책을 추구하고 있는 일본의 한반도 침략 전쟁의 발단이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가 큰 것이다.
운양호의 강화해협침입 그 자체가 영토침략 또는 주권침해 행위이기 때문이다.
강화해협은 역사적으로 조선의 국방안보상 가장 중요한 보장지중지(保障之重地)의 해상관문이다.

멀리 고려시대의 40년에 걸친 대몽항쟁(對蒙抗爭)을 벌인 군사적 근거지였고 병자전쟁(병자호란) 때에는 최후의 보루가 되었던 곳이다.
그러기에 강화도 전체가 요새화되어 외적의 침략에 대비 해오고 있었다.
특히 19세기 후반기 구미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받은 1866년의 프랑스의 내침인 병인양요(丙寅洋擾)와 1871년의 미국의 내침인 신미양요(辛未洋擾)가 바로 이곳인 강화도이다.

구미열강은 대원군의 강경한 쇄국정책에 부딪혀 실패하였지만 일본은 운양호사건의 결과로 무력적 위협과 함대시위로 즉 운양호사건의 그 다음해 1876년 2월 26일 한일수호조규(韓日修好條規) 즉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또는 병자수호조약(丙子修護條約)=병자망국조약(兵子亡國條約)을 체결하는 길을 열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하여 모든 체결조건은 우리나라에 불리하게 되었으며 그 후의 구미열강과의 체결도 모두가 우리나라가 불리하게 되었으며 임진전쟁(임진왜란) 후 또다시 역사와 국사를 올바르게 대치하지 못하고 나라를 잃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 아아 역사의 소중함을 알았다면 그리고 국방력을 강화시켰다면 청일전쟁(1894.7월)도 않일어났을 것이며 민비시해사건(1895.8월)도 않일어났을 것이며 갑오경장=일본의 미친개혁(1894년~1896년)도 않일어났을 것이며 러일전쟁(1904.2월)도 않일어났을 것이며 독도도 왜놈에게 강탈당하지 않았을 것(1905.2월)이며 을사늑약(1905.11월)도 않일어났을 것이며 나아가 나라도 매국당하지 않했을 것(1910.8월)이다. ≫

즉 병자수호조약(丙子修護條約)=병자망국조약(兵子亡國條約) 체결의 중요한 내용은
일본과 구미열강의 자국민의 범죄행위에 대하여 우리나라에서 곧 우리나라의 백성의 보호는 뒷전으로 밀리고 치외법권(治外法權)을 허용하고 말았다.
지금이라도 우리나라의 백성을 더 소중하게 여긴다면 앞으로는 나라와의 체결은 반드시 심사숙고 하여 우리나라 백성이 더 소중한 쪽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즉 우리나라에서 범죄 행위를 하였을 때는 반드시 우리나라법 등을 적용하는 방향으로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힘이 나올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나라의 역사를 알 때 나오는 것이라고 봅니다.
아아 역사의 소중함이여 아아 역사 속에는 만법이 다 들어 있다는 것을 과연 누가 알고 있는지 아아 나의 역사여 .....

일본의 신군함인 운요호=운양호인 운양호사건(雲揚號事件)으로 조선은 안동김씨 60년의 세도 정치로 왕권은 극도로 약화시켰으며 그것은 곧 사회의 혼란과 불안으로 이어졌으며 일본과 서구열강들은 조선을 압박해 오고 있었다.
그리고 대한제국은 26대 고종(高宗)이 12세로 즉위 하였으며 마지막 27대 순종(純宗)은 고종과 명성황후 민씨의 장남으로 1907년 7월에 일제의 강요와 일부 친일정객의 모략으로 고종은 왕위를 내놓게 되고 그의 아들 순종이 조선의 마지막 27대이며 대한제국의 제2대 황제로 즉위 하였다.

그러나 이 운요호사건=운양호사건으로 나라의 모든 체결조건을 불리하게 하여 결국에는 나라를 잃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결국에는 나라를 잃게 된 것에 대하여 대책을 세우지 못한 것은 국가를 움직이는 임금과 중신들의 책임이 더 크다고 봅니다.
곧 청일전쟁(1894년이며 고종 31년)이 일어나기 19년 전에 일본은 신무기를 개발하여 신군함으로 무장하여 운양호 라는 군함으로 1875년(조선 26대 고종 12년) 9월 20일 강화도에 쳐들어왔다.

그러나 조선은 인조반정 이후 청나라에 항복하여 군신관계를 맺고 군사력을 키우지 못하였으며 더군다나 유학이 목적한 진정한 학문을 이루지 못하고 나라 안에서 예송문제나 가지고 목숨을 걸고 싸우는 행동으로 즉 상복을 입는 기간으로 당파싸움이나 하다가 나라를 위태롭게 하였다.
진작 나라의 중요함은 역사교육과 군사력을 키우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조선 말기에는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유학의 진정한 뜻을 살리지 못하고 즉 유학이란 사서삼경을 배워서 내실을 즉 나라를 튼튼히 하여 치국평천하를 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수신을 하라고 하였는데 나라를 팔아먹는 지경에까지 왔으니 실로 어떠한 수신을 하였는지 중요한 군사력을 자력으로 키우지 못하고 나라를 매국하도록 하였는지 그 책임은 역사에 영구히 임금과 중신들에게 물어야 한다고 봅니다.

곧 이로 인하여 나라가 결국에는 매국하는 자가 나오게 되어 나라는 처참한 길로 들어서는 원인이 되었다.
저 청나라도 말기에 새롭게 닥아오는 서구세력에 순발력 있게 대응하지 못하고 아편전쟁으로 홍콩을 영국에 넘겨주고 애로호사건으로 청나라도 국가 체결에 있어 불리한 조건으로 멸망하는 원인이 되었다.
곧 영국이 청나라를 침략하여 문호를 개방한 사건이 바로 애로호사건이다.
이 애로호사건은 운양호사건이 터지기 19년 전에 일어났다.

1874년 일본이 대만정벌을 하고 1년 후인 우리나라에서 치외법권(治外法權)이 일어난 1875년에 일으킨 운양호사건은 일본은 영국이 일으킨 애로호사건(애로호사건 후 제2차 아편전쟁을 일으킴)을 그대로 재현하여 즉 일본은 영국이 애로호사건을 일으킨 것을 그대로 배워 이에 일본은 일본함대인 운요호=운양호를 우리나라 강화도 해협을 포격하여 운양호사건 그 다음해인 1876년에 무력에 밀려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였다. 곧 이 조약은 우리조선이 불리한 조건으로 체결을 하게 되어 즉 치외법권(治外法權)을 허용하여 자국민의 보호보다 외국인의 보호가 우선이 되어 나라는 자력의 힘을 잃고 멸망하는 원인이 시작되었다.

결국 일본의 운요호=운양호함대를 동원하여 강력한 교섭을 하게 되었다.
때는 1876년(조선 26대 고종 13년) 2월 27일 강화 연무당(鍊武堂)에서 전권대신 신헌(申櫶)과 일본은 특명전권관리대신 구로다 사이에 12조로 된 한일수호조규(韓日修好條規)를 체결하게 되었다. 즉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병자수호조약(丙子修護條約)=병자망국조약(兵子亡國條約)이 체결되었다.

◉ 한일수호조규(韓日修好條規) 즉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병자수호조약(丙子修護條約)=병자망국조약(兵子亡國條約)에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제1조는 조선과 청나라와의 관계를 약화시키려는 의도로 평가되어있다.
■ 제5조는 원산과 인천을 개항하게 함으로써 통상업무 이외에 정치적 군사적 침략의도가 내포된 것이었다.
■ 제7조는 조선연안 측량권을 얻음으로써 군사작전 시 상륙지점을 정탐하게 하였다.
■ 제10조는 치외법권(治外法權)을 인정한 불평등조약이 생기게 되었다.


▣ 영국과 청국사이에 생긴 애로호사건이란?
1856년(조선으로는 25대 철종 7년)에 청(淸)나라의 소유이나 영국 해적선 애로호가 항해하던 중 청나라의 관원에게 승무원 전원을 체포하고 영국국기를 바다에 던졌다는 사건으로 영국은 국기 모욕구실로 배상금과 사과문을 내라고 하였다.
청나라는 당시 배안에는 영국선원은 한 사람도 없었으므로 배상과 사과 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이에 1857년에 영국은 프랑스와 연합군을 구성하여 청나라를 침략하였다.
결국 저 청나라도 말기에 새롭게 닥아오는 서구세력에 순발력 있게 대응하지 못하고 1차아편전쟁(1차아편전쟁은 1840년 2차아편전쟁은 1856년)으로 홍콩을 영국에 넘겨주고 1차아편전쟁 15년 후 1856년에 애로호사건이 생긴 2년 후 청나라도 국가체결에 있어 불리한 조건으로 1858년에 천진(天津)을 즉 텐진을 점령하여 천진조약(天津條約)을 즉 텐진조약을 맺어 이에 청나라는 영국과 프랑스에 배상금을 지급하고 항구를 확대 개항하게 되어 멸망하는 원인이 되었다.

청나라는 결국에는 1856년 2차아편전쟁 후에 서태후(西太后)가 자기 아들을 죽이고 며느리를 자결하도록 만들고 섭정을 하다가 3살 된 아이를 청나라 마지막 12대 황제로 앉혔다 그가 바로 청나라 마지막 12대 황제인 선통제(宣統帝)라 하였다.
그러나 서태후가 죽자 청나라는 멸망하고 1911년에는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손문(孫文)을 임시대총통으로 중화민국(中華民國)이 탄생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세계1차대전의 결과는 독일이 1918년 11월 11일 항복을 하고 다음해인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일본은 세계2차대전을 일으켜 결국에는 자기 나라도 올바르게 다스리지 못하면서 즉 자기 백성을 인덕으로 다스리지 못하고 또 자기 나라의 경제공황을 벗어나려고 온갖 욕망을 채우려하다가 일본은 태평양 화와이에 소재한 진주만공격도 했으며 이집트의 카이로회담과 독일의 포츠담 회담에 무조건 항복을 거절함으로써 할 수 없이 미국은 초특급의 무기인 원자폭탄을 사용하게 되어 미국은 1945년 8월 6일 일본의 히로시마(대마도 동쪽)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1945.8.9. 일본의 장기(長崎: 나가사키: 대마도 남쪽)에 원자폭탄 재 투하함으로 인하여 일본은 무조건 항복하게 되었는 나라다.

즉 원자폭탄으로 일본은 20만명의 생명을 잃고 도시의 절반 이상을 잃게 되자 일본정부는 즉 124대 일본 만행천왕인 소화천왕(昭和天王)은 1945년 8월 15일 정오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몇 사람의 야욕으로 죄 없는 수 많은 젊은 청춘남녀들의 귀중한 생명과 재산을 잃고 세계전쟁은 막을 내렸다.
이에 우리나라는 36년의 역사를 찾은 광복절이 아니라 5천년 이상의 단군역사를 찾은 광복절을 맞이하게 되었다.
즉 5천년 이상의 단군역사를 찾은 8.15광복을 맞이하자 민족자주의식을 자극하여 단군을 건국시조(建國始祖)로 하는 단군기원(檀君紀元)의 사용이 국회에서 결의되고 단군을 국조(國祖)로 하는 국사교과서가 발간되었으며 단군이 나라를 세웠다는 10월 3일을 개천절(開天節)이라 하여 국경일로 정하게 되었다.

지금이라도 광복절의 이름을 5천년 이상의 단군역사를 찾은 광복절로 바꾸어야 한다.
즉 광복절의 이름을 빠른 시일 내에 서로 연구하여 바꾸도록 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서로 슬기를 발휘하여 나라를 힘차게 일어서도록 협력, 합심합시다.

결국 일본은 영국이 사용한 영국 해적선 애로호사건(1856년)을 배워 20년 후에 일본의 운요호=운양호의 함대를 앞세워 우리나라에 무력으로 사건을 일으킨 것이 바로 운양호사건(雲揚號事件: 1875년)이며 이 사건으로 우리나라가 불리하게 체결하게 되어 즉 치외법권(治外法權)을 인정해주어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백성의 인권존중은 뒷전으로 밀리게 되어 조선나라를 잃게 되는 최초의 원인이 되었다.

나라의 힘은 곧 역사의 힘이며 곧 역사를 알 때 나라의 힘은 나오는 것이다.
곧 전쟁이 일어나면 싸워야 한다. 그러나 맨주먹으로 싸울 수는 없다.
사전에 군사력을 대비하지 않으면 나라는 처참하게 잃게 되어 많은 백성과 나라는 구렁텅이에 빠져 노예보다 더 못한 추악한 만행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역사다.
지금이라도 주요한 역사를 가르쳐 외우는 역사가 아니라 그 당시의 주요한 사건과 전쟁과 혁명과 조약 등에 대하여 원인과 과정과 결과, 대안, 대책, 방책 등을 연구하고 가르쳐야 한다.
이렇게 할 때 미래는 희망이 있으며 힘찬 나라를 후손에게 물려줄 수가 있다고 봅니다.

다시 말한다면 유학의 근간(根幹)은 수신(修身)이다. 이 수신은 여러방면으로 해석을 하여야 한다.
조선시대의 수신은 출세지상주의로만 생각하여 사서삼경만 주요하게 여기고 진작 나라의 기둥뿌리가 되는 군사력과 역사와 기술분야의 학문은 등한시 하여 나라는 힘을 잃게 만들었다.
진정 나라를 운영하는 사람은 수신을 하데 자기 자신부터 알고 난후 나라의 수신 즉 나라를 지키고 나라를 키우는 군사력과 역사학문도 키우는 그러한 학문까지 간다면 나라는 오래도록 지켜나갈 것이라고 보는 바(所=事)입니다.

곧 고려 말 때에 단군세기(檀君世紀)와 태백진훈(太白眞訓)과 농상집요(農桑輯要)를 저술하신 호가 행촌(杏村)이신 이암(李嵒)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원한을 풀려면 먼저 남의 원한을 풀어주고
나의 병사(군사)를 제거할려면은 먼저 남의 병사(군사)를 제거하는 데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나라를 길게 다스리는 것이며 생민(生民: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오래도록 안전하게 하는 방책이다. 라고 말하였다.

이제라도 우리나라를 튼튼하게 키워나가기 위하여도 이러한 역사의 교훈의 이야기가 있는 것을 가르쳐야 하고 군사력을 키우기 위해 신무기를 만드는 것을 연구하는 것을 근본정책으로 하여야 한다.
그런데 어찌하여 언제까지 남의 나라에 매달려 있을려고 하는가!
빠른 시일 내에 우리의 자주, 자립을 키워 독자정책을 펼 수 있도록 슬기를 모아야 한다고 봅니다.

아래에 아편전쟁 1차, 2차와 대만정벌에 따른 류큐섬=오키나와 섬이 탄생하는 역사를 올리옵니다. [47번째 무료강의 종(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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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자책 2020.4.29. 발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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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층간소음 평생해소 할 수 있는 홍익방건축(弘益房建築) 특허를 받음. 고 수입과 서민들을 위한 층간소음을 해소할 수 있는 고품격의 아파트나 또 품위 있는 고급아파트 등을 짓고자 같이 사업하실분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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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단(正端)과 정도(正道)를 배우고 역사(歷史)를 배우면 유혹을 물리치고 악순환을 극복할 수 있다. 곧 방책을 세울 수가 있으며 대국가를 대사업을 일으킬 수가 있다. ♬

세계역사를 배우고 미래를 열기위하여 두바이에서 2020년을 잘 보내고 2021년를 위하여 축제를 올린 동영상을 올리오니 올해는 비리와 부정부패를 물리치고 정의와 진실이 살아 숨 쉬게 하는데 잘 처리하고 있으며 믿음이 가고 소신이 있는 윤석열검찰총장을 적극적으로 밀어주어 불의를 물리치고 나라를 올바르게 가게 하는 희망과 꿈을 새롭게 이루어봅시다.
≪ 두바이의 위치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아랍에미리트 나라에 있는 대무역의 도시입니다. 아랍에미리트 나라의 크기는 우리나라 제주도의 약 2배정도의 면적을 가진 나라입니다. 이곳 두바이에 있는 부르즈할리파 타워에서 축제행사의 동영상을 올리옵니다. ≫

경자년(庚子年) 단기(檀紀) 4353년 서기(西紀) 2021년 1월 7일 목요일.
≪ 신축년(辛丑年)은 2월 12일부터 즉 설날부터 시작합니다. ≫
홍익방건축(弘益房建築) 특허사업 대표이며 천지인방연구소(天地人龐硏究所) 소장
황효상(黃孝相) 호(號) 심조불산(心操彿山) 용사(庸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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