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지나간 날자에 주요한 사건들에 대하여 기록을 해놓았다면 모두가 역사가 된다.
그리고 모든 역사에는 그 당시의 배경들이 있다. 그러하므로 사건들이 일어난다.
오래동안의 장기집권을 한 박정희대통령이 서거(逝去)함으로서 1979년 12.12사태와 1980년 5.18폭동이 일어났다. 즉 10일간은 1980.5.18.~5.27.까지이다.
이러한 일들은 사람들이 여당과 야당의 편이 있는 이상은 어느누가 막아내지를 못한다.
그 당시의 배경으로 즉 그 당시 전두환과 김대중과의 정권쟁취사건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하면 과연 지금으로부터 38년 전에 일어난 5.18폭동에 대하여 그 당시 10일간에 일어난 사건들을 날자별로 주요한 것만 몇가지를 적어봅니다.
왜 5.18이 폭동이냐하면 시위로 끝난 것이 아니라 공공시설물을 파괴하고 무기를 탈취하는 일들이 벌어졌으므로 이는 폭동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봅니다. 실지로는 폭동보다 더 심한 무기를 탈취하여 대항했기 때문에 이는 반란군(叛亂羣)이라고 보아야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시위와 폭동과 반란군이 다 일어났으므로 전체적으로 폭동이라고 말하고자 합니다.
≪ 단 5.18폭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억울하게 죽은자에 대하여는 정당한 피해보상을 해주어야 하며 또 시위를 한 그 목적과 그 기백에 대하여는 살릴 것은 살리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한다고 봅니다. ≫
전체적으로 당시의 배경과 결말을 보면 5.16군사혁명을 기점으로 19년간 재위동안의 박정희대통령이 부마민주항쟁(1979.10.16.~20일까지)으로 시해 당함으로서 사회혼란과 나라안정을 위해 전두환은 1979년 12.12사건이후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에 1980년 5월 17일 계엄령을 확대실시하면서 김대중을 포함한 야당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광주에 공수부대를 투입시켜 10일 후인 5월 27일에 5.18폭동은 막을 내렸다.
지나간 역사에서 불행한 5.18폭동=광주폭동이 일어난 10일간의 사건들은 다음과 같다.
➜ 1980년 5월 18일
광주일원에 공수부대 투입.
시위대는 비상계엄 해제하라 시위함.
경찰은 격렬한 시위대 진압에 실패함.
파출소가 파괴됨. 치안 불능상태가 됨.
➜ 1980년 5월 19일
공수부대 광주 도착하여 진압군을 재편성함.
시위대 광주전역으로 확산되었으며 화염병으로 맞섬.
공수부대가 시위진압에 탱크를 동원함.
시위대 전두환 타도 외침.
시위대가 누문동파출소 점거와 임동파출소 방화로 전소됨.
시위대가 역전파출소 점거와 북구청사 유리파손 양동파출소 파괴.
공수부대 광주에 투입.
➜ 1980년 5월 20일
공수부대가 15만 군중에 포위당함.
도청으로 연결된 6개방면 도로에 시위대가 밀어닥침.
택시기사 시위 참여함.
계엄군 1명이 시위대 차량에 치여 사망함.
시위대가 소방서 점거함.
계림동 부근의 시위군중이 1만~3만명으로 증가함.
시위대가 MBC방송국 방화로 전소됨.
시위군중 광주시청 점령.
광주시청 공수부대와 1만여명 시위대와 대치함.
➜ 1980년 5월 21일
시위대가 광주세무서 방화함.
KBS방송국 방화함.
계엄사령부가 최초로 광주에서 유혈충돌 공식발표함.
시위대가 광주교도소 기습하고 자진 철수함.
시위대가 아세아자동차공장에 진입하여 대형버스 22대와 장갑차 3대와 군용트럭 33대 민간트럭 20대를 탈취하여 도청으로 진격함.
시위대가 10만명 이상 운집하여 전두환은 물러가라와 김대중 석방하라 등 구호외침.
헬리곱터 4대가 도청, 조선대, 전남대에 이착륙하고 계엄사령관 담화문 발표함.
금남로에 시민 30만명 가까이 육박함.
카토릭센터 앞에 때려잡자 전두환. 물러가라 최돼지. 사라져라 신현확. 비상계엄 해제하라. 칼부림이 웬말이냐. 너와 나 형제 지방색 배격 등의 구호를 벽보 부착함.
공수부대 최초의 기관총 등 집단발포로 시위대와 도로의 시민들이 쓰러짐.
시위대는 장갑차로 돌격하여 계엄군 쓰러짐.
시위대가 탈취한 버스로 화순에 도착하여 중앙파출소 방화와 무기 탈취함.
시위대가 카빈 300정으로 무장함.
시위대가 광산 하남파출소 카빈 9정 탈취함.
시위대가 함평군 신광지서에서 총기 100 여정 실탄 2박스 등을 탈취함.
군용헬리곱터와 경찰헬리곱터가 부상자와 중요문서 이송함.
시위대가 무기탈취를 위해 시외지역의 남평지서, 나주경찰서, 무안 현경면지서, 무안 청계면지서, 나주 금성동파출소 등을 습격함.
시위대가 비아, 영광, 나주, 영산포, 무안, 영암, 화순, 장성 등지의 무기고와 화약고에서 카빈 MI소총, 수루탄, 다이너마이트 등을 탈취하여 무장함.
시위대가 광주 효덕동파출소 무기 탈취함.
남평지서에서 무기를 탈취한 무장시위대가 광주은행 4거리에 도착함.
시위대가 화순에서 탈취한 무기를 학동에서 시민들에게 지급함.
시민 1,000 여명 무장하여 도청 앞에서 무장시민군이 계엄군과 총격전을 벌임.
시위대가 전남방직, 일신방직, 연초제조창 무기고 탈취함.
시위대가 화순광업소에서 차량 1대분의 다이너마이트를 싣고와서 국민은행 앞에 대기함.
광주역에서 시민군과 계엄군이 총격전을 벌임. 효천지역에서 시민군과 계엄군 교전함.
➜ 1980년 5월 22일
교도소 앞에서 시민군과 계엄군 교전함.
계엄군 중원병력 광주에 도착함.
뉴욕타임스와 르몽드가 처음으로 광주소식이 세계에 알려짐.
도청 앞에 5만 시민 궐기대회 개최함.
시위대가 영암 미암지서 무기고 습격함.
시위대가 영암, 월야 무기고 습격함.
계엄사령부는 광주사태에 대해 발표문 발표함.
무기회수를 둘러싼 시민군 내부 대립이 심화됨.
➜ 1980년 5월 23일
도청에 학생수습위원회 본부 설치함.
무기 100정 반납함.
목포역에서 시국 성토대회를 갖고 5만 여명이 횃불시위함.
➜ 1980년 5월 24일
광주시내 생필품 품절됨.
무기자진 반납시한을 12시까지 연장함.
계엄사 무기반납 시한을 18시까지 연장함.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 열림.
➜ 1980년 5월 25일
조작된 독침사건 발생.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 열림.
민주시민투쟁위원회 조직함. 위원장에 김종배 등 조직함.
➜ 1980년 5월 26일
외곽지역 주둔 계엄군 광주 진입함.
시민수습대책위 17명이 계엄군 진입현장에서 탱크 앞에 드러누워 계엄군의 시내 진입 저지함.
계엄군이 시내 진입을 알리는 방송을 함.
제4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 열림.
광주시장에게 9개항 요구함.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 열림.
➜ 1980년 5월 27일
시내의 전화가 끊기고 계엄군이 진입을 알리는 가두방송 함.
계엄군 광주 전격기습 함.
광주의 도청은 결국 함락됨.
계엄군분소장 담화 발포함.
5시 23분에 광주시가 계엄군에 완전 점령됨.
7시부터는 공무원 근무가 개시 됨.
상기와 같이 10일 동안에 일어난 희극이 아닌 비극의 연속극인 이것이 바로 1980년 5.18사건이다. 곧 이것이 바로 좋은 구호를 외치는 시위를 벗어난 공공시설을 파괴하고 무기를 탈취하여 정권쟁취를 위한 5.18민주항쟁이 아닌 5.18폭동이라고 보는 바(所=事)입니다.
진실된 역사를 알 때 대안, 대책, 방책이 나오게 되는 것이며 나라를 올바르게 이끌고 갈 수가 있다.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한지요.
앞으로 젊은 화랑도(花郞道)와 여랑도(女娘道)들이 나라를 이어가야 한다. 진실된 사건을 알아야 만이 대안, 대책, 방책이 나오는 것이다. 그 진실된 사실을 모르고 정책의 여론에 밀려 엉뚱한 곳에 끌려가게 되면 나라의 운명이 위험에 빠지게 된다.
만일에 공공시설을 파괴하고 무기를 탈취하여 5.18폭동을 일으킨 것을 헌법전문에 올린다면 이는 우리나라 백성의 올바른 가치관과 역사관과 미래관을 능멸하는 처사로 도저히 용서치 못하며 능지처참을 해야 된다고 봅니다.
곧 5.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을 폐기하여라. 젊은 화랑도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갈 올바른 법을 만들어라.
나라를 이어갈 화랑도(여랑도 포함)들이여 올바른 가치관을 만들어 나가는데 그대의 슬기를 기대합니다.
한기(桓紀) 9214년 신시개천=웅기(神市開天=雄紀) 5915년 정유년(丁酉年)
단기(檀紀) 4350년 서기(西紀) 2018년 2월 8일 목요일. (음력 12월 23일)
홍익방건축(弘益房建築) 특허사업 대표이며 천지인방연구소(天地人龐硏究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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