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대한 단군조선의 홍익역사(弘益歷史) 중에서 단군왕검시대에는 과연 무슨 업적이 있을까?
홍익역사(弘益歷史)인 단군조선의 역사는 한웅의 위대한 역사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곧 신시개천=배달개천=한웅개천 때 사용한 삼대경전과 모든 행사를 단군왕검이 이를 이어받아 나라를 열어갔다.
태백일사에서 홍익인간의 이념이 한웅에서 단군조선에 전하는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夫弘益人間者(부홍익인간자): 홍익인간이란 무릇 사람을 넓고 크게 이롭게 함이란?
天帝之所 以授桓雄也(천제지소 이수한웅야): 천제이신 한웅께서 주어진 바니
一神降衷 性通光明 在世理化 弘益人間者(일신강충 성통광명 재세이화 홍익인간자): 일신이 즉 한웅천왕이 참마음을 내려와 곧 일신강충과 성통광명과 재세이화와 홍익인간을
神市之所 以傳檀君朝鮮也(신시지소 이전단군조선야): 신시에서 즉 한웅천왕의 도읍인 백악산(白岳山) 지역인 신시(神市)에서 이를 즉 일신강충과 성통광명과 재세이화와 홍익인간을 단군조선에 전하는 바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문구는 세계역사에서 곧 세계경전에서 가장 위대한 글이며 가장 위대한 얼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홍익인간의 이념을 가진 홍익역사(弘益歷史) 중에서 1대 즉 초대 단군왕검(檀君王儉)과 2대 부루(扶屢)단군시대와 3대 가륵(嘉勒)단군시대와 그 외 주요한 단군시대에 대하여 위대한 업적의 말씀을 올리옵니다.
◐ 위대한 단군조선의 홍익역사 중에서 1대 단군이신 단군왕검(檀君王儉) 시대에 업적은 다음과 같다.
초대 단군왕검(檀君王儉)시대는 이집트 역사에서 BC 2650년에 파라오 즉 왕의 무덤인 피라미드를 만든 후 약 300년이 더 넘는 후의 역사이다. ≪ 피라미드의 크키는 축구장 2배보다 더 크게 지었다. ≫
단군왕검에 대하여 고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왕검은 아버지가 단웅(檀雄)이며 즉 한웅이며 어머니는 웅씨(熊氏)의 왕녀이다.
단군왕검의 탄생은 신묘년(BC 2370년) 5월 2일 인시에 밝달나무 밑에서 탄생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의 역사는 한웅의 마지막 제18대 거불단(居弗檀)한웅 혹은 단웅(檀雄)이라 하며 재위 48년간에 82세까지 사셨다. 곧 재위기간은 BC 2381년~BC 2334년이다. 이 마지막 한웅의 나라를 이어받은 단군왕검(檀君王儉)은 한웅시대의 모든 행사와 경전 즉 삼대경전인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을 이어받아 이 삼대경전을 압축하여 단군팔조교(檀君八條敎)를 만드셨다. 이 제4조에 헌신도 짝이 있다. 라고 말하고 있다. 현재도 이 문구를 사용하고 있다.
≪ 禽獸有雙 弊履有對(금수유쌍 폐리유대): 하늘을 나는 새와 땅을 다니는 짐승도 짝이 있고 다 떨어진 짚신도 즉 신발도 짝이 있느니라. ≫
그리고 부모, 하늘, 충성, 효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爾生惟親(이생유친): 너희가 태어남은 오로지 부모에 연유하였고
親降自天(친강자천): 부모는 하늘로부터 내려 오셨으니
惟敬爾親(유경이친): 오로지 너희 부모님을 공경하여 받들어 모시는 것이
乃克敬天(내극경천): 바로 하늘을 받들어 모시는 것이고
以及于邦(이급우방): 이로써 나라에까지 미치는 것이다.
國是乃忠孝(국시내충효): 국가를 바르게 하는 것이 바로 충성과 효도함 이니라.
그리고 각 업무임명(各 業務任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於是命 彭虞關土地(어시명 팽우관토지): 한웅(신시씨)의 옛 제도를 즉 모든 경전과 행사를 그대로 단군(檀君)이 이어받아 이에 임명하기를 팽우(彭虞)에게 땅을 개척하도록 하였고
成造起宮室(성조기궁실): 성조(成造)에게는 궁실을 짓게 하였으며
高矢主種稼(고시주종가): 고시(高矢)에게는 농사를 짓도록 주관하게 하였으며
臣智造書契(신지조서결): 신지(臣智)에게 명하여 글자를 만들게 하였으며
奇省設醫藥(기성설의약): 기성(奇省)에게는 의약을 베풀게 하고
那乙管版籍(나을관판적): 나을(那乙)에게는 호적을 관리하도록 하였으며
羲典卦筮(희전괘서): 희(羲)에게는 괘의 법전을 만들어 점치는 일을 관장케 하고
尤掌兵馬納(우장병마납): 우(尤)에게는 군대를 관장하게 하였다.
斐西岬河伯女爲后治蠶(비서갑하백녀위후치잠): 비서갑(菲西岬)의 하백녀(河伯女)를 황후로 삼고 누에치기를 다스리게 하니
淳厖之治熙治四表(순방지치희치사표): 순방의 다스림이 온 세상에 두루 미쳐 태평치세를 이루었다.
甲戌六十七年(갑술육십칠년): 갑술년이며 재위 67년에 즉 BC 2267년에
帝遣太子扶婁(제견태자부루): 단제이신 즉 초대 단군께서 태자 부루(扶婁)를 파견하여
與虞司空會于塗山(여우사공회우도산): 우(虞)나라 사공(司空)을 도산에서 만나게 하였다. 즉 사공인 우(禹)를 만나게 하였다.
太子傳五行治水之法(태자전오행치수지법): 태자인 부루(扶婁)는 오행치수의 방법을 전하여 주었고
勘定國界(감정국계): 나라의 경계도 따져서 정했으니
幽營二州屬我(유영이주속아): 유주(幽州)와 영주(營州)의 두 곳의 땅이 우리에게 속하였다.
► 유주(幽州=幽洲): 옛날 요임금의 12주의 하나이며 곧 유주는 삼국지에서 원소(袁紹)와 공손찬(公孫瓚: 후한 말기의 황건적을 무찌름) 등이 이곳에서 세력을 키워나간 곳이다. 즉 곡창지대인 기주(冀州)의 북동쪽에 있는 곳이며 요동 북쪽이 유주(幽洲)라는 곳이다.
► 영주(營州): 옛날 순임금의 청주 북동의 땅을 갈라 영주라 한다.
► 도당(陶唐): 요(堯)임금의 나라 이름이요.
► 유우(有虞): 순(舜)임금의 나라 이름이다.
於是區劃天下之地分統三韓(어시구획천하지지분통삼한): 이에 천하의 땅을 새로 정리하여 갈라서 삼한으로 나누어서 다스렸으니
三韓皆有五家六十四族(삼한개유오가육십사족): 삼한은 모두 5가 64족을 포함하였다.
是歲三月十五日(시세삼월십오일): 이 해 3월 15일에 즉 경자년(更子年)이며 재위 93년에 즉 BC 2241년 3월 15일에
帝崩于蓬亭(제붕우봉정): 단제이신 단군께서 봉정이라는 곳에서 붕어하시었다.
◉ 삼한(三韓)이란 단군왕검께서 삼한으로 나누어 삼한관경 즉 세 지역으로 나누어 관할하였다. 이는 바로 진한(辰韓)=진한조선, 번한(番韓)=번한조선, 마한(馬韓)=마한조선으로 나누어서 다스렸다. 이를 일러 즉 삼한 전부를 단군조선(檀君朝鮮)이라 하였느니라.
- 진한(辰韓)=진한조선(辰韓朝鮮)은 지금의 만주지역인 송화강(松花江)의 하르빈(하얼빈)이다. 즉 단군조선이 도읍한 곳으로서 아사달(阿斯達)이 그곳이다. 이곳에서 바로 단군왕검이 삼한 전체를 관할하였다.
- 번한(番韓)=번한조선(番韓朝鮮)은 요동지역인 지금 개평부(開平府) 동북 70리에 있는 곳이 탕지보(湯池堡)가 그곳이다.
≪ 역사에서 기록하고 있는 번한조선(番韓朝鮮)의 마지막 임금인 기준(奇準=箕準)이 즉위 하였다. 이때는 BC 221년인 진시황제 영정(嬴政)이 39살에 천하를 통일한 시기이다.
번한조선의 기준이 즉위한지 28년째인 정미년에 즉 BC 194년에 떠돌이 도적인 연(燕)나라 위만(衛滿)의 꼬임에 넘어가 마지막 번한은 즉 번한조선왕인 즉 우리나라의 단기고사(檀奇古史: 발해=대진국의 대조영이 만든 단군조선과 번한조선의 역사서)에서 말하고 있는 기자조선(奇子朝鮮)=번한조선(番韓朝鮮)의 마지막 임금인 기준(奇準=箕準)은 강탈당하여 쫓겨났다. 곧 요동에 있는 번한조선은 연나라의 위만에게 나라를 강탈당한 곳이 바로 번한조선이다.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사마천의 사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 후 역사는 무제는 BC 111년에 남월(南越: 베트남 북부지역)을 평정하고 사기 중 55권째 조선열전(朝鮮列傳)에서 기록하기를 BC 109년에는 단군조선 중 번한조선(番韓朝鮮)을 침공하였다. 즉 번한조선의 마지막 임금 기준(奇準)=기준(箕準)의 나라인 번한조선을 BC 194년에 빼앗은 위만(衛滿)이 번한조선(番韓朝鮮)=기자조선(奇子朝鮮)을 이어오다가 그의 손자 우거왕(右渠王)을 BC 109년에 침공하여 약 1년간 싸우다가 BC 108년에 우거왕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이때에 조선열전에 위사군(爲四郡)이라는 문구는 기록하였지만 낙랑(樂浪) 현도(玄菟) 진번(眞蕃) 임둔(臨屯)군을 두었다 라는 문구는 한마디도 없다. 이때 위사군은 번한조선의 지역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북부여기(北夫餘紀)에서는 이때에 북부여의 5대 단제이신 즉 단군=임금이신 고두막(高豆莫)단제=동명단제(東明檀帝)=동명왕(東明王)에게 연패(連敗)하여 물러났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곧 사마천 사기에서 번한조선이 존재하였다는 것을 증명을 해주고 있다.
다시 말하여 사마천의 사기 중 조선열전에서 사마천이 총평하기를 섭하(涉何)는 전송 나온 번한조선의 비왕(裨王)의 장수를 죽였으므로 해서 결국에는 조선의 장수를 업신여기므로 해서 싸움의 발단이 되었으며 누선장군 양복(楊僕)은 공적에 눈이 멀어 같이 협공을 못하고 혼자 먼저 공격을 하다가 어려움을 당하였고 그리고 서로 의심한 것이 도리어 실마리가 되어 병사를 많이 잃게 되어 후회하게 되었으며 좌장군 순체(荀彘)와 공로를 다투다가 모두가 처형을 당하였다. 양 장군은 즉 누선장군과 좌장군 모두 함께 치욕을 당하였으며 장군 누구도 제후에 봉해지지 못 하였느니라 라고 기록하고 있다. ≫
- 마한(馬韓)=마한조선(馬韓朝鮮)은 지금의 대동강(大同江)이다.
이러한 초대 단군왕검의 단군팔조교 등 업적들이 모두가 한웅시대의 홍익인간의 이념이 깃든 경전과 행사를 이어받아 나라를 열었다.
곧 단군왕검의 시대는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BC 2650년에 건설한 후 약 300년 후의 일이다.
상기의 글은 제가 현재 발간을 할려고 하는 본문에서 나오는 글입니다. 곧 발간을 마무리하는데 힘써보겠습니다.
桓紀 9213년 神市開天=雄紀 5914년 檀紀 4349년 丙申年(병신년) 西紀 2016년
10월 31일 월요일.
천지인방연구소(天地人龐硏究所) 삼라만상을 좋아하는 心操彿山(심조불산) 庸辭(용사)
* 나머지 자료와 참고문헌은 제 블로그(자료실 또는 홍보실) 첫 글인
천지인(天地人)방으로 http://blog.naver.com/hhs0203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