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째 장기 집권 중 재선에 도전했던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이 돌연 사임을 발표했다. 10일(현지시간) "대선을 재실시 할 것"이라고 밝힌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나온 소식이다.
지난 10월 대선 이후 '개표 조작 논란 항의 시위'가 이어진 가운데 지난 주말 군과 경찰이 대통령에게 등 돌리고 시위대 지지 대열에 합류한 데 따른 압박감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남미 진보 진영 정치 지도자들은 부당한 압력 가능성을 언급한 반면 미국에서는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부 장관이 "모랄레스 대통령 뿐 아니라 10월 대선 관련 정치인들이 전부 사퇴해야한다"고 나섰다.
모랄레스 대통령은 10일 오후 국영 볼리비아 TV 연설을 통해 "나는 지금 대통령직에서 물러난다"고 밝혔다. 그는 "더 이상의 충돌을 원하지 않는다.우리 사회주의운동당(MAS) 당원과 가족에 대한 거친 처사를 두고 볼 수 없으며, 국제 사회가 볼리비아 갈등의 진실을 알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날 헌법상 대통령 임시 승계 1순위인 알바로 가르시아 리네아 부통령도 사임했다고 현지 일간 라라손이 전했다. 다음 승계 순위는 아드리아나 살바티에라 아리아사 상원 의장이지만 그 역시 대통령과 같은 MAS 당 소속이라는 점에서 이미 사퇴 압박을 받고 있어 대통령 직 공석 가능성도 높아졌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부 장관은 10일(현지시간) "새로운 대선이 치러지기 전까지 10월 대선과 관련된 정치인과 고위 관료들이 전부 사퇴해야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사진 출처 = 트위터]
모랄레스 대통령은 "우리는 수백만의 더 큰 세력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선언했다. 모랄레스 대통령은 여러 차례 개헌을 통해 장기 집권 욕심을 드러내 비난을 받고 있지만, 그간 미국이 중앙정보국(CIA)등을 통해 멕시코와 중남미 등 정치에 개입해온 역사적 경험 탓에 이들 국가에서는 반미 감정이 적지 않다.한편 그의 사임 소식을 들은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부 장관은 10일 "새로운 대선이 치러지기 전까지 10월 대선과 관련된 정치인과 고위 관료들이 전부 사퇴해야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고 이날 로이터 통신이 전했다.
지난 8일(현지시간) 석방된 `남미 좌파의 아이콘` 룰라 다 시우바 브라질 전 대통령과,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 당선자,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멕시코 대통령. 남미 3대 대국인 이들은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의 결정을 일단 응원하는 반응을 10일 냈다. [사진 출처 = 트위터]
10월 아르헨티나 대선을 통해 이른바 '핑크 타이드(Pink Tide·중남미 진보 정권 집권 물결) 2.0'을 예고한 알베르토 페르난도 대통령 당선자는 같은 날 "볼리비아에서는 어떤 추방도 없이 민주적 선거가 이뤄져야 한다"면서 "볼리비아가 쿠데타 동참자들로부터 안전하길 바란다"고 트위터를 통해 밝혔다. 앞서 8일 석방된 '남미 좌파의 아이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전 브라질 대통령 역시 10일 트위터를 통해 "모랄레스 대통령이 사퇴하게 된 폭력적인 상황이 끝나야 한다"면서 사퇴 배경을 강조했다. 북미 멕시코에선 보수 우파의 89년 장기 집권을 끝내고 등장한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대통령이 같은 날 "볼리비아 폭력 사태를 막기 위해 사퇴를 결심한 모랄레스 대통령이 책임있는 결정을 했다"는 반응을 냈다.모랄레스 대통령의 사퇴 발표는 그가 4선 연임에 도전한 지난달 20일 대통령 선거 이후 3주 만이다. 대통령은 지난 10월 20일 대선 때 1위를 차지했지만, 개표 조작 논란 항의 시위가 불거지자 4대 정당과 직접 대화를 요구해왔다. 다만 대선 2위를 달린 야권 카를로스 메사 후보와 다른 정당들이 대화를 거부한 데 이어 지난 주말 경찰들이 시위에 가세하는 등 대통령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10일(현지시간) 수도 라파스 소재 시위 현장. [사진 출처 = EFE]
지난 9일 수도 라파스 소재 대통령궁·국회 경비 경찰 수십 명을 비롯해 타리자, 오루로, 베니 등 최소 7개 도시에서 경찰들이 모랄레스 대통령 퇴진 시위를 벌였다. 쿠리 칼데론 경찰청장이 등 돌린 데 앞서 군부 최고사령관인 윌리엄스 칼리만 장군은 "군은 시위대를 막지 않겠다"면서 "대통령이 사퇴해야 이번 대선 의혹 탓에 불거진 3주간의 시위가 사그라들 것"이라고 한 바 있다.지난 달 20일 대선 당시 재선에 도전한 모랄레스 대통령은 40%를 얻어 2위인 메사 후보보다 10%포인트 앞섰다며 결선 투표 없는 승리를 선언했지만, 석연치 않은 개표 과정 탓에 부정선거 논란이 부각되면서 3주째 거센 시위가 이어졌다. 투표 직후 중간개표 결과만 보면 1·2위 격차가 10%포인트 이내여서 12월 10일 결선투표가 유력한 상황이었지만 선거관리당국이 갑자기 개표 결과 공개를 중단한 후 24시간 만에 모랄레스 대통령이 2위보다 10%포인트이상 앞선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이에 메사 후보를 비롯한 야권이 반발했고, 미주기구(OAS)가 "선거 과정에서 투표 시스템에 여러가지 부정 행위와 정보 시스템 조작이 발견됐다"면서 "10월 선거 를 무효로 하고 새 선거 절차를 시작해야 한다"고 권고한 바 있다.
지난 2006년 1월 볼리비아 역사상 첫 원주민 대통령으로 집권한 좌파 모랄레스 대통령은 14년 만에 물러나게 됐다. 그는 코카잎을 재배하는 원주민 농민이었지만 토지 개혁과 천연가스 수입 재분배를 주장하면서 코차밤바 시위 등을 이끌었고, MAS당을 만들었다.
좌파 대통령인 모랄레스는 '반미(反美)·진보'를 내세운 남미 핑크타이드의 결실 '남미연합(Unasur·우나수르)'이 2008년 결성됐을 때 일조한 인물이다. 수년 동안 연 5%대 경제 성장 성과를 내기도 했다. 축구를 사랑한 그는 한 나라 대통령으로서는 전세계 처음으로 임기 중 선수로 데뷔하기도 했다. 2008년 당시 볼리비아의 2부 리그 볼리비아 축구 클럽인 클루브 리토랄과 계약을 맺고 선수로 뛰었었다.
다만 권력에 집착하면서 재임 기간 두 차례 개헌을 통해 대통령 단임제를 중임제로 바꾸고, 3선까지 집권이 가능하도록 바꿨다. 이후 2014년 3선에 성공한 뒤 4연임을 위한 헌법개정안을 발의했는데 이 개헌안이 2016년 국민투표에서 51 대 49로 부결되자 헌법재판소를 통해 연임 조항을 '위헌'으로 만들며 올해 10월 4선에 도전했었다.
[김인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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