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 수준의 고성능 반도체 장비를 들여와 기술력을 높이려던 중국의 '반도체 굴기' 계획이 미국의 직간접적 압박으로 무산됐다.
1대 당 가격이 미국 첨단 스텔스 전투기(F-35)의 두 배인 2000억원에 달하는 해당 장비는 삼성전자, 인텔, TSMC 등 극소수 반도체 기업만이 조달받고 있다.
7일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중국 국영기업이자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업체인 SMIC는 반도체 초미세 공정에서 필수 장비인 극자외선(EUV) 노광기를 네덜란드 장비업체인 ASML로부터 납품받기로 했다가 해당 거래가 최종 중단됐다.
EUV 노광장비는 반도체 제작의 핵심인 포토공정에서 극자외선 파장의 광원을 사용해 초미세 가공을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ASML이 글로벌 생산과 공급을 독점하고 있다.
세계 파운드리 점유율 1·2위인 대만의 TSMC와 한국의 삼성전자가 ASML을 상대로 고가의 EUV 노광기를 공급받아 초미세 기술 경쟁을 벌이고 있다.
SMIC는 TSMC, 삼성전자와 5년 이상 뒤처진 미세공정 기술 역량을 단축하고자 지난해 6월 ASML에 EUV 노광장비 1대를 주문하는 특단의 결정을 내렸다. 미·중 간 무역전쟁이 치열했던 당시에도 SMIC의 노광기 주문 소식은 실제 납품이 실현될 가능성을 두고 설왕설래가 있었지만, ASML은 내부 논의를 거쳐 최종 제작 공급을 결정했다.
그러나 ASML은 이번 거래로 인해 미국으로부터 불필요한 오해와 미래 사업 리스크를 살 수 있다며 최종 납품을 보류한 것으로 알려졌다.
ASML은 반도체 장비 부품의 약 20%를 미국 코네티컷주에 있는 자사공장에서 생산해 마이크론 등 미국 고객사에 납품 중이다.
지난해 매출에서 미국 시장이 차지한 비중은 16%로, 중국 업체와 첫 계약을 고수하다가 자칫 북미 시장을 통째로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다.
계약 불이행에 따른 손해배상 등 SMIC를 상대로 패널티를 감수하더라도 장비 납품을 포기하는 게 장기적으로 자사의 글로벌 사업에 유리하다는 판단을 한 셈이다.
이번 계약은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주시하고 있는 삼성전자와 TSMC 등 시장 경쟁자들에게도 초미의 관심사였다.
해당 장비가 실제 공급될 경우 SMIC가 자사의 해당 기술자들을 고임금에 통째로 빼낼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SMIC는 이미 지난 2017년 삼성전자의 반도체 인재인 양몽송 전 부사장과 TSMC의 최고위급 임원을 영입하는 데 성공한 바 있다.
[이재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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