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채무 불이행 위기 속에 '남미 빅2'이자 '이머징 마켓'으로 통하던 아르헨티나 경제가 주저 앉으면서 결국 외환시장 통제 조치가 나왔다. 이른바 '포퓰리즘의 여왕'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 전 대통령( 2007∼2015년)이 썼던 조치가 부활하면서 글로벌 투자자들의 위기감도 커지는 모양새다. 다만 국제통화기금(IMF)은 마우리시오 마크리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낸 특단의 조치를 일단 지원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1일(현지시간) 아르헨티나 마크리 정부는 외환시장 통제에 관한 전국 긴급 법령을 발표했다. 글로벌 신용평가사 스탠다드앤드푸어스(S&P)가 아르헨티나 국가 신용등급을 디폴트 수준으로 떨어트린지 이틀 만에 나온 조치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이번 외환통제 발표에 대해 "빠르게 악화되는 경제 위기를 막기 위한 마크리 정부의 마지막 수단"이라고 평가했다.
1일(현지시간) 아르헨티나 정부가 발표한 외환시장 통제에 관한 전국 긴급 법령.
긴급령에 따르면 아르헨티나 페소화 가치 방어를 위해 아르헨티나 중앙은행(BCNA)이 일시적(9월 2일~올해 12월31일)으로 민간, 특히 기업의 외화거래를 규제하는 특별 권한을 가지게 된다. 기업은 보유 목적으로 달러 등 외국 돈(외화)을 사들일 수 없고 외화 유출 행위도 할 수 없다. 기업들이 외환 시장에서 외화를 사서 해외로 보내려면 중앙은행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특히 수출 기업은 수출로 벌어들인 외화도 가지고 있을 수 없다. 수출 거래 대금으로 결제받은 외화는 결제 이후 5일 내 혹은 출항 허가를 받은 지 180일 안에 내다 팔아 페소화로 바꿔서 보유해야 한다고 EFE 통신이 이날 전했다.일반인인 개인도 한 달에 최대 1만 달러 범위 내에서만 외화를 거래하고 해외로 송금할 수 있다. 정부는 1일 발표한 법령문에서 "이번 조치는 외환 시장을 강력히 규제하는 전국 차원의 필수 긴급명령"이라면서 "나라 경제 활동과 기능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함과 동시에 일자리와 소비자들을 보호하려는 것"이라고 취지를 설명했다.
이번 조치는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 전 대통령 당시 외환 통제가 재등장했다는 점에서 글로벌 금융시장 투자자들의 불안을 키울만한 변수다. 앞서 전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 대통령은 포퓰리즘(대중 인기를 얻기 위해 선심성 정책을 남발하는 정치) 정책에 따른 재정 위기와 주 수출원이던 원자재의 국제 가격 폭락으로 경제가 위기를 맞자 외환 통제에 나선 바 있다. 하지만 이 통제 정책이 아르헨티나 경제 위기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외환 통제 탓에 암시장에서 달러 밀매가 늘어났고, 외환시장은 더 불안정해졌다. 2015년 환율(달러당 13.1페소)이 처음으로 두 자릿수가 됐고 2016년 소비자 물가 연간 상승률(40.3%)은 40%선을 넘어섰고 실업률은 10%를 향했다.
다만 이번 조치와 과거와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IMF의 지원이다. 마크리 정부가 외환시장 통제 긴급법령을 발표하자 몇 시간 만에 IMF는 이를 지원한다는 취지의 성명을 발표했다. IMF는 "우리는 아르헨티나와 570억 달러 규모 대기 협정(standby agreement·SBA)을 맺고 있으며, 정부의 조치에 따른 자본시장 흐름을 분석해 9월 15일 이후 아르헨티나 구제금융 스케쥴을 재평가할 것"이라고 밝혔다.
대기협정이란, 단기적으로 외환 시장 어려움을 겪는 IMF회원국이 IMF의 일정 금액을 특정 기간(1∼3년)동안 추가 협의절차없이 인출해 사용할 수 있도록 사전에 합의하는 제도다. 인포바에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지난달 말 새로 취임한 에르난 라쿤사 아르헨티나 재무부 장관은 "중앙은행을 중심으로 한 외환시장 특별 조치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 IMF와 대기협정 등을 논의 중"이라고 밝힌 바 있다.
아르헨티나 중앙은행(BCNA). [사진 출처 = 아르헨티나 인포바에 자료 사진]
마크리 정부의 이번 외환시장 통제 조치는 아르헨티나 경제의 절박한 상황을 그대로 보여준다. 특히 환율 방어의 최전선 역할을 하는 중앙은행이 진퇴양난에 빠졌다. 달러대비 페소화 가치가 60페소 선으로 바닥을 친 상황에서 중앙은행이 달러를 시장에 풀어 환 방어에 나섰지만 이런 과정에서 외환 보유고가 동날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중앙은행은 지난 달 아르헨티나 예비대선 때 포퓰리즘 진영 후보가 압승을 거둔 이후 페소화 가치가 추락하자 환 방어를 위해 한 주에 10억달러 이상을 시장에 풀어왔다. 앞서 8월 28일 수요일 이후 환 방어 때문에 10억 달러를 쏟아부었지만 신용 위험은 2005년 이후 최고 수준으로 폭등했다고 로이터통신이 1일 보도했다.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의 지불 준비금 660억달러 중 200억달러는 환 방어와 정부 부채 지불 용도인데, 페소화 가치가 바닥을 치면서 달러 표시 정부 부채 부담이 갈 수록 커지는 마당에 환 방어 용도로도 돈을 써야 하는 상황이다.
지난 달 29일 S&P는 아르헨티나 정부가 자국 페소화로 발행하는 장기국채 신용등급을 기존 'B-'에서 최악 등급인 'D(Default)'로 강등했다. 외국 돈(외화)으로 표시하는 장기 채권 신용등급을 기존 'B마이너스(-)'에서 'SD(Selective Default·선택적 디폴트)'로 낮춘다고 발표했다. SD는 정부가 전체 채무 중 일부를 갚지 못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최악의 상황인 'D(디폴트)'다음으로 낮은 단계다. S&P는 "아르헨티나 정부가 1010억 달러 규모의 채무 상환 지연 가능성을 언급했는데 우리 기준에 따르면 이는 '디폴트' 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앞서 28일 에르난 라쿤사 장관은 "우리나라 금융기관이 보유한 70억달러 규모 단기 국채 상환일을 연기하고, 500억 달러 규모 장기부채도 채무 만기를 재조정할 것"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김인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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