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베리아 조지 웨아, 그는 어떻게 빈민가 축구스타에서 대통령이 됐나?
1990년대 '흑표범'으로 불리던 세계적인 축구스타 조지 웨아(51세)가 라이베리아 대통령선거 결선투표에서 승리했습니다.
28일(현지시간) 로이터 등에 따르면 라이베리아 선거관리위원회는 지난 26일 실시한 결선투표 개표를 98.1%까지 진행한 결과, 조지 웨아가 61.5%의 지지율을 기록, 38.5%에 그친 조셉 보아카이 현 부통령에 승리를 거뒀다고 밝혔습니다.
인구 470만명의 서아프리카의 빈국 라이베리아는 이로써 장기독재와 쿠데타를 벗어나 73년 만에 처음으로 민주적 정권교체를 이루게 됐습니다.
웨아는 수도 몬로비아 외곽의 당사에서 지지자들에 감사를 전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지지자들 사이에서 '조지 왕'으로 불리는 웨아는 1966년 라이베리아 수도 몬로비아에서 태어나 할머니 손에 자랐습니다. 유년기를 보낸 클라라 타운은 늪지를 매립해 조성한 마을로 각종 질병에 그대로 노출돼 있는 몬로비아 내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 중 하나였습니다.
어린 웨아가 클라라 타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고 그는 운동을 선택했습니다. 10대 때 그는 라이베리아 클럽 팀에서 뛰었습니다. 경기를 마칠 때마다 10달러를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웨아의 삶은 21살 때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현재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아스널 감독을 맡고 있는 아르센 벵거의 눈에 띄어 유럽 무대로 진출하게 됐습니다.
웨아는 1995년 아프리카 선수로선 처음으로 피파 '올해의 선수'에 올랐고, 프랑스 풋볼지가 선정하는 발롱도르를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축구 선수로서 승승장구하는 와중에도 그는 조국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엔 친선대사로 활동하며 소년병 출신들을 위한 직업 교육을 지원했습니다. 축구협회 살림이 어렵다는 걸 알고 자국 대표팀이 월드컵 예산에 출전하도록 비용을 대기도 했습니다.
축구를 통해 국민적 영웅에 오른 웨아는 2005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변혁회의(CDC)를 결성하고 대통령 후보로 나섰습니다. 그러나 당시 설리프 현 대통령에 패배했습니다.
'철의 여인' 또는 '아프리카의 힐러리' 등으로 불리는 설리프 대통령은 아프리카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2011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입니다.
웨아는 다음 기회를 준비하며 절치부심했다. 그는 2007년 고교 졸업장을 받았고, 4년 뒤에는 플로리다 디브라이대에서 경영학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같은 해에 부통령으로 나섰다 또 다시 좌절을 맛봤지만 2014년에는 몽세라도 주의 상원의원에 당선됐습니다.
상원의원으로 활동하던 웨어는 지난 4월 두번째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지난 10월 치러진 1차 투표에서 38.4%의 득표율로, 28.8%의 보아카이 부통령을 눌렀지만 과반을 얻지 못해 이번 결선투표를 통해 승리를 확정지었습니다.
웨아는 유세를 벌이면서 서민들의 경제적 지위 향상을 약속했다. 또 일자리 창출, 인프라 확충, 교육 지원에 적극 나서겠다고 공약했습니다. 정치적으로 미숙해 국가 경영을 맡을 수 없다는 상대 측의 주장에 대해선 강하게 반박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라이베리아의 한 대통령으로 당선된 웨아는 "나는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축구 전설 중 한명으로 성공했다. 내가 실패할 것이라고 말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나를 '대장(Chief)'이라 부른다"며 자신감을 드러냈습니다.
1990년대 '흑표범'으로 불리던 세계적인 축구스타 조지 웨아(51세)가 라이베리아 대통령선거 결선투표에서 승리했습니다.
28일(현지시간) 로이터 등에 따르면 라이베리아 선거관리위원회는 지난 26일 실시한 결선투표 개표를 98.1%까지 진행한 결과, 조지 웨아가 61.5%의 지지율을 기록, 38.5%에 그친 조셉 보아카이 현 부통령에 승리를 거뒀다고 밝혔습니다.
인구 470만명의 서아프리카의 빈국 라이베리아는 이로써 장기독재와 쿠데타를 벗어나 73년 만에 처음으로 민주적 정권교체를 이루게 됐습니다.
웨아는 수도 몬로비아 외곽의 당사에서 지지자들에 감사를 전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지지자들 사이에서 '조지 왕'으로 불리는 웨아는 1966년 라이베리아 수도 몬로비아에서 태어나 할머니 손에 자랐습니다. 유년기를 보낸 클라라 타운은 늪지를 매립해 조성한 마을로 각종 질병에 그대로 노출돼 있는 몬로비아 내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 중 하나였습니다.
어린 웨아가 클라라 타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고 그는 운동을 선택했습니다. 10대 때 그는 라이베리아 클럽 팀에서 뛰었습니다. 경기를 마칠 때마다 10달러를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웨아의 삶은 21살 때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현재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아스널 감독을 맡고 있는 아르센 벵거의 눈에 띄어 유럽 무대로 진출하게 됐습니다.
웨아는 1995년 아프리카 선수로선 처음으로 피파 '올해의 선수'에 올랐고, 프랑스 풋볼지가 선정하는 발롱도르를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축구 선수로서 승승장구하는 와중에도 그는 조국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엔 친선대사로 활동하며 소년병 출신들을 위한 직업 교육을 지원했습니다. 축구협회 살림이 어렵다는 걸 알고 자국 대표팀이 월드컵 예산에 출전하도록 비용을 대기도 했습니다.
축구를 통해 국민적 영웅에 오른 웨아는 2005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변혁회의(CDC)를 결성하고 대통령 후보로 나섰습니다. 그러나 당시 설리프 현 대통령에 패배했습니다.
'철의 여인' 또는 '아프리카의 힐러리' 등으로 불리는 설리프 대통령은 아프리카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2011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입니다.
웨아는 다음 기회를 준비하며 절치부심했다. 그는 2007년 고교 졸업장을 받았고, 4년 뒤에는 플로리다 디브라이대에서 경영학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같은 해에 부통령으로 나섰다 또 다시 좌절을 맛봤지만 2014년에는 몽세라도 주의 상원의원에 당선됐습니다.
상원의원으로 활동하던 웨어는 지난 4월 두번째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지난 10월 치러진 1차 투표에서 38.4%의 득표율로, 28.8%의 보아카이 부통령을 눌렀지만 과반을 얻지 못해 이번 결선투표를 통해 승리를 확정지었습니다.
웨아는 유세를 벌이면서 서민들의 경제적 지위 향상을 약속했다. 또 일자리 창출, 인프라 확충, 교육 지원에 적극 나서겠다고 공약했습니다. 정치적으로 미숙해 국가 경영을 맡을 수 없다는 상대 측의 주장에 대해선 강하게 반박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라이베리아의 한 대통령으로 당선된 웨아는 "나는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축구 전설 중 한명으로 성공했다. 내가 실패할 것이라고 말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나를 '대장(Chief)'이라 부른다"며 자신감을 드러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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