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8일(현지시간) 뉴욕 JFK국제공항.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반이민 행정명령에 항의하는 수천명의 시위자들이 피켓을 들고 모여들면서 공항 진입로 일대가 아수라장이었다. '아메리칸 드림은 죽었다''무슬림 억압을 즉각 중단하라' 등의 구호가 난무했다. 시위자가 계속 늘자 공항 측은 공항 터미널과 연결되는 기차역 입구를 봉쇄하기도 했다.
뉴욕에 사는 이라크인 사라 아메르 씨는 친구들을 만나러 잠시 고국을 찾았다가 공항에서 발이 묶였다. 그는 뉴욕 집에 딸을 두고 왔다면서 "사람의 인생이 걸린 문제를 어떻게 하룻밤 새 바꿀 수 있는가"라고 격렬하게 항의했다.
항공기 탑승을 거절당한 매사추세츠공대(MIT) 재학생부터 수시간 째 공항에 갇혔다는 스탠퍼드대 대학원생까지 온라인에 여러 안타까운 사연이 속출했다. 행정명령에 포함된 무슬림 7개 국가 출신이면 적법한 미국체류 비자나 영주권을 갖고 있어도 피해를 봤다는 사례가 속속 올라왔다. 국제항공운송협회(IATA)는 회원사에 이메일을 보내 항공사 승무원도 이번 행정명령에 적용된다고 고지했다. 미국행 비행기의 승무원을 재배치해야할 판이다.
실리콘밸리는 가장 충격이 큰 모습이다. 실리콘밸리 성공 신화는 전 세계의 유능한 이민자 출신들이 한데 모여 경쟁하면서 만들어져 왔기 때문이다. 아이폰 신화를 만든 스티브 잡스가 시리아 이민계 2세라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구글, 애플, 페이스북, 아마존 등 실리콘밸리 주요 기업 최고경영자들은 즉각 성명을 내고 트럼프의 행정명령에 반발했다.
인도 출신의 구글 최고경영자(CEO) 순다르 피차이는 "화가 난다"면서 비자가 제한된 7개국 출신 직원들에게 서둘러 미국으로 돌아올 것을 명령했다. 미국 영주권이 있다고 하더라도 출국하지 말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이번 행정명령의 영향을 받는 구글 직원은 최소 187명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CEO는 "나는 독일, 오스트리아, 폴란드의 후손"이라며 "만약 이번 조치가 과거에 있었다면 나와 내 아내는 이 자리에 없었다"고 밝혔다. 넥플릭스의 리드 해스팅스 CEO는 "증오를 키우는 정책은 미국을 안전하게 만들지 못하고 위험을 증가시킬 것"이라고 지적했다.
문제는 트럼프의 고립주의 행보가 이슬람계뿐 아니라 미국 내 150만 한인사회에도 직접적인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김동석 시민참여센터 상임이사는 "트럼프의 무리한 공약들이 빠른 속도로 현실화되고 있다는게 놀랍고 공포스럽다"면서 "트럼프 정부가 우선 추방대상으로 분류한 이민자들 중 한인이 2만7000명에 달하는데 염려가 크다"고 말했다.
미국 내 전체 불법 체류자는 1100만명으로 추산되며 이 중 서류 미비 등으로 불체자로 분류된 한인은 최대 2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내 한인 7명 중 1명은 불법 신분인 셈이다. 이 중에는 오바마 전 행정부의 '불법체류 청소년 추방유예(DACA)' 조치에 따라 추방이 보류된 한인 청년 3만명 이상이 포함돼 있다. 이들은 대부분 어릴 때 부모 손에 이끌려 미국에 건너왔다가 합법적 체류의 지위를 잃은 젊은이들이다.
차주범 민권센터 선임컨설턴트는 "트럼프 취임 후 불안해 떠는 한인 이민자들의 문의전화가 2배로 늘었다"면서 "서류 미비자들이 불시에 추방당할 수 있다는건 이들에게 엄청난 시한폭탄"이라고 말했다. 영주권으로도 불안해 시민권을 신청하려는 한인들의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또 다른 문제는 H1-B 취업 비자의 축소 가능성이다. 백인 노동자층의 분노를 자극해 대통령에 당선된 트럼프는 이민자들이 미국인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고 판단해 H1 비자를 축소하겠다는 방침을 피력했다. 차 선임컨설턴트는 "안그래도 H1-B 비자 취득의 문호가 좁았는데 이게 더욱 축소된다면 한인 고급인력들의 미국 내 취업 기회가 더욱 줄어들 것"이라고 우려했다. 최근 실리콘밸리 유력 기업에 취업한 정모 씨는 "일단 취업은 했지만 신분이 불안하다"면서 "회사에서 프로세스를 밟아주고 있지만 시간이 걸릴 것 같고 일에 집중을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시민자유연맹(ACLU)과 국가이민법센터 등 시민단체들은 뉴욕 공항에서 억류된 이라크인들과 함께 백악관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은 트럼프 대통령의 반이민 정책에 대해 "이것은 우리의 모습이 아니다"고 우려했고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세계 질서를 뒤흔드는 트럼프의 정책에 유럽이 대항하자는 메시지를 보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테러에 맞서 아무리 단호하게 싸운다고해도 특정 출신 지역과 신념을 가진 이들 모두에게 혐의를 두는건 옳지 않다"고 강조했다.
에어비앤비의 브라이언 체스키 CEO는 그의 트위터에 "트럼프의 행정명령으로 미국 입국을 거부당한 사람들에게 무료로 숙박시설을 제공하겠다"고 밝혔고 스타벅스는 향후 5년간 난민 출신 1만명을 고용하겠다고 선언했다.
[뉴욕 = 황인혁 특파원 / 실리콘밸리 = 손재권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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