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유럽 중앙은행이 21년만에 정반대의 길을 간다. 전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2개의 거대경제권이 23년만에 처음으로 정반대 통화정책을 펼치는 대분기점(그레이트 다이버전스·great divergence)에 도달했다. 그 결과는 슈퍼달러의 시대로 이어질 것이다.”
자넷 옐런 미국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이 3일 연내 기준금리 인상을 또 한차례 기정사실화했다. 중앙은행의 양적 완화로 회생의 기틀을 마련한 미국 경제는 이제 금융 긴축의 단계로 본격 진입할 태세다.
반면 유럽은 마이너스 금리 추가 인하, 양적완화 기간연장 등 더 많은 유동성을 시장에 풀어 통화팽창에 나서는 공격적인 경기부양을 준비하고 있다. 디플레이션이란 망령을 떨쳐내기 위해 돈을 더 풀겠다는 것이다. 이때문에 달러값 강세기조가 한층 강화되는 가운데 유로 가치는 더 떨어지는 슈퍼달러 시대 개막이 본격화될 것이라는게 월가 전망이다.
유로화외에도 국제통화기금(IMF) 특별인출권(SDR) 통화바스켓에 포함된 중국 위안화, 추가양적완화 가능성이 높은 엔화 등 글로벌 기축 통화들이 모두 자국 통화가치 하락을 유도하면서 유로발 통화전쟁 전운도 고조되고 있다.
연준과 ECB간 ‘엇갈리는 통화정책’이라는 그레이트 다이버전스가 심화로 글로벌 금융시장 불확실성이 더욱 확산될 수 있다는 경고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그야말로 글로벌 금융시장이 시계 제로의 대혼란 상황으로 내몰릴 수 있다는 진단이다.
ECB는 3일 금융통화정책회의에서 지난해 9월 마이너스로 떨어뜨린 예금 금리를 추가로 인하할 게 확실시된다. 전문가들은 현재 -0.2%인 유로존 예금금리가 이번 통화정책회의에서 추가로 0.1~0.2%포인트 인하될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고 있다.
현행 1조1000억유로 규모로 내년 9월까지 시행되는 양적완화의 자산매입 프로그램 기한도 연장될 예정이다. 유로화 유동성 증대로 유로가치가 더욱 떨어지면 이와 대척점에 있는 미국 달러는 ‘슈퍼달러’로서의 위상을 더욱 키우게 된다.
이미 골드만삭스를 비롯한 월가 투자은행들은 유로화와 달러화 가치가 1대1로 동등해지는 유로·달러 패리티가 연내에 현실화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톰슨로이터에 따르면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보여주는 달러인덱스가 2일(현지시간) 장중 한 때 100.51까지 상승해 12년래 최고치를 경신했다. 내년중 미국 연준이 수차례 기준금리를 추가로 올리면 숨가쁜 달러랠리가 이어질 수도 있다.
커먼웰스 포린 익스체인지의 오머 에시너 선임 애널리스트는 “앞으로 몇년간 지속적이고 꾸준한 달러 강세가 예상된다”고 말했다.
달러값이 올랐다고는 하지만 현 달러화 수준은 2001년 정보기술(IT) 호황 때 보다 25% 낮고, 원조 수퍼달러 시대였던 1980년대 중반보다는 절반 수준이다. 추가 상승여력이 있다는 얘기다.
헤지펀드 등 투자자들이 달러를 집중 매집하고 있는 배경이다.
미국 경제의 펀더멘털이 견실하다는 상황도 장기 달러랠리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슈퍼달러 시대 개막을 앞두고 글로벌 유동성도 미국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미국의 양적완화 이후 신흥국 등으로 빠져나갔던 돈이 급속하게 미국으로 회귀하고 있다고 3일 보도했다. 시장에서 미국 금리인상 가능성을 반영하기 시작한 2014년 7월부터 올해 9월까지 미국에 유입된 자금은 총 2300억 달러에 이른다. 2009년부터 5년 반 동안 7500억 달러가 해외로 나간 점을 감안할 때 3분의 1이 미국으로 되돌아왔다는 얘기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천문학적 규모의 돈 살포에 나선 미국은 2011년 약달러 흐름을 주도했다. 2010년 유로당 1.2달러까지 올랐던 달러가치는 2011년 유로당 1.4달러선을 오르내리며 약달러의 달콤한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슈퍼달러의 귀환’에 대한 미국 경제계 시각은 엇갈린다.
재닛 옐런 연준 의장은 2일 “달러 강세가 미 경제 성장세를 저해하고 있다”며 내년부터 달러 강세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하지만 미 경제계 일각에선 수출이 미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6~18% 수준으로 크지 않은데다 저유가라는 이득을 취할 수 있어 ‘잃는 것보다 얻는게 많다’는 시각도 자리잡고 있다.
문제는 신흥국과 비 유로존이다. 낮은 금리의 미국 달러를 차입한 신흥국과 신흥국 기업들에게 2차 통화전쟁이 촉발하는 달러화 강세는 곧 부채폭탄을 뜻한다. 아울러 자국에 투자됐던 달러 자금이 밖으로 빠져나가는 자금 유출 속도가 한층 빨라질 수 있다.
아울러 ECB의 양적완화 확대로 인한 유로가치 하락은 비유로존 통화가치의 상대적 상승을 초래하기 때문에 이들 국가의 경기부양 시도에 찬물을 끼얹게 된다. 스웨덴의 중앙은행 총재는 크라운화가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절상될 경우 외환시장 개입도 주저하지 않는 등 모든 정책 수단을 동원하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고 실제로 올들어 3차례에 걸쳐 기준금리를 인하해 -0.35%로 떨어뜨렸다. 스위스 정부도 불안감을 느끼기는 마찬가지다. 스위스의 기준금리는 -0.75%로 세계 최저치지만 스위스프랑 가치는 지난 10월 중순 ECB가 추가 완화에 대한 의지를 내비친 이후 10월에만 8% 가량 절상됐다.
미국과 EU간 통화전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중국의 셈법도 복잡해질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지난달 30일 국제통화기금(IMF) 통화바스켓에 포함되면서 통화 위상을 제고했지만 인민은행이 위안화의 평가절하를 용인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한국 역시 예외가 아니다. 글로벌 투자은행 바클레이즈는 2일 보고서를 통해 “한국이 원화 약세 기조를 이어갈 것”이라며 “경상흑자의 해외 재투자가 계속되고 내년 1분기에 기준금리를 한차례 더 내릴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한국의 해외투자 증가는 원화를 팔고 외화를 사들이는 거래를 통해 원화 가치 하락으로 연결된다.
2011년 글로벌 베스트셀러가 된 ‘화폐전쟁’(Currency War)의 저자 짐 리카즈는 “자국 통화절하를 경쟁적으로 유도하는 통화정책의 결말은 글로벌 리세션”이라고 비판했다. 수출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통화가치를 떨어뜨리는 행동은 무역 파트너의 성장을 훔쳐가는 행동이라는 지적이다. 이는 국제 협력과 공조의 틀을 붕괴시키고 결국 전체의 파이를 쪼그라뜨리는 글로벌 침체를 낳을 것이라는게 짐 리카즈의 날선 경고다. BNY멜론은행의 닐 멜러 외환전략가는 “외환시장이 환율전쟁이라는 새로운 국면의 문턱에 서 있다”고 말했다.
[뉴욕 = 황인혁 특파원 / 서울 = 이지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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