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를 결심하고, 실행하는 과정에서도 37살 권혁의 성격이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선수 자신이 은퇴 시점을 결정하는 것도 축복 아닐까요. 저는 제가 가진 능력에 비해 많은 것을 누렸습니다. '은퇴하는 용기'를 낸 게, 내 현역 생활의 마지막 행운이었습니다."
프로야구 두산 베어스의 베테랑 투수 권혁은 그렇게 미련 없이 마운드를 떠났습니다.
은퇴 소식이 알려진 다음 날인 어제(9일) 권혁은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10월 초에 은퇴를 결심했다. 어깨 통증으로 더는 좋은 공을 던질 수 없었다"며 "두산 베어스는 내게 2년 동안 뛸 기회를 준 곳이다. 팀에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은퇴해야 할 때가 왔다고 판단했다. 후회 없이 던졌고, 미련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2002년 삼성 라이온즈에 1차 지명돼 프로 생활을 시작한 권혁은 19시즌 동안 마운드를 지켰습니다.
당연히 그라운드와의 이별은 쉽지 않았습니다.
권혁은 "후회도 없고, 미련도 남지 않았지만 공허한 느낌이 있다. 시원섭섭하다. 여러 감정이 교차하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권혁은 19년 동안 1군 무대에서 781경기에 등판해 58승 47패 32세이브 159홀드 평균자책점 3.79를 올렸습니다. 홀드 부문은 KBO리그 역대 2위입니다. 투수 중에 역대 5번째 많은 경기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그는 "투수의 모든 보직을 다 소화했다. 삼성 입단 초기에는 선발로 뛰었고, 이후에는 불펜으로 오래 뛰었다. 패전 처리도 해보고, 원포인트릴리프로 던져보기도 했다. 이후에 승리조, 마무리 투수로 뛰었다"며 "물론 행복하지 않은 날도 있었다. 경기가 안 풀리면 누구보다 괴로워했다. 그래도 선수 인생을 돌아보면 행복한 기억이 더 많았다. 나는 던지는 게 정말 좋았다. 정말 행복한 선수였다"고 말했습니다.
어려운 시기도 있었습니다.
삼성에서 오랫동안 필승도로 활약하던 권혁은 점점 팀 내 입지가 줄어드는 것을 확인한 뒤, 2015시즌을 앞두고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어 한화로 이적했습니다.
권혁은 "삼성은 내가 가장 오랫동안 몸담은 팀이다. 감사한 일도 정말 많다"며 "2015년에 삼성을 떠났지만, 삼성 팬과 구단을 향한 고마운 마음은 늘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한화 유니폼을 입은 뒤 권혁은 '불꽃 남자'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2015년 권혁은 78경기에 등판해 112이닝을 소화했습니다. 그해 성적은 9승 13패 17세이브 6홀드 평균자책점 4.98이었습니다.
불펜 투수로 너무 자주 등판하고, 많은 이닝을 소화하는 그를 보며 '혹사 논란'도 일었습니다.
권혁은 "물론 체력적으로 힘든 순간도 있었다"라고 웃으면서 "그렇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경기를 치르면 없던 힘도 생긴다. 마운드 위에서 가장 큰 희열을 느낀 게 2015년이었다"고 했습니다.
한화 팬들은 여전히 권혁에 대해 미안함을 표현합니다.
그러나 그는 "한화 팬들께는 나도 죄송하다. 팀 성적이 아주 좋지도 않았고, 내가 2018시즌이 끝난 뒤 팀에 방출 요청도 했다. 이유는 있었지만, 팬들께는 죄송하다"고 했습니다.
한화가 권혁의 방출 요청을 받아들이자, 두산이 2019년 권혁을 영입했습니다.
2019년 57경기에 등판했던 권혁은 올해 어깨 통증 탓에 15경기만 던졌습니다.
권혁은 "작년에는 '더 잘 던질 수 있는데'라는 아쉬움이 앞섰다. 올해는 '현역 생활을 연장하는 게 구단에 폐를 끼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며 "두산은 내게 2년의 시간을 더 주셨다. 그리고 2019년 한국시리즈 우승 멤버로 만들어주셨다. 두산에서 참 많은 걸 얻어간다. 감사하다"고 밝혔습니다.
19년 동안 마운드 위에서 전쟁을 펼친, 자신을 위해서는 할 말이 없을까.
권혁은 "간지럽게 내가 나에게 무슨 말을 하겠나"라고 손사래 치면서도 "프로야구 선수 권혁은 누릴 수 있는 건 다 누렸다. 삼성, 한화, 두산 등 좋은 팀에서 좋은 동료, 지도자를 만난 덕에 여기까지 왔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한국시리즈에도 8번 나가서 6번이나 우승 멤버(2006, 2011, 2012, 2013, 2014, 2019년)가 됐다. 내가 가진 능력 이상으로 많은 걸 누렸으니, 감사한 마음만 남았다"고 했습니다.
권혁은 떠났지만, 두산 동료들은 플레이오프를 치릅니다.
후배 투수들을 향한 조언을 구하자, 권혁은 또 단호하게 "없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는 "엔트리에 든 투수들 모두가 나보다 기량이 뛰어난 선수들이다. 조언이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만, 혹시 큰 경기에서 실점하더라도 복기는 하되 좌절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 구원 투수는 심리적으로도 매우 힘든 자리다. 그 스트레스를 잘 극복했으면 한다. 특히 처음 포스트시즌을 치르는 젊은 투수들에게는 실패도 성장의 동력이 된다"고 애틋한 마음을 전했습니다.
권혁은 "이제 마음 편하게 야구 경기를 볼 수 있다"고 웃었습니다.
19년 동안 냉혹한 프로의 세계에서 패전에 아파하고, 승리에 환호했던 '투수 권혁'에게 자신이 전하는 최고의 선물은 '편안함'이었습니다.
[MBN 온라인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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