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닷컴 MK스포츠 김원익 기자]
빙그레 이글스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선봉장, 악바리, 이글스의 캡틴 등 이강돈 현 북일고 감독을 수식하는 말들은 많다. 포기를 모르는 근성으로 5점을 내주면 10점을 되갚아줬던 빙그레 이글스를 떠올리면 영원한 2번타자이자 캡틴 이강돈을 빼놓을 수 없다. 이 감독은 이글스를 대표하는 타자로 12년간 1217경기에 출장해 통산 타율 2할8푼4리 1132안타, 87홈런, 556타점, 533득점, 88도루를 기록했고, 외야수 부분 3회 골든글러브 수상, 2회 최다안타상 수상, 한국프로야구 사상 두 번째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하며 1980년대와 1990년대 초 큰 족적을 남겼다.
행운이 겹쳐졌다. 사이클링히트를 했던 1987년은 성적이 좋지 않았다. 8월27일 잠실구장에서 OB 베어스와 경기가 있었다. 그때가 마침 장마철이었다. 시합 진행 여부가 결정되지 않고 양팀 모두 연습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 경기 1시간 전에 오더를 서로 교환했는데 우리 팀 투수가 손문곤이라는 좀 약한 투수가 나왔다. 반면에 저쪽은 계형철이었다.
OB쪽에서 시합을 진행했겠다.
그랬다. 당시 김성근 감독님이 OB사령탑을 맡고 있었는데 1년에 3승 정도 하는 투수가 나오다보니 ‘시합을 하자. 빨리 물빼라’고 직원들을 독려해서 결국 경기를 진행했다. 홈팀의 결정이 절대적이었으니까 비가 오는 와중에도 경기가 진행됐다. 결국 첫 타석에서 홈런, 안타, 2루타, 마지막에 3루타를 쳤다. 정말 극적이었다. 그런데 마지막에 3루타도 사실 3루타가 될 것이 아니었다. 그 때 OB 우익수가 김형석이었는데 김형석은 그냥 2루타가 될 줄 알고 편하게 있다가, 내가 갑자기 뛰니까 당황을 해서 공을 찾느라고 난리가 났다.
결국 3루까지 도착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전광판에 안타에만 불이 올라가 있고, 에러에는 불이 안 올라가 있는 거다. 정확하게 따지면 ‘원히트 원에러’를 줄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3루타로 인정됐다. 그때는 얼마나 기쁘던지 나도 모르게 3루에서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돌면서도 사실 의식은 했는데 타구 방향이 절대 3루타는 아니었다. 김형석이 풀을 뽑고 있으니 냅다 뛰었다. (웃음) 비가 왔는데 경기가 진행 된 것이 나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그 때 이정훈이 연속안타 기록을 막 마쳤을 당시였는데 일주일 후에 내가 사이클링히트를 기록해서 겹경사가 난 셈이니까 빙그레에서는 난리가 났다.
2년 연속 최다안타 기록만큼 소중한 기록이겠다. 아무튼 안타를 치는 데는 정말 일가견이 있었던 것 같다. 2번 타자로서 각종 기록을 모두 새로 썼다.
그때는 정말 연습량도 많았고 누구 못지않게 승부욕이 강했다. 아마 2번타자로 최다안타, 홈런, 타점 기록을 내가 다 새롭게 썼을 것이다. 그때 당시만 해도 스윙스피드는 자신 있었다. 스트라이크 존에서 조금 빠져나가는 공은 전부다 쳤다. ‘미친 타격’이라는 말도 들었다. 그만큼 자신감도 있었고 정확성도 있었다.
김영덕 감독님이 부임하시면서 2번으로 고정시키셨다. 그 당시에는 1번 타자가 출루하면 2번타자는 거의 번트를 댔는데, 김 감독님은 번트를 대지 않기 위해서 나를 2번에 배치했다. 안타도 많이 치고 작전도 능하기 때문에 출루, 안타, 타점까지 기대했다. 말하자면 ‘일타 삼피’를 노렸던 셈이다. 후속 타선도 쉬웠다. 타점도 많이 올렸다. 이정훈이 나가고 내가 나가면 3,4,5번 타자는 어떻게든 안타하나만 치면 타점을 올릴 수 있으니까 경기가 쉽게 풀렸다.
이 감독 역시 뒷 타선의 도움을 받았지만, 아무래도 2번 타순에 있으면서 동료들을 받쳐주느라 빛이 가려진 면도 있을 것 같다.
그런 부분도 없지는 않다. 그래도 나중에 기록으로도 다 드러나지 않나. 안타나 타점이나 그런 부분에 있어서 빛을 못낸 편도 아니었다. 참 우리는 타순이 좋았다. 상대 팀 투수들이 많이 두려워했다. 그때 1번 이정훈, 2번 나, 3번 고원부, 4번 강정길, 5번 유승안, 6번에 전대영 아니면 김상국이 주로 들어섰는데 6번까지는 상대하기가 상당히 까다로웠을 것이다. 다이너마이트 타선은 1기 이후에 2기도 있다. 장종훈이나 강석천 같은 선수들도 이어서 합류했다.
뭐 네 번 한국시리즈에 올라가서 다 준우승에 그쳤으니까. 세 번을 해태한테 지고 한번을 롯데에게 졌다. 아쉬움은 정말 많다. 그 때 정말 우승을 한 번 했어야 하는데. 정말 선동열이라는 그 산을 못 넘어서...무등산 폭격기라는 그 산을 못 넘어서 번번이 졌지.
선동열 KIA 감독의 당시 공은 어떤 수준이었나.
정말 빨랐다. 그 때 우리가 장난으로 ‘너는 한국에서 야구를 하면 안되겠다. 재미가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래도 나는 (선)동열이 공을 그렇게 무서워하지는 않았다. 자신감이 있었다. 아마 때도 홈런을 한번 치고 프로에서도 한 번 홈런을 쳤다. 프로에서는 1989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홈런을 쳤다.
선동열에게 홈런을 쳐본 선수도 많지 않은 마당에 한국시리즈에서 홈런을 쳤던 선수도 흔치 않을 것 같다. (선동열은 1989년 5월 9일부터 1990년 9월 25일까지 역대 최다 타석에 해당하는 1186타석 무피홈런 기록을 갖고 있다. 무피홈런 투구이닝 역시 319이닝으로 최다. 선동열 KIA 감독은 현역시절 한국 통산 367경기에서 내준 홈런이 28개에 불과하다.)
아마 거의 없지 않나 싶다. 그런데 1차전에서 그렇게 선두타자 홈런을 쳐서 이겨놓고 내리 4연패를 했으니 뭐...
결국 투수력이었다. 우리도 좋은 투수들이 있었지만 투수력이 해태에 비해서 떨어졌다. 특히 우리는 확실한 마무리 투수가 없었다. 해태는 선동열도 마무리로 나올 수 있었다. 이후에도 선동열이 마무리로 전환하면서 확실히 경기를 잡아냈다.
당시 빙그레 다이너마이트 타선에 비견될 수 있는 팀은 해태밖에 없었다. 빙그레와 해태 중 어느 쪽 타선이 더 강력했다고 생각하나.
해태는 이순철, 김성한, 박철우, 한대화 등 좋은 타자들이 많았다. 사실 완성도로 보면 해태가 조금 더 나았다고 생각한다. 개개인의 능력 차이가 있었다. 한대화 김성한 등으로 구성된 중심타선의 장타력과 무게감이 해태 쪽이 조금 더 좋았던 것 같다.
좋은 타자는 한두 가지 조건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모든 상황에 대해서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타자가 가장 좋은 타자인 것 같다. 그런 유연성을 가지고 있는 타자가 잘할 수 있는 확률이 가장 많다고 생각한다. 우리 팀 이정훈과 장종훈 같은 선수들이 그런 면들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야구를 참 잘하지 않았나.
下편에서 계속
[one@maekyung.com]
빙그레 이글스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선봉장, 악바리, 이글스의 캡틴 등 이강돈 현 북일고 감독을 수식하는 말들은 많다. 포기를 모르는 근성으로 5점을 내주면 10점을 되갚아줬던 빙그레 이글스를 떠올리면 영원한 2번타자이자 캡틴 이강돈을 빼놓을 수 없다. 이 감독은 이글스를 대표하는 타자로 12년간 1217경기에 출장해 통산 타율 2할8푼4리 1132안타, 87홈런, 556타점, 533득점, 88도루를 기록했고, 외야수 부분 3회 골든글러브 수상, 2회 최다안타상 수상, 한국프로야구 사상 두 번째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하며 1980년대와 1990년대 초 큰 족적을 남겼다.
프로 통산 두 번째 사이클링히트를 달성한 이강돈 감독은 당시 기록이 행운이 깃든 것이었다고 고백했다. 사이클링히트를 달성하고 받은 사사키 제품의 배트 세 자루와 KBO에서 준 황금배트를 들고 이강돈 감독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이강돈 제공
대기록은 보통 운이 있어야 한다고 하지 않나. 사이클링히트도 그런 맥락이 아니었나. (이강돈 감독이 통산 2호 사이클링히트를 기록한것을 포함해 사이클링히트는 단 14번 밖에 나오지 않은 희귀 기록이다.)행운이 겹쳐졌다. 사이클링히트를 했던 1987년은 성적이 좋지 않았다. 8월27일 잠실구장에서 OB 베어스와 경기가 있었다. 그때가 마침 장마철이었다. 시합 진행 여부가 결정되지 않고 양팀 모두 연습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 경기 1시간 전에 오더를 서로 교환했는데 우리 팀 투수가 손문곤이라는 좀 약한 투수가 나왔다. 반면에 저쪽은 계형철이었다.
OB쪽에서 시합을 진행했겠다.
그랬다. 당시 김성근 감독님이 OB사령탑을 맡고 있었는데 1년에 3승 정도 하는 투수가 나오다보니 ‘시합을 하자. 빨리 물빼라’고 직원들을 독려해서 결국 경기를 진행했다. 홈팀의 결정이 절대적이었으니까 비가 오는 와중에도 경기가 진행됐다. 결국 첫 타석에서 홈런, 안타, 2루타, 마지막에 3루타를 쳤다. 정말 극적이었다. 그런데 마지막에 3루타도 사실 3루타가 될 것이 아니었다. 그 때 OB 우익수가 김형석이었는데 김형석은 그냥 2루타가 될 줄 알고 편하게 있다가, 내가 갑자기 뛰니까 당황을 해서 공을 찾느라고 난리가 났다.
사이클링히트 달성 당시 3루에서 환호를 지르던 장면을 재연하며 이강돈 감독이 미소를 짓고 있다. 사진=김현민 기자
그럼 3루타가 안될 수도 있었겠다.결국 3루까지 도착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전광판에 안타에만 불이 올라가 있고, 에러에는 불이 안 올라가 있는 거다. 정확하게 따지면 ‘원히트 원에러’를 줄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3루타로 인정됐다. 그때는 얼마나 기쁘던지 나도 모르게 3루에서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돌면서도 사실 의식은 했는데 타구 방향이 절대 3루타는 아니었다. 김형석이 풀을 뽑고 있으니 냅다 뛰었다. (웃음) 비가 왔는데 경기가 진행 된 것이 나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그 때 이정훈이 연속안타 기록을 막 마쳤을 당시였는데 일주일 후에 내가 사이클링히트를 기록해서 겹경사가 난 셈이니까 빙그레에서는 난리가 났다.
2년 연속 최다안타 기록만큼 소중한 기록이겠다. 아무튼 안타를 치는 데는 정말 일가견이 있었던 것 같다. 2번 타자로서 각종 기록을 모두 새로 썼다.
그때는 정말 연습량도 많았고 누구 못지않게 승부욕이 강했다. 아마 2번타자로 최다안타, 홈런, 타점 기록을 내가 다 새롭게 썼을 것이다. 그때 당시만 해도 스윙스피드는 자신 있었다. 스트라이크 존에서 조금 빠져나가는 공은 전부다 쳤다. ‘미친 타격’이라는 말도 들었다. 그만큼 자신감도 있었고 정확성도 있었다.
통산 1000안타를 친 이강돈 감독이 현역 당시 기념 행사를 갖고 있다. 이 감독은 현역 당시 2회 최다안타상 수상했다. 특히 나쁜공도 무조건 쳐내는 배드볼히터로 명성이 드높았다. 사진=이강돈 제공
발이 빠르고 작전능력이 두드러지는 ‘전통적인 2번’이 아닌 지금 3번의 역할과도 비슷한 ‘공격형 2번 타자’의 시초였다. 김영덕 감독님이 부임하시면서 2번으로 고정시키셨다. 그 당시에는 1번 타자가 출루하면 2번타자는 거의 번트를 댔는데, 김 감독님은 번트를 대지 않기 위해서 나를 2번에 배치했다. 안타도 많이 치고 작전도 능하기 때문에 출루, 안타, 타점까지 기대했다. 말하자면 ‘일타 삼피’를 노렸던 셈이다. 후속 타선도 쉬웠다. 타점도 많이 올렸다. 이정훈이 나가고 내가 나가면 3,4,5번 타자는 어떻게든 안타하나만 치면 타점을 올릴 수 있으니까 경기가 쉽게 풀렸다.
이 감독 역시 뒷 타선의 도움을 받았지만, 아무래도 2번 타순에 있으면서 동료들을 받쳐주느라 빛이 가려진 면도 있을 것 같다.
그런 부분도 없지는 않다. 그래도 나중에 기록으로도 다 드러나지 않나. 안타나 타점이나 그런 부분에 있어서 빛을 못낸 편도 아니었다. 참 우리는 타순이 좋았다. 상대 팀 투수들이 많이 두려워했다. 그때 1번 이정훈, 2번 나, 3번 고원부, 4번 강정길, 5번 유승안, 6번에 전대영 아니면 김상국이 주로 들어섰는데 6번까지는 상대하기가 상당히 까다로웠을 것이다. 다이너마이트 타선은 1기 이후에 2기도 있다. 장종훈이나 강석천 같은 선수들도 이어서 합류했다.
빙그레 이글스를 이끌었던 투타 주역들. 왼쪽부터 이강돈 감독, 유승안 감독, 한희민, 송진우, 장종훈. 사진=이강돈 제공
그렇게 막강한 빙그레였지만 해태에게 막혀 늘 준우승에 그쳤다. 뭐 네 번 한국시리즈에 올라가서 다 준우승에 그쳤으니까. 세 번을 해태한테 지고 한번을 롯데에게 졌다. 아쉬움은 정말 많다. 그 때 정말 우승을 한 번 했어야 하는데. 정말 선동열이라는 그 산을 못 넘어서...무등산 폭격기라는 그 산을 못 넘어서 번번이 졌지.
선동열 KIA 감독의 당시 공은 어떤 수준이었나.
정말 빨랐다. 그 때 우리가 장난으로 ‘너는 한국에서 야구를 하면 안되겠다. 재미가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래도 나는 (선)동열이 공을 그렇게 무서워하지는 않았다. 자신감이 있었다. 아마 때도 홈런을 한번 치고 프로에서도 한 번 홈런을 쳤다. 프로에서는 1989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홈런을 쳤다.
선동열에게 홈런을 쳐본 선수도 많지 않은 마당에 한국시리즈에서 홈런을 쳤던 선수도 흔치 않을 것 같다. (선동열은 1989년 5월 9일부터 1990년 9월 25일까지 역대 최다 타석에 해당하는 1186타석 무피홈런 기록을 갖고 있다. 무피홈런 투구이닝 역시 319이닝으로 최다. 선동열 KIA 감독은 현역시절 한국 통산 367경기에서 내준 홈런이 28개에 불과하다.)
아마 거의 없지 않나 싶다. 그런데 1차전에서 그렇게 선두타자 홈런을 쳐서 이겨놓고 내리 4연패를 했으니 뭐...
이강돈 감독은 현재 고교 최강팀 북일고 사령탑을 맡았다. 눈덮힌 그라운드를 바라보고 있는 이강돈 감독. 사진=김현민 기자
해태와 빙그레의 차이점이 뭐였나. 결국 투수력이었다. 우리도 좋은 투수들이 있었지만 투수력이 해태에 비해서 떨어졌다. 특히 우리는 확실한 마무리 투수가 없었다. 해태는 선동열도 마무리로 나올 수 있었다. 이후에도 선동열이 마무리로 전환하면서 확실히 경기를 잡아냈다.
당시 빙그레 다이너마이트 타선에 비견될 수 있는 팀은 해태밖에 없었다. 빙그레와 해태 중 어느 쪽 타선이 더 강력했다고 생각하나.
해태는 이순철, 김성한, 박철우, 한대화 등 좋은 타자들이 많았다. 사실 완성도로 보면 해태가 조금 더 나았다고 생각한다. 개개인의 능력 차이가 있었다. 한대화 김성한 등으로 구성된 중심타선의 장타력과 무게감이 해태 쪽이 조금 더 좋았던 것 같다.
이강돈 감독이 기억하는 일본 프로야구 최다 안타 기록(3085개) 보유자인 장훈씨는 입담이 좋고 매너가 좋은 사람이었다. 일본 전지 훈련 당시 장훈씨를 만난 이 감독은 여유가 있고 곧잘 농담도 잘하곤 하던 그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사진=이강돈 제공
그렇다면 당대에서 좋은 타자로 꼽을 만한 선수들은 누구였나. 꼽는다면 조건은 어떤 것일까.좋은 타자는 한두 가지 조건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모든 상황에 대해서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타자가 가장 좋은 타자인 것 같다. 그런 유연성을 가지고 있는 타자가 잘할 수 있는 확률이 가장 많다고 생각한다. 우리 팀 이정훈과 장종훈 같은 선수들이 그런 면들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야구를 참 잘하지 않았나.
下편에서 계속
[one@maekyung.com]
기사에 대해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