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우당 이시영은 저의 빛이에요. 중요한 선택을 할 때마다 제일 중요한 기준은 할아버지 명예에 누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당의 손자인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마지막 질문에 참았던 눈물을 끝내 흘렸다. "우당의 손자라는 사실이 자신의 삶에 어떤 의미였나"는 질문이었다.
1910년 일본에 국권을 상실하자 우당 이회영 선생과 6형제는 전재산을 처분한 뒤 가족 50여명을 데리고 만주로 이주했다.
그곳을 기반으로 독립운동을 펼치기 위해서였다. 당시 조선의 4대 부자로 불리던 우당 6형제가 처분한 재산만 현재 시가로 600억원이 넘는다. 우당 6형제는 이 돈으로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 등 전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쳤다. 재산뿐 아니다. 우당 6형제 중 우당을 포함한 5형제는 독립운동에 목숨마저 바쳤고 해방된 조국에 돌아온 사람은 막내인 성재 이시영 선생이 유일했다. 1919년 4월 10일 상해에서 임시의정원 첫 회의가 열렸을 때 이회영·이시영 형제는초대 의원으로 참여했다. 그래서 우당의 손자인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3.1운동·임시정부 100주년 특별위원장'을 맡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00년 전 할아버지의 길을 따라 임시정부·의정원 100주년 행사를 위해 10일 중국 상하이로 떠나는 이종걸 의원으로부터 할아버지 우당 이회영과 임시정부 100주년의 의미에 대해 들었다.
-할아버지 6형제가 전재산을 독립운동에 쓰지 않고 물려줬으면 좋았을 걸, 이런 생각을 한 적은 없나
▶황현 선생의 <매천야록> 기록에 따르면 우당 6형제는 조선 4대 부자로 꼽혔다고 한다. 얼마 전 조광한 남양주 시장을 만났는데 둘째 할아버지가 남양주와 양주 등에 가지고 있던 땅만 해도 현재 가치로 100조가 넘는다는 했다. 우당은 조선 선조 때 공을 세웠던 백사 이항복의 10대손이었고, 그 후 정승만 12명을 배출했다. 가문의 땅은 나라로부터 받은 것이어서 나라를 잃었을 때 이 땅을 나라를 되찾기 위한 자금으로 사용해야겠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놀라운 것은 우당이 땅을 팔아 만주에 가서 독립운동을 하자고 했을 때 아무도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고무공장에서 일하면서 생계를 이어갔지만 독립운동에 쓴 재산을 전혀 아까워하시지 않았다. 다만 돌아가실 때 "경희대만큼은 찾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성재 이시영 선생은 해방 후 신흥무관학교를 계승하는 신흥전문학원을 세웠다. 하지만 1951년 신흥전문학원이 조영식에게 넘어가 현재의 경희대가 되었다)
-할머니(이은숙 여사)와 함께 살았던 것으로 안다. 할머니께서 우당 할아버지 말씀을 자주 들려주셨나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망명했다가 생계가 곤란해지자 자금을 구하기 위해 아버지를 임신한 몸으로 국내로 돌아오셨다. 1926년에 아버지가 태어나셨는데 우당 할아버지가 1932년에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한 번도 뵌 적이 없다. 할머니는 할아버지 얘기를 잘 꺼내지 않으셨다. 집에 할아버지와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이 찾아오실 때에만 말씀을 하셨다. 항일운동의 기억은 항일운동했던 사람들끼리만 공유하던 추억이었던 것 같다. 해방 이후 독립운동이자랑이 아니라 멍에가 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큰아버지(이규창)는 1935년 상해에서 친일파를 처단하다가 체포돼 감옥에서 10년을 보내고 해방된 뒤에야 풀려났다. 그런 큰아버지 댁을 늘 형사들이 지켰다. 어릴 때 큰아버지를 보호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감시하는 것이었다. 해방된 조국이 독립운동했던 분들을 그렇게 대접했다. 집에 찾아오는 독립운동가들이 대부분 가난하게 살았다. 그것이 참 슬펐다.
-찾아오신 분 중에 생각나는 분들이 있나
▶할아버지의 비서실장격으로 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을 하셨던 이관직 선생이 집에 가끔 오셨다. 이관직 선생이 어떤 분인 줄 아는가? 대한제국 군대의 대위였다.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된 뒤 신흥무관학교로 와서 교관으로 수많은 광복군을 길러 냈다. 광복군을 위한 군자금 마련에 앞장섰고, 3·1 운동 때는 학생들을 동원했다는 혐의로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광복군에서도 빛나는 전과를 올린 정쟁 영웅이다. 하지만 해방된 조국의 군대에서 이런 독립군들이차지할 자리는 없었다.
-상해임시정부를 건국의 기원으로 볼 것이냐를 두고 보수와 진보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상해임시정부는 3·1 운동의 결과로 탄생했다. 기미독립선언문의 기초가 된 것이 국외의 독립운동가 39명이 중국 만주에서 발표한 '무오독립선언'이었다. 여기에 성재 이시영 할아버지를 비롯해 김규식·김좌진·박은식·신채호·안창호·이동녕·이승만 등 쟁쟁한 인사들이 참여했다. 군주정이 아닌 공화정을 새로운 나라의 형태로 삼는 국민주권주의를 천명하고 있다. 천부인권에 관한 내용도 있고 여성에 대한 권리도 명확히 하고 있다. 이 정신이 상해임시정부의 헌법에담겼고 해방 후 제헌헌법에도 그대로 담겼다. 그래서 임시정부를 수립한 4월 11일을 근대적 나라형태를 갖춘 시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대한국민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내용을 1987년 개헌 때 헌법전문에 넣는 데 사촌 형이신 이종찬 전 의원이 큰 역할을 했다고 들었다
▶우당의 손자로서 당연한 일이다. 특히 이종찬 형님은 상해에서 태어나셨고 그곳에서 백범 김구 선생 등 상해 임시정부 사람들 속에서 자랐다. 그런 점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종찬 형님은 그때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시고 계시더라. 이종찬 형님이 국회의원 선거에 나섰을 때 의열단 소속이었던 이당우 선생 등 할아버지의 제자들이 적극적으로 선거를 도왔다. 이종찬 형님을 독립운동의 '적자'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우당 선생은 김원봉이 만든 의열단의 든든한 후원자이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김원봉 서훈 문제를 놓고 논란이 되고 있다
▶저희 집안의 역사를 걸고 김원봉 선생에 대한 명예훼손을 좌시할 수 없다. 김원봉은 가장 순도 높은 독립지사였다. 김원봉이 해방된 조국에 돌아왔는데 이미 친일했던 사람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일제시대 자신을 쫓아다녔던 악독한 고등계 형사들이 다시 해방된 조국의 경찰이 되어 '빨갱이'로 몰아 잡으려고 했다. 김원봉이 월북한 것은 그런 상황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임시정부·의정원 100주년은 어떤 해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보는가
▶우리가 100주년을 맞이해 가장 첫째로 해야 할 일은 '완전한 독립'이 아닐까 한다. 이회영과 이시영, 김구와 김원봉이 그토록 돌아가고자 했던 고국은 '하나의 고국'이었다. 첫 번째로 실현해야 할 과제는 하나의 조국을 만들어나가고 완전한 독립으로 나아가는 일이 아닐까.
-우당 이회영의 손자라는 사실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할아버지 형제의 독립운동은 우리 가족들 마음속의 긍지다. 처음 정치를 하려고 할 때 아버지가 말리셨다. 내가 하는 일에 반대한 것은 그것이 유일했다. 정치하면 큰 화를 입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셨고, 무엇보다 할아버지 이름에 누를 끼칠까봐 걱정하신 것 같다. 아버지께 절대 할아버지 명예에 흠집을 내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 약속은 지키는 것이 목표다.
※ 이종걸 의원 인터뷰 영상은 레이더P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홍성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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