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눈이 펑펑 내리던 지난 6일 오후 하월곡동 88번지. 속칭 '미아리 텍사스'로 불리는 성매매 집창촌인 이 골목은 유난히 추웠다. 길음역 10번 출구를 나서자마자 보이는 '청소년 출입금지' 팻말은 기자를 움츠리게 했다. 불과 약 200m앞에 고급 주상복합단지와 백화점이 불을 환히 밝히고 있었지만, 이곳은 어둠이 더 익숙한 곳처럼 보였다. 그렇게 작은 집창촌 입구를 세 개쯤 지나고 나서야 '건강한 약국'이 나타났다.
하월곡동 88번지 골목에 자리한 `건강한 약국` [사진 = 윤해리인턴기자]
22년째 미아리 텍사스에서 '건강한 약국'을 운영하고 있는 이미선 약사(56)의 미소는 약국 안 난로 만큼이나 따뜻했다. 외지인이 보기에 삭막한 동네일 수 있는 이 지역이 그에게는 고향이다. 결혼하며 잠시 미아리를 떠났던 이 약사는 약 10년만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고향으로의 귀환'을 '인생의 전환점'으로 삼는다는 그는 어려운 이웃들과 성매매 여성들을 돕기 시작했다.이 약사가 어린시절 하월곡동에서 찍은 사진 [사진 제공 = 이미선 약사]
이 약사는 그들을 돕는 이유에 대해 물었더니 곧바로 "착해서"라는 답변이 돌아왔다.그는 "여기 사는 사람들 대부분 남이 보기엔 좋지 않은 일을 하지만 그렇게 번 돈으로 부모님 집을 사주고 남동생 학비를 보내는 사람들"이라며 "어려서는 변호사가 되서 이 사람들을 돕고 싶었는데 어쩌다 보니 약사가 됐고 약사로서 할 수 있는 범위내에서 사람들을 돕고 있다"고 말했다.
손님과 대화하며 웃는 이 약사 [사진 = 윤해리 인턴기자]
이 약사는 10년째 '주민과 함께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웃들의 사소한 고민을 상담해주고 공방을 열어 함께 비누를 만든다. 그는 "이곳은 젊은 사람도 자신의 직업 등 신상이 드러날까 봐 무언가를 검색하고 질의응답 하는 걸 두려워한다"라며 "그런 사람들의 고민을 편안한 분위기에서 상담해주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웃들에게 전문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사회복지사 1급을 취득할 정도로 열정을 보여줬다.지역 주민들이 공방 활동을 통해 직접 만든 쿠키 [사진제공 = 이미선 약사]
그는 지난해부터 '다음 스토리펀딩'을 시작해 본격적으로 외부에 '하월곡동 88번지'를 알리기 시작했다. "이 지역에도 사람이 산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주목적"이라고 말한 이 약사는 지난 7월에도 스토리 펀딩을 통해 하월곡동의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줬다.두 차례에 걸친 스토리 펀딩을 통해 성매매 여성들과 10여 차례 이상 공방 수업을 하면서 독거노인을 돕기 위한 비누를 만들었다. 비누를 만드는 일이 성매매 여성들 자립에 도움이 될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지만 이 약사는 "이곳 여성들의 문제점인 낮은 자존감과 무력감을 없애는데 의외로 공방이 큰 역할을 한다"고 귀뜸했다.
그는 "여성들이 스스로 완성한 비누를 보고 '내가 이걸 해냈어'라는 성취감을 느끼고 행복해한다"고 덧붙였다. 만든 비누를 직접 사용하고 친구와 함께 다시 공방을 찾는 여성들도 있다.
주민들이 직접 만든 수제비누 [사진제공 = 이미선 약사]
수제비누는 이 지역 주민들의 수입원이 되기도 한다. 청소원 등 고정적인 수입이 없이 생계를 꾸려나가는 이웃들이 이 약사와 함께 비누를 만든다. 1개 4000원에 판매하는 비누의 수입은 원가를 제외하고 그대로 만든 사람에게 돌아간다. 단체 주문이라도 들어오면 이 약사는 얻는 것 없이 꼬박 비누만 만들어야 하지만 더 많은 이웃을 도울 수 있다는 생각에 행복해했다. 이 약사는 이웃들과 함께 비누 외에도 향수와 석고 방향제 등 다양한 상품을 만들 예정이다.하월곡동 88번지 생활을 설명하고 있는 이미선 약사 [사진 = 윤해리 인턴기자]
이 약사는 "성매매 여성들의 이야기를 외부에 알리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는 사람도 종종 만난다"고 토로했다. 항상 밝게 남을 도울 것 같은 이 약사지만 "왜 그렇게 사냐"는 말을 하는 사람을 만날 때면 피로가 쌓인다고 한다. 별의별 악플을 다 받아봤다는 이 약사는 "저 사람도 오죽하면 저렇게 심한 말을 하겠냐 생각해 그냥 넘긴다"며 쿨한 미소를 보였다.건강한 약국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씨앗 [사진 = 윤해리 인턴기자]
손님이 한 명씩 들어올 때마다 얼굴을 기억하며 대화를 이어가는 이 약사는 '하월곡동 88번지'를 진심으로 아꼈다. 그는 동네 주민들의 지친 영혼을 달래주고 낮은 자존감으로 인한 자학을 방지할 수 있는 '심리치료센터'가 생기면 좋겠다고 했다.최근에는 사람 냄새 나는 동네를 만들기 위해 인근 가게들과 '하월곡동 88번지 갤러리'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88번지 안 약 10곳의 가게들이 외벽에 그림을 걸어 동네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건강한 약국은 그림과 함께 '초록이 씨앗'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건강한 약국에 걸린 하월곡동88번지에서 찍은 이 약사의 사진 [사진 = 윤해리 인턴기자]
이 약사는 재개발이 되기 전까지 건강한 약국은 '마을 지킴이'로서 열심히 활동할 것이라 밝혔다. 또 재개발로 마을을 떠나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도움이 필요한 지역으로 가서 누군가를 도울 것이라고 다짐했다.취재를 마치고 나오면서 문득 이런 상상을 해봤다. 약국에서 무료로 나눠주는 '초록이 씨앗'이 언젠가는 꽃을 피우듯이, 도심 속 고립된 외딴섬 같은 이곳에 건강한 약국이 비추는 한줄기 빛이 태양처럼 쏟아지는 날이 올거라고.
[디지털뉴스국 노윤주 인턴기자 / 촬영 = 윤해리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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