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지하철 1호선 남영역이 위치한 남영동은 잔인했던 '고문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곳이다. 지금으로부터 딱 30년 전인 1987년 남영동 경찰 대공분실에서 일어난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는 6·10 민주화운동 도화선이 됐다. 지난 90년 말 남영동 분실이 사라지고 노무현 정권 때 경찰이 '인권보호센터'로 이 곳을 바꿔 문 열었지만 그간 이 곳을 찾는 이는 시민단체와 고문 피해자들, 일부 정치인들 뿐이었다. "부끄러운 반인권 경찰의 모습을 이 곳을 찾아 반성하라" 사회적 목소리가 컸지만 어느 누구도 역사 앞에 고개숙인 경찰관계자는 없었다.
9일 지난 2006년 인권센터 설립 이후 현직 경찰 총수로는 처음으로 이철성 경찰청장이 외부에 알리지 않고 조용히 이 곳을 찾았다. 이 곳 4층엔 30년 전 경찰 물고문으로 박열사가 사망했던 대공분실 509호가 있는데 당시 물고문에 사용됐던 욕조와 세면대 등이 그대로 보존돼 있고 영정사진이 걸려있다.
이 청장은 박군의 영정사진 앞에 국화꽃바구니를 헌화하고 고개 숙여 묵념했다. '고문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고 적힌 현수막을 들고 시위에 나선 당시 대학생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 박 열사가 기타를 치는 모습 등 생전 모습이 담긴 사진과 유품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한참 바라봤다. 매일경제와의 통화에서 이 청장은 "과거 잘못된 선배들의 역사를 돌이켜 보고 가슴에 담아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는 뜻에서 조용히 둘러보러 왔다"고 말했다.
짧은 시간 방문이었지만 이 청장의 전 남영동 분실 방문은 의미가 크다. 이날은 30년 전 연세대에서 하던 이한열 열사가 전투경찰이 쏜 최루탄에 피격당해 숨진 날이기도 하다. 새 정부 출범과 더불어 올 해 30주년을 맞이한 6·10 항쟁에 대한 사회적 재평가 분위기가 일어나는 가운데 그간 인권침해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경찰 조직을 대표해 경찰청장이 직접 과거사 반성 행보에 나선 셈이다.
경찰은 민주화 이후에도 노무현 정권 시절 농민시위 진압현장에서 농민 2명이 숨진 사건을 비롯해, MB정권 시절인 2009년 1월 용산참사, 박근혜 정부 시절 백남기 농민 물대포 사망 사건 등으로 인권침해 논란 중심에 서왔다. 조국 민정수석이 최근 기자회견에서 "인권경찰로 거듭나는 것이 수사권 조정의 전제조건"이라고 밝힌 것 역시 이런 배경과 무관치 않다. 경찰 관계자는 "새정부 출범으로 경찰에 대한 인권보호 강화 목소리가 커진 가운데 부끄러운 역사도 되짚어 보고 경찰 역시 인권 의미를 되새기고 가슴에 간직하고 일하자는 뜻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6·10 민주화운동의 큰 원인을 제공했던 경찰 조직이 사실상 과거사 반성에 나선 가운데 30주년을 맞이한 추모열기도 사상 유례 없이 뜨거워지고 있다.
토요일인 10일 서울시청 앞에서는 30주년을 맞이해 '제30주년 6·10 민주항쟁 기념식'이 거행된다. 실외 광장에서 6·10 민주항쟁 기념식이 개최되는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기념식에는 정세균 국회의장을 비롯해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등의 유가족과 6월항쟁계승사업회, 사월혁명회 등 민주화운동단체, 여성단체 및 노동단체 등 전국의 시민사회단체 회원 그리고 홈페이지를 통해 참가 신청한 일반시민과 학생 등 약 5000여 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특히 올해는 박종철, 이한열 열사 외에도 그간 주목받지 못했던 황보영국, 이태춘 열사 등을 기리고 그들의 희생에 대한 기억을 새로이 복원하고 재조명하는 기회를 가질 예정이다. 부산·광주 등 전국에서도 지역별 기념식이 열릴 예정이다.
[최희석 기자 / 임형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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