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해녀 유네스코 등재됐지만…"2만여 명에서 4천명으로 급감"
해녀 조업이 가장 번성할 당시 제주에 얼마나 많은 해녀가 있었을까요.
제주 해녀의 인구 변환느 곧 해녀의 전성기와 쇠퇴의 흐름은 물론 당시의 역사를 그대로 대변합니다.
제주 해녀 연구에 대한 역사 기록은 조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5~16세기 초 제주에서는 관리들의 수탈을 견디다 못해 많은 백성이 제주를 떠나 육지로 도망가곤 했는데, 조정은 1629년 급기야 출륙금지령을 내려 제주도민이 섬을 떠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출륙금지령이 1850년 무렵가지 200년 넘게 지속하는 동안 제주인구는 서서히 증가했고 자연스레 해녀의 수도 증가했습니다.
일고여덟 때 얕은 바다에서 헤엄과 잠수를 익혀 열다섯 무렵 '애기해녀'로 성장하는 제주 여성들의 필연적 운명은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화산섬 제주에서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조선 숙종 때인 1694년 제주목사를 지낸 이익태가 쓴 지영록을 보면 '(제주에) 미역 캐는 잠녀가 많게는 800명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어 해녀의 수는 1700년대 초 900여명으로, 20세기 초인 1913년 8천391명에 이를 정도로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제주 해녀는 19세기 말부터 국내는 물론 일본, 중국, 러시아 등 국외로 나가 조업(바깥물질 또는 출가물질)을 했습니다.
뒤늦게 붙여진 명칭이지만 이들 해녀를 출가해녀(出嫁海女)라 했습니다.
제주 해녀들이 고향이 아닌 다른 지역으로 나가 물질을 하게 된 데는 국내·외 정치·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보다 많은 돈을 벌기 위함이기도 했으나, 근본적으로는 일본 어민들이 잠수기선과 아마(일본 해녀)들을 동원해 제주 수역에 대한 침탈이 끊임없이 이어져 소득이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출가해녀는 1915년 2천500명, 1929년 4천310명으로 늘어났고 일제 식민지 정책이 한층 강화되던 1930년대 들어 바깥물질도 정점을 이뤄 1932년에는 5천78명까지 증가했습니다.
출가해녀 수의 증가는 제주에서 물질하며 살아가기가 그만큼 어려웠음을 방증했습니다.
타지역으로 대거 진출한 제주 해녀는 뛰어난 잠수기술을 선보이며 식민지 시대 우리나라까지 활동 영역을 넓혔던 일본 아마들을 완전히 축출하기도 했습니다.
잠수 능력과 체력, 조직력, 동일한 시간대의 임금 문제 등 여러 면에서 제주 해녀가 일본 아마보다 월등히 앞섰기 때문이었습니다.
해방 후 고향 바다에 마음껏 조업할 수 있게 된 해녀는 1932년 8천662명이던 수가 1960년 1만9천319명, 1965년 2만3천81명까지 늘어나며 최고 전성기를 누리게 됩니다.
이후 1970년 1만4천143명, 1975년 8천402명으로 다시 감소하면서 일제 강점기 초기 해녀 수와 비슷한 수치로 줄어들었습니다.
해녀 인구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줄어들어 1980년 7천804명, 1990년 6천827명, 2000년 5천789명, 2010년 4천995명, 2015년 4천337명으로 꾸준히 감소했습니다.
1970년대 들어 해녀 인구가 감소한 데는 여성의 교육기회 확대로 인한 고학력화, 관광산업 등 3차 산업으로의 취업 기회, 다른 도시로의 취업 확대 등 다양한 분석이 나옵니다.
그런데도 해녀 인구 감소율은 다른 지역의 어업활동 인구의 감소율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편입니다.
60세 이상 고령 해녀(3천751명)가 전체 해녀의 85.7%에 이를 만큼 제주 해녀가 나이가 들어서도 오랫동안 같은 일에 종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수치는 청·장년층의 해녀 직업 기피 현상과 해녀 고령화를 의미하기 때문에 앞으로 해녀 문화 명맥이 끊길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한편, 제주에는 해녀 외에도 해남이 7명(2015년 기준)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해남은 제주도 조례에 따라 수협과 어촌계에 가입해 정식으로 인정받은 사람들로 현재 해녀와 함께 정상적인 잠수 조업을 하고 있습니다.
[MBN 뉴스센터 / mbnreporter01@mbn.co.kr]
해녀 조업이 가장 번성할 당시 제주에 얼마나 많은 해녀가 있었을까요.
제주 해녀의 인구 변환느 곧 해녀의 전성기와 쇠퇴의 흐름은 물론 당시의 역사를 그대로 대변합니다.
제주 해녀 연구에 대한 역사 기록은 조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5~16세기 초 제주에서는 관리들의 수탈을 견디다 못해 많은 백성이 제주를 떠나 육지로 도망가곤 했는데, 조정은 1629년 급기야 출륙금지령을 내려 제주도민이 섬을 떠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출륙금지령이 1850년 무렵가지 200년 넘게 지속하는 동안 제주인구는 서서히 증가했고 자연스레 해녀의 수도 증가했습니다.
일고여덟 때 얕은 바다에서 헤엄과 잠수를 익혀 열다섯 무렵 '애기해녀'로 성장하는 제주 여성들의 필연적 운명은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화산섬 제주에서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조선 숙종 때인 1694년 제주목사를 지낸 이익태가 쓴 지영록을 보면 '(제주에) 미역 캐는 잠녀가 많게는 800명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어 해녀의 수는 1700년대 초 900여명으로, 20세기 초인 1913년 8천391명에 이를 정도로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제주 해녀는 19세기 말부터 국내는 물론 일본, 중국, 러시아 등 국외로 나가 조업(바깥물질 또는 출가물질)을 했습니다.
뒤늦게 붙여진 명칭이지만 이들 해녀를 출가해녀(出嫁海女)라 했습니다.
제주 해녀들이 고향이 아닌 다른 지역으로 나가 물질을 하게 된 데는 국내·외 정치·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보다 많은 돈을 벌기 위함이기도 했으나, 근본적으로는 일본 어민들이 잠수기선과 아마(일본 해녀)들을 동원해 제주 수역에 대한 침탈이 끊임없이 이어져 소득이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출가해녀는 1915년 2천500명, 1929년 4천310명으로 늘어났고 일제 식민지 정책이 한층 강화되던 1930년대 들어 바깥물질도 정점을 이뤄 1932년에는 5천78명까지 증가했습니다.
출가해녀 수의 증가는 제주에서 물질하며 살아가기가 그만큼 어려웠음을 방증했습니다.
타지역으로 대거 진출한 제주 해녀는 뛰어난 잠수기술을 선보이며 식민지 시대 우리나라까지 활동 영역을 넓혔던 일본 아마들을 완전히 축출하기도 했습니다.
잠수 능력과 체력, 조직력, 동일한 시간대의 임금 문제 등 여러 면에서 제주 해녀가 일본 아마보다 월등히 앞섰기 때문이었습니다.
해방 후 고향 바다에 마음껏 조업할 수 있게 된 해녀는 1932년 8천662명이던 수가 1960년 1만9천319명, 1965년 2만3천81명까지 늘어나며 최고 전성기를 누리게 됩니다.
이후 1970년 1만4천143명, 1975년 8천402명으로 다시 감소하면서 일제 강점기 초기 해녀 수와 비슷한 수치로 줄어들었습니다.
해녀 인구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줄어들어 1980년 7천804명, 1990년 6천827명, 2000년 5천789명, 2010년 4천995명, 2015년 4천337명으로 꾸준히 감소했습니다.
1970년대 들어 해녀 인구가 감소한 데는 여성의 교육기회 확대로 인한 고학력화, 관광산업 등 3차 산업으로의 취업 기회, 다른 도시로의 취업 확대 등 다양한 분석이 나옵니다.
그런데도 해녀 인구 감소율은 다른 지역의 어업활동 인구의 감소율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편입니다.
60세 이상 고령 해녀(3천751명)가 전체 해녀의 85.7%에 이를 만큼 제주 해녀가 나이가 들어서도 오랫동안 같은 일에 종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수치는 청·장년층의 해녀 직업 기피 현상과 해녀 고령화를 의미하기 때문에 앞으로 해녀 문화 명맥이 끊길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한편, 제주에는 해녀 외에도 해남이 7명(2015년 기준)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해남은 제주도 조례에 따라 수협과 어촌계에 가입해 정식으로 인정받은 사람들로 현재 해녀와 함께 정상적인 잠수 조업을 하고 있습니다.
[MBN 뉴스센터 / mbnreporter01@m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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