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씨 비선실세 국정농단 의혹과 관련해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대학생들의 시국선언 행렬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2차 대국민담화를 통해 재차 사과를 했지만 5일 전국에서 벌어진 촛불집회에서 보여지듯 청년층 분노는 오히려 거세지고 있다.
지독한 취업경쟁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팍팍한 삶을 말그대로 ‘버텨온’ 다수의 청년들은 최순실 게이트에 큰 허탈감을 드러내고 있다. 경제·사회적 환경 탓에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한다는 의미에서 ‘삼포 세대’로까지 불리는 2030세대를 중심으로 ‘분노의 물결’이 일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 5일 오후 서울 대학로에서 ‘전국 동시다발 대학생 시국대회’를 연 이후 매일경제와 인터뷰한 ‘전국 대학생 시국회의’ 참여 3개대학 (한국외대·한양대·홍익대) 총학생회장들은 “허탈하고 화가난다. 믿을 수 없었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면서도 “더 이상 가만히 지켜볼 수 없다”며 거리로 나선 이유를 설명했다. 지난 2일 발족한 전국 대학생 시국회의는 최순실 사태와 관련해 전국 41개 대학 총학생회를 비롯해 70여개 대학생 단체가 참여하는 전국 단위 조직이다.
학생 대표들은 끊임없이 경쟁에 내몰린 청년들이 사회현안에 대해 목소리를 낼 여유조차 없다고 토로했다. 정치적으로 무관심하다는 비판을 받는 젊은 세대에게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오규민 한양대 총학생회장은 “생계형 아르바이트에 대외활동, 자격증 취득까지 취업경쟁에 내몰려 대다수 학생들이 여유가 없는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학생 대표들은 “이번 사태에 수많은 학생들이 거리로 나선 것은 더이상 참고 묵묵히 노력하기에는 (현실이)너무 절망적”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들은 ‘최순실 사태’를 바라보는 청년들의 분노가 극에 달한 이유로 ‘노력하면 된다’는 최소한의 희망이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류종욱 홍익대 총학생회장은 “상상조차 못할 특혜를 누리고 학점을 주지 않은 지도교수까지 교체했다는데, ‘왜 나는 이렇게 아득바득 살아야 하는가’라는 회의가 든다”고 말했다.
이슬 한국외대 비대위원장은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것은 노력하면 삶이 조금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 덕분 아니겠느냐”며 “특혜를 받는 누군가에게 항상 뒤쳐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 모두를 절망감에 빠뜨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학생 대표들은 국가 리더십에 대한 의문도 제기했다. ‘비선실세’에 의해 좌우되는 국가를 더이상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도 처음에는 ‘설마 그 정도는 아니겠지’라고 생각했다. 학생 대표들은 입을 모아 “너무 말이 되지 않아 처음엔 잘 와닿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의혹이 하나씩 사실로 밝혀지기 시작하자 생각도 바뀌었다고 한다.
최근 한 설문조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20대 지지율은 단 1.9%에 그쳤다. 류종익 학생회장은 “학생회도 학생들을 위해 어떤 목소리를 내야하는지 고민하는데, 국가가 매번 국민 의견 수렴절차를 거치기는 힘들더라도 최소한 소통하려는 노력을 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슬 비대위원장도 “예전에 비해 수월하게 국민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회가 됐는데도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 마다 좌절감을 느꼈다”고 토로했다.
6일까지 전국에서 100여개가 넘는 대학이 시국선언에 동참했다. 지난 2일에는 교수 2200명도 시국선언문에 서명하고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운동권 뿐만 아니라 평소 정치적 의견 개진에 소극적이었던 학생들까지 시위에 나서고 있다. 오규민 총학생회장은 “정치적 성향을 떠나 학생 참여가 줄을 잇고 있다”며 “대학가에 ‘가만히 있으면 바뀌지 않는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말했다. 한국외대는 학생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최근 10개 국어로 번역한 시국선언문을 발표해 화제가 됐다.
[황순민 기자 /임형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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