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 요즘 같은 저금리에는 무조건 투자를 하셔야 합니다. 저를 믿고 투자하세요.”
7년 전인 2010년 12월. 전북 전주의 최씨 할아버지(당시 87세)에게 하나금융투자 직원 김 모씨는 신상품인 ‘랩 어카운트(Wrap Account, 일임형 종합관리계좌)’를 소개했다. 랩 어카운트는 증권사가 고객 투자성향에 맞춰서 고객 자산을 주식이나 채권, 펀드, 파생상품 등에 투자해 운용해주는 계좌다. 할아버지는 김씨가 설명하는 랩 어카운트를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지만, 가족처럼 살갑게 대해주는 직원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결국 할아버지는 ‘하나 ETF 주식랩’에 가입했다. 김씨가 내민 서류에 이곳저곳에 서명을 하고 약정기간 2년으로 노후자금으로 모아둔 7000만원을 넣었다.
증권사 직원 김씨는 할아버지의 과거 투자전력을 조회하거나 본인 확인을 거치지 않고 자필 서명이 이뤄진 투자자 정보 확인서에 ‘적극적 매매를 통한 수익과 원금 초과손실 위험 감내 가능’ , ‘파생상품 및 파생상품 펀드에 투자 기간 3년’에 임의로 표시했다. 이렇게 할아버지를 ‘공격형 투자자’로 분류했다. 물론 최 할아버지는 이 상품에 가입하기 전까지 파생상품 펀드에 가입한 경험이 전혀 없었다.
그렇게 투자기간인 2년이 지난 뒤 할아버지는 남은 계좌 잔고를 확인하고 눈을 의심했다. 원금보다 2000만원 가량 줄어든 5086만원으로 쪼그라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상치 못한 손실에 당황한 할아버지에게 이 증권사는 또 다른 투자를 권유했다. 다른 랩 상품인 ‘하나맞춤랩’에 가입시켰다. 이번엔 안전한 투자를 위해 할아버지의 계좌는 ‘코스닥종목 투자금지’ 제한을 걸기도 했다. 그러나 증권사는 이를 무시하고 투자위험이 큰 코스닥 주식 등에 투자했고, 결국 할아버지 계좌에서는 추가 손실이 발생했다.
뿐만 아니라 이 증권사는 하나맞춤랩 상품을 팔면서 할아버지에게 월 1%에 가까운 운용 수수료를 약관으로 끼워넣었다. 연 12%에 달하는 고액이다. 일반 일임형 랩 상품의 수수료가 연 1%에서 많아야 3% 수준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김씨가 고령인 할아버지에게 받은 수수료는 일반 상품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많이 받은 것이다.
원칙을 어긴 증권사의 투자행위와 고액 수수료로 인해 2013년 1월부터 1년간 또 다시 2000만원 손실이 발생했다. 투자 3년만에 할아버지의 계좌에는 첫 투자금의 절반을 밑도는 3150원만이 남았다.
분통이 터진 할아버지는 “투자자 성향에 대한 적합한 확인절차가 이뤄지지 않았고, 금융상품에 대한 설명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며 지난해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법원은 할아버지의 손을 들어줬다. 서울남부지법 민사4단독 박상구 판사는 현재 ‘구순(九旬)’을 훌쩍 넘긴 최 할아버지(92)가 하나금융투자 주식회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고 15일 밝혔다. 박 판사는 “최씨의 손해액의 일부인 1369만9639원을 지급하라고 주문했다.
하나금융투자 측은 “최씨가 수수료와 투자위험 등이 적힌 투자설명서에 자필 서명과 사인을 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 주장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법원은 하나금융투자 측의 불완전판매 사실을 인정했다. 박 판사는 “고령으로 금융지식이나 투자판단 능력이 취약할 수 있는 최씨에게 손실 위험성에 대해 제대로 확인한 후 설명하지 않은 점이 인정된다”며 “랩 상품의 수익과 투자위험 등 구조가 주식과 펀드와는 다른데다, 최씨의 투자성향을 공격형으로 분류할 근거도 없어 원칙적으로 증권사 직원은 최씨에게 고위험 상품인 랩 상품을 권유해서는 안 되었다”고 못박았다.
다만 법원은 최씨 역시 투자 위험성을 충분히 알아보지 않고 증권사 직원의 말만 믿고 재투자를 해 피해가 확대된 측면이 있다며 증권사가 최씨의 손실 금액의 35%만 배상하도록 했다.
[서태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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