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공대는 야구로 비유하면 배트를 짧게 잡고 번트를 친 후, 1루 진출에 만족하는 타자였다. 그러나 학문의 세계에서는 만루홈런(탁월한 연구성과)만 기억된다.”
서울대 공대가 통렬한 자기반성을 담은 ‘2015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백서(부제:좋은 대학을 넘어 탁월한 대학으로)’를 최근 발간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서울공대가 백서를 발간한 것은 1991년 이후 24년만이다. 이번 백서는 이건우 공대 학장의 요청으로 성원용 전기·정보공학부 교수 등 6명의 교수가 참여했다.
12일 매일경제가 단독 입수한 이 백서에는 100페이지 넘는 분량에 걸쳐 홈런(실패 확률이 높은 어려운 연구)을 치려는 노력보다 1루 진출(단기 성과, 논문 수 채우기)에 만족했던 안이한 태도를 반성하는 문구들이 가득했다.
집필진들은 “근래 대한민국은 성장정체와 청년실업, 저출산 등의 문제로 미래에 대한 낙관적 전망보다는 비관적 전망이 우세한 나라가 됐다”면서 “안정지대(cozy zone)에 머무르고 있는 교수와 학교 시스템의 개혁을 희망하며 발간한다”고 밝혔다.
백서는 1946년 공대 발족 이래 양적 확대에도 불구하고 질적 성장을 이루지 못한 면을 반성하고 있다. 탁월한 연구성과를 내지 못한 이유로 교수들간 학문적 소통 부족으로 ‘타화수분(他花受粉·다른 꽃의 꽃가루를 받아 꽃을 맺는 것)’의 기회가 적다는 점을 들었다. 백서는 탁월한 성과를 내기 위한 방안으로 다재다능한 여우가 되기 보다는 하나의 주제를 깊이 파는 ‘고슴도치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현행 교수 임용제도의 문제점으로 세계 최고 역량을 가진 교수라도 해당 전공에서 자리가 나지 않으면 임용되기 어려운 점과 정년보장 심사에는 교수들간의 ‘온정주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국내외 대학과 비교에서 서울대 공대는 MIT 등 외국의 유명대학뿐아니라 1991년 설립된 홍콩과기대에 비해서도 뒤떨어졌다고 평가했다. 특히 포항공대에는 논문인용과 국제평가에서도 뒤쳐진 것은 교수들의 연구업적이 낮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백서 발간을 주도한 성원용 교수는 “우수한 학생들이 안정적인 대기업에 입사하거나 공무원이 되기 위해 스펙 경쟁에 뛰어든다면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이 우리에게도 현실화될 우려가 크다”면서 “무엇보다 (서울대 공대생의) 창업을 장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고용없는 성장’으로 대변되는 대기업 위주의 산업구조로는 현재의 국가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서 “서울공대가 대기업의 지원자가 아니라 적극적인 산업혁신과 국가 문제 해결의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이 절실해졌다”고 강조했다.
서울대 ‘공대백서’는 1991년에도 발간돼 한국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 이면우 산업공학과 교수는 백서에서 허술한 연구비 집행이나 부실한 실험교육 등 부끄러운 모습을 드러냈다. 이 교수는 새 ‘공대백서’ 발간 소식을 듣고 “교육이 국가의 미래를 보장하는 유일한 투자이며 새 패러다임에 맞는 대학교육부터 정의해야 한다”며 집필진의 용기를 평가했다.
[안갑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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