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앵커멘트 】
네덜란드 헤이그는 우리 근현대사에서 남다른 의미를 갖는 곳입니다.
약소국으로 겪을 수 밖에 없었던 온갖 차별과 무시를 받았던 100년 전과 비교하면 지금은 이게 같은 나라라는 생각을 갖기 힘듭니다.
한 세기동안 있었던 헤이그와 우리의 인연을 선한빛 기자가 되짚어 봤습니다.
【 기자 】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인 1907년.
일본과 맺은 을사 조약의 부당함을 폭로하기위해 이 준 열사 등 3명은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로 떠났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제지로 회의장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고 결국 이 준 열사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자결했습니다.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40여개국은 물론 주최국인 네덜란드도 우리에게 손조차 내밀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를 일본의 식민지 정도로만 취급하고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100여년이 지난 지금은 상전벽해라는 말을 실감케할 정도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그 단면을 보여주는 장면은 2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서울에서 열렸던 2차 핵안보정상회의에 네덜란드는초청국가가 아니였습니다.
네덜란드는 여러 루트를 통해 서울 회의에 참가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개최국의 권한으로 우리나라는 네덜란드를 초청했고, 그 덕분에 네덜란드는 2차 회의 참석은 물론, 3차 핵안보 정상회담 개최국까지 될 수 있었습니다.
100년 전 만국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문 밖에서 대한독립을 외쳐야 했던 우리나라가 이제 세계 외교의 중심에 당당히 서게 된 겁니다.
뿐만 아니라 이준 열사가 자결한 헤이그 이곳에서 일본 총리에게 위안부 문제 사과를 요구하는 당당한 외교도 펼치게 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우리 역사에선 치욕의 한 장면으로 남겨져있는 헤이그.
100년이라는 세월의 흐름 속에 우리는 오늘 또 다시 새로운 역사의 한 페이지를 그려가고 있습니다.
MBN뉴스 선한빛입니다.
네덜란드 헤이그는 우리 근현대사에서 남다른 의미를 갖는 곳입니다.
약소국으로 겪을 수 밖에 없었던 온갖 차별과 무시를 받았던 100년 전과 비교하면 지금은 이게 같은 나라라는 생각을 갖기 힘듭니다.
한 세기동안 있었던 헤이그와 우리의 인연을 선한빛 기자가 되짚어 봤습니다.
【 기자 】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인 1907년.
일본과 맺은 을사 조약의 부당함을 폭로하기위해 이 준 열사 등 3명은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로 떠났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제지로 회의장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고 결국 이 준 열사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자결했습니다.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40여개국은 물론 주최국인 네덜란드도 우리에게 손조차 내밀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를 일본의 식민지 정도로만 취급하고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100여년이 지난 지금은 상전벽해라는 말을 실감케할 정도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그 단면을 보여주는 장면은 2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서울에서 열렸던 2차 핵안보정상회의에 네덜란드는초청국가가 아니였습니다.
네덜란드는 여러 루트를 통해 서울 회의에 참가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개최국의 권한으로 우리나라는 네덜란드를 초청했고, 그 덕분에 네덜란드는 2차 회의 참석은 물론, 3차 핵안보 정상회담 개최국까지 될 수 있었습니다.
100년 전 만국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문 밖에서 대한독립을 외쳐야 했던 우리나라가 이제 세계 외교의 중심에 당당히 서게 된 겁니다.
뿐만 아니라 이준 열사가 자결한 헤이그 이곳에서 일본 총리에게 위안부 문제 사과를 요구하는 당당한 외교도 펼치게 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우리 역사에선 치욕의 한 장면으로 남겨져있는 헤이그.
100년이라는 세월의 흐름 속에 우리는 오늘 또 다시 새로운 역사의 한 페이지를 그려가고 있습니다.
MBN뉴스 선한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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