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봉제로 인해 기업의 인건비 부담은 늘어나고 청년 채용이 줄어 듬에 따라 정부가 대책 마련에 나섰다.
민간기업이 직무급제로 전환할 수 있도록 '매뉴얼'을 배포하고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다. 문제는 호봉제가 가장 공고한 공공부문에 대한 대책은 없이 민간기업만 등을 떠밀었다는 점이다. 공공부문에서 특히 입김이 강한 노동계에 굴복해 '반쪽 정책'을 내놨다는 비판이 나온다.
임서정 고용노동부 차관은 13일 정부세종청사에서 브리핑을 열어 '직무·능력 중심의 임금체계 확산 지원 방향'을 발표했다. '직무 중심 인사관리 따라잡기'라는 제목의 매뉴얼을 발간한 데 따른 것이다. 기본급 지급 방식을 호봉제에서 직무급으로 전 환하는게 메뉴얼의 골자다. 기존 임금항목 중 기본연봉, 성과연봉, 식대, 각종 수당을 기본급으로 통합하고 임금체계를 기본급(직무급)과 성과급·수당으로 단순화하는 방안도 담겼다.
◆같은 일하면 원하청도 같은 보수, 같은 직무 과장보다 대리가 잘 하면 더 받아
직무급은 난이도 등 직무의 가치에 따라 임금을 지급하는 방식을 말한다. 이론적으로 직무급제 하에서는 원청 소속이든 하청 소속이든 같은 업무를 한다면 같은 임금을 받는다. 본인의 직무를 잘했느냐 못했느냐에 따라서만 임금 차이가 발생한다. 때문에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의 원칙에 가장 부합한다. 그러나 관건은 직무급 도입의 선결조건인 '직무평가' 작업이다. 즉 누가 어떤 기준으로 직무를 분류하고 그에 따른 임금테이블을 만드는지가 핵심인 것이다. 이 기준이 흔들린다면 직무급제는 무력화된다.
이날 정부가 발간한 매뉴얼은 이런 기준을 세우기 어려운 중소기업을 위해 NCS(국가직무능력표준)를 기반으로 점수표를 만든 것이다. 가령 고용부가 예시로 든 사무관리직 점수표를 보면 기술(23%), 노력(24%), 책임(43%), 작업조건(10%)로 직무를 평가(1000점 만점·괄호안은 비중)하게 된다. 각 항목에 대해 레벨(난이도) 1부터 레벨 5까지 점수를 메기는데 기술 항목의 경우 레벨 1은 42점을 받지만 레벨 5는 230점을 받게 된다. 즉 같은 직무라면 같은 '임금 테이블'에 올려지고, 본인의 역량에 따라 다른 임금을 받는 셈이다.
만약 같은 직무를 맡은 과장과 대리 중에 대리가 더 일을 잘한다면 임금을 더 받게 된다. 고용부 관계자는 "일반적으로 직급이 상승할 수록 더 높은 난이도(레벨)의 업무를 하기 때문에 직급과 레벨이 비례할 가능성이 높다"며 "다만 직급에 맞지 않게 난이도 있는 업무를 수행하지 못할 경우엔 아래 직급에서 난이도 높은 업무를 소화하는 부하 직원보다 직무급을 더 적게 받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당장 구속력은 없지만 직무별 임금 공개는 파장 클 수도
물론 고용부가 이날 발표한 매뉴얼은 단지 매뉴얼일 뿐 민간 기업에게 구속력을 가지진 않는다. 고용부의 복안은 우선 8개 업종에 대해 시범적으로 적용한 뒤 이를 시장에 정착시키겠다는 것이다. 임 차관은 "올해는 '직무 중심 인사관리체계 도입 지원사업'을 신설해 인사관리 전반에 대해 보다 내실 있는 지원이 이뤄질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설명했다. 직무급 도입을 위한 직무평가 수단이 개발된 공공, 철강, 보건의료, 정보기술(IT) 등 8개 업종의 기업이 직무급 도입을 희망할 경우 전문 컨설팅을 지원하는 것으로 올해 4억원의 예산이 책정됐다.
특히 고용부가 힘을 주는 부분은 '임금직무정보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을 통해 기업규모·산업 및 직종·경력 등에 따른 다양한 시장임금 정보를 분석·제공할 예정이다. 고용부 관계자는 "현재 호봉제가 계속되고 직무급제 보급이 더딘 이유는 다른 회사의 같은 직종이 얼마를 받고 있는 지 모르기 때문에 그 직무에 대한 '시장평가'가 이뤄져 있지 않기 때문"이라며 "미국의 경우엔 이런 직무별 임금 정보가 풍부해 아주 촘촘하게 직무급제가 설계돼 있다"고 말했다.
◆공공부문은 호봉제 끄덕없어 '반쪽 정책'
그러나 이번 매뉴얼의 발간에도 불구하고 호봉제 철밥통이 가장 심한 공공부문에 대해선 아무런 매뉴얼이 나오지 않았다는 한계점이 있다. 공공부문 직무급제 도입은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취임 일성이었으나 공공부문 노조의 반대와 총선을 의식한 여당의 압박으로 인해 논의가 지지부진한 것이다.
당초 기재부는 2018년 상반기 공공기관 등에 적용할 직무급제 매뉴얼을 내놓기로 했으나 노동계의 반대로 물거품이 됐다. 이에 차선책으로 용역을 발주해 작년말까지 직무별 임금을 공공기관 경영정보공개시스템(알리오)에 '공시'하기로 했으나 이마저도 미뤄졌다. 현재 알리오에선 기관별 평균임금, 임원 보수, 초임 등만 공개되고 직무별 임금은 공시되지 않는다. 정부 관계자는 "공공기관 직무급제에 관한 연구 용역은 그간 수차례 이뤄졌고 굳이 새로할 부분이 많지 않다"며 "정부가 여러 가지를 의식해 결론을 내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즉 노동계 눈치를 본다는 얘기다.
[김태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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